잇단 불통행정에 프로기사들 반발…구조조정 대상자 사무실 전기 차단 ‘황당’
프로기사 조혜연 9단은 최근 자신의 페이스북에 “중앙일보 홍석현 총재는 한국기원에서 물러나라”고 적힌 팻말 사진을 게시했다. 조 9단에 따르면 2013년 홍석현 전 중앙일보·JTBC 회장(현 중앙홀딩스 회장)이 한국기원 총재로 부임한 후, 중앙일보 출신 인사들이 한국기원의 요직을 장악하면서 프로기사들과 기원 수뇌부 간 소통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기원 집행부가 일방적인 행정으로 바둑계에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기원 전경. 최근 한국기원은 구조조정 한파, 유창혁 사무총장의 성차별 발언 파문, 프로기사들의 반발 등 내홍에 시달리고 있다.
# 프로기사들, 중앙일보 출신 집행부 불통에 반발
조 9단은 일요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기사들에 대한 징계 권한을 집행부가 프로기사회와 합의도 없이 강화하는 등 독단적 행정을 펼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중앙일보 인사들이 한국기원 행정을 맡으면서 불거진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최근 나에 대한 징계 여부가 기원 운영위원회에 올라간 것은 이해할 수 없다. 지난달 20일 서울 더 리버 사이드 호텔에서 있었던 ‘2018 엠디엠 한국 여자 바둑리그’ 개막식에 참여하지 못한 것에 대한 징계 여부가 논의된 것으로 들었다. 당시 나는 일본에서 바둑보급 행사에 참석하고 있었다. 이세돌 9단의 경우 대부분의 한국기원 행사에 불참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 참석하지 않은 나에 대한 징계를 운영위원회에서 논의한 것은 명백한 이중잣대다. 부당하게 안건이 올라갔다. 이에 대한 기원 측의 공식 사과를 듣고 싶다”고 말했다.
한국기원과 기사들 간의 불협화음은 이뿐만이 아니다. 최근 한국기원 송필호 부총재(전 중앙일보 부회장)는 한국기원 자회사인 세계사이버기원(주) 사이버오로의 곽민호 공동대표를 불러 해임을 통보했다. 인터넷 대국 사이트인 사이버오로는 근 20년 동안 곽민호 대표가 일으켜 세우고 기술력을 이끌어온 회사다. 하지만 한국기원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프로기사가 절반 이상 포진해 있는 이사회에서 해임안이 부결된 것이다.
조혜연 9단이 최근 자신의 페이스북에 중앙일보 홍석현 총재는 한국기원에서 물러나라고 쓰인 팻말 사진을 게시했다.
바둑계 한 관계자는 “최근 한국기원 현안에 대해 프로기사들이 사안마다 반대의견을 내고 있는 것은 유창혁 사무총장과 중앙일보 직원을 비롯한 현 한국기원 집행부의 일 처리가 그만큼 소통이 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를 기사들이 대외적으로 표출하기 시작했다고 보는 게 옳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또 “최근 프로기사 게시판에 일부 기사들이 한국기원 자금 70억에 대한 출처 공개를 요구했다. 이 역시 중앙일보 출신 집행부를 기사들이 불신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기원은 이에 앞서 직원들에 대한 구조조정으로 구설수에 올랐었다. 한국기원은 지난해 12월 사무국 전 직원을 대상으로 ‘불확실한 미래 경영 환경에 대비하기 위해 희망퇴직 제도를 실시한다’고 사내에 통보하고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한국기원 집행부는 구조조정 대상자들에게 전기조차 인위적으로 차단해 보는 이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한국기원 소식에 밝은 한 관계자는 “국내기전 폐지가 가속화되고 한국기원 경영이 어려워진 것을 현 집행부가 아닌 20년 이상 근무한 직원 탓으로 돌린 처사다. 게다가 구조조정 중 직원들 전기까지 끊은 것은 명백한 인권유린이며 노동탄압 행위다. 결국 이런 일들이 기원 집행부에 대한 불신을 안팎에서 가속화시킬 것”이라고 내다봤다.
# 유창혁 사무총장은 성차별 발언 공개사과
한국기원의 내홍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이번에는 유창혁 사무총장이 파문을 일으켰다. 최근 사회 각 분야에서 내부 성(性) 문제들이 폭로되는 가운데 지난 8일에는 유창혁 한국기원 사무총장이 과거 여성 기사들에 대한 자신의 성차별 발언을 공식 사과했다.
유 총장은 사과문에서 “국가대표 감독을 맡았던 당시 국가대표 여자 기사분들에게 성형을 비롯한 외모와 관련해 적절치 못한 발언을 한 것과 이로 인해 불쾌감을 느꼈을 당사자분들에게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밝혔다. 그는 “당시 국가대표 여자 기사 분들을 직접 만나 사과를 드리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돼 조속한 시일 내에 자리를 마련하고자 한다”며 “다시금 당사자분들에게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밝혔다.
일요신문 취재에 의하면 유 총장은 과거 여자 기사들이 모인 자리에서 “골프 선수들은 성형수술을 통해 예뻐진다. (여자 기사들도) 좀 더 꾸미고 다녀라”라든가 “위리쥔(대만 출신 여자기사)은 너무 예뻐서 뽑았고, 마리아(우크라이나 출신 여자기사)는 못 생겨서 안 되고…”라는 등의 성차별 발언을 했다는 것이다.
홍석현 한국기원 총재
하지만 유 총장의 사과문 발표에도 사태는 점점 확산되고 있는 추세다. 여자 기사들은 “유 총장의 사과문에서는 일본의 그것처럼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는다. 수년이 지난 일이지만 많은 여자 기사들은 그날의 발언을 잊지 못하고 있다. 반성보다는 오히려 뒤늦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유 총장이 사태가 더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 빠르게 수를 쓰고 있는 느낌을 받았다. 더 책임 있는 자세를 보여주기 바란다”고 촉구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관계자는 “최근 기전 유치가 힘든 것은 바둑 인기가 예전만 못한 탓도 있지만 언론사 사주가 한국기원을 대표하고 있는 것에도 영향이 있다”고 말한다. 그는 “현재 중단된 기전의 상당수는 과거 신문사들의 후원을 받아 열렸는데 현 한국기원 총재가 타 언론사 사주다 보니 적극적으로 기전 유치에 나서지 않고 있다. 언론은 언론의 역할을 하며 잘못된 방향을 지적해줘야 하는데 지금 바둑계에서는 이것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것 같다”고 말했다.
유경춘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