사람 교체보다 제도 개선이 먼저
금융당국의 금융사 지배구조·내부통제 개선 압박이 거세지면서 오는 3월 임기 만료를 앞둔 은행권 사외이사들이 대거 교체될 것이란 전망이 나오고 있다. 연합뉴스
금융당국이 금융사 지배구조에 대해 집중점검에 나서면서 금융사들은 눈치를 보고 있는 상황이다. 금융당국은 최고경영자(CEO) 승계과정, 내부통제체제, 임직원 성과보수 등의 적정성을 살피고 문제가 있으면 그 책임을 경영진에 묻겠다는 방침을 세워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최고경영자(CEO)들의 ‘셀프 연임’을 ‘방조’하게 하는 현행 사외이사 선임·운영 방식 등에 대해선 경고의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여기에 금융권 채용비리까지 불거지면서 금융사 사외이사 물갈이 가능성에 더욱 무게가 실리고 있다.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에 따르면 2017년 9월 기준, KB·신한·하나·NH농협 4대 금융지주의 사외이사 28명 중 24명의 임기가 오는 3월 만료된다. 사외이사는 ‘금융회사 지배구조 모범규준’에 따라 기본임기 포함 KB금융지주가 최대 5년, 나머지는 6년까지 연임할 수 있다. 이들의 연임 여부는 오는 3월 주주총회에서 결정된다. 24명 중 6명은 이미 사의를 밝힌 상태다.
가장 큰 변화가 예상되는 곳은 KB금융이다. KB금융의 경우 사외이사 7명 중 6명의 임기가 만료된다. 최영휘 이사회의장과 이병남·김유니스경희 이사, 이 3명이 퇴임 의사를 밝혔다. 기존 유석렬·박재하·한종수 이사는 연임할 전망이며 스튜어트 솔로몬 이사는 지난해 3월 선임돼 임기가 남은 상태다.
KB금융 사외이사후보추천위원회(사추위)는 지난 23일 선우석호 서울대학교 경영대학 객원교수·최명희 내부통제평가원장·정구환 법무법인 남부제일 대표변호사, 3명을 신임 사외이사 후보로 추천했다. 이번 사추위에는 윤종규 KB금융 회장이 참여하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KB금융노동조합협의회(KB노조)가 사외이사 후보를 추천한 것도 주목할 점이다. KB노조는 사외이사 후보로 추천한 권순원 숙명여대 경영학 교수 선임에 강한 자신감을 표한다. 지난해 11월 임시주총에서 최대주주인 국민연금공단이 노조가 추천한 하승수 후보에 대해 찬성표를 던졌기에 이번에도 찬성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녹색당 이력 등이 걸림돌로 작용한 하 후보와 달리 권 교수는 별다른 결격사유가 없다고 보고 있다. 권 교수가 사외이사로 선임될 경우 향후 다른 금융사들의 노동이사제 도입 움직임은 커질 전망이다.
신한금융은 기존 사외이사 10명 중 3명이 퇴임의사를 밝힘에 따라 분위기 일신을 꾀하고 있다. 이상경·이정일·이흔야 사외이사 3명이 연임 포기를 결정하면서 신한금융 사추위는 박병대 전 대법관·김화남 제주여자학원 이사장·최경록 전 게이오기주쿠대학교 연구원을 신규 사외이사 후보로 추천했다.
그러나 신한금융에서는 주주제안 후보가 나오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신한은행 노동조합은 시간적 제약도 큰 만큼 당장 후보를 내기보다 조합원·주주를 대상으로 노동이사제 도입 필요성을 우선적으로 설득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신한금융 노조는 최근 우리사주조합장을 맡겠다는 뜻을 사측에 전달했다. 4.7%의 지분을 소유한 신한금융 우리사주조합을 노조가 차지할 경우 노조에 힘이 실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사주조합엔 비노조원도 다수 있어 노조가 조합장을 맡을 수 있을지 장담할 순 없다. 현재 우리사주조합장은 신한금융 경영지원팀장이 맡고 있다.
하나금융은 금융당국과 껄끄러워진 관계를 해소하기 위해 사외이사를 대거 교체할 가능성이 높다고 점쳐지고 있다. 연합뉴스
하나금융의 노동이사제 도입은 요원하다. 하나은행 우리사주조합 내 노조 영향력이 크지 않을 뿐더러 노조도 당장 노동이사제를 강하게 주장하고 나서지는 않고 있다.
NH농협금융의 민상기·손상호·전홍렬·정병욱 사외이사의 임기도 모두 3월에 만료된다. 하지만 차기 사외이사 구성과 관련해 결정된 사항은 아직 없다. 농협금융 관계자는 “기존 사외이사 연임 여부, 신규 후보 추천 등과 관련해 아직 협의 중”이라고 설명했다.
금융권에서 예년과 달리 올해 주주총회에서 사외이사들이 대거 교체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는 까닭은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금융사 CEO들과 사외이사 선임 문제에 대한 금융당국의 압박이 거세기 때문이다. 친정부 인사를 영입해 정부와 관계개선을 꾀하고자 하는 금융사들의 의도도 내포돼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실제로 이번 주총에서 새로이 사외이사 후보로 거론되는 인물 중에는 문재인 대통령과 가깝거나 친정부 인사로 분류되는 사람도 있다.
금융권 일부에서는 금융권 사외이사 물갈이 분위기에 우려의 목소리를 내기도 한다. 대폭 교체가 금융조직에 혼란을 야기하고 개인의 전문성 발휘 등에도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게 이유다. 한 금융지주 사외이사는 “금융지주회사 자회사 수가 굉장히 많고 그 구조 또한 복잡해 개인이 이를 파악하고 익히는 데만 최소 2년은 걸린다”며 “이를 고려치 않고 대폭 물갈이를 할 경우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고 말했다.
금융당국은 금융권의 사외이사 대폭 교체 분위기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다. 금융감독원 관계자는 “사외이사들이 대거 교체된다고 문제가 되고 있는 금융사들의 조직문화와 지배구조 개선 등에는 큰 영향도 끼치지 못할 것”이라며 “차라리 모범기준을 만들거나 관련 법령을 개정하는 게 더 낫다”고 말했다.
이성진 기자 reveal@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