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기·내용·절차 놓고 “약속이다” vs “정략적” 부딪혀
개헌이라는 과제를 두고 여당은 추진, 야당은 심사숙고를 외치며 맞서는 가운데 ‘호헌세력’과 ‘개헌세력’의 대결, ‘개헌놀음, 개헌쇼’ 대(對) ‘국민 개헌’ 간의 대결 등 여야간 프레임 전쟁이 불붙고 있는 것이다.
선거는 정당의 생사 여부를 정한다는 점에서 지방선거를 앞둔 여야는 이번 프레임 전쟁에서 총력전을 벌일 태세다. 일단 개헌의 본원적 가치는 뒤로 빠지기 시작했고, 청와대·여당 대(對) 야당 간의 정치공학적 다툼의 중심에 개헌이 놓이는 상황으로 빠져들고 있다.
특히 청와대가 헌법 전문에 부마항쟁, 5·18 민주화운동, 6·10 항쟁의 민주 이념을 명시하겠다고 하자 보수 진보 진영 간 논쟁까지 시작됐고, “연방제 수준의 지방분권을 하겠다”고 수차례 강조했다가 막상 나온 헌법 개정안은 지방분권을 외쳤던 지방의 주민들에게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불평까지 불러왔다. 보수 대 진보세력, 수도권 대 지방간 갈등 등 또다른 대결 양상도 벌어지는 중이다.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이 3월 20일 춘추관에서 대통령 개헌안을 공개했다. 사진=청와대 제공
#여야 양보없는 충돌 개시
민주당은 청와대와 함께 “지난 대선 때 여야 후보들이 모두 약속한 지방선거 때 개헌은 국민과의 약속인 만큼 반드시 지켜야 한다”며 이에 반대하는 자유한국당 등 야권을 ‘호헌세력’으로 몰아붙이고 있다. 31년 전 개헌 당시 대통령 직선제 개헌에 반대하던 전두환 정부와 당시 여당이었던 민주정의당을 연상시키도록 만들면서 ‘호헌세력’이라는 용어를 불러온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 더불어민주당 우원식 원내대표는 “개헌 열차가 야당의 무책임한 발목잡기 탓에 지체되고 있다. 한국당과 바른미래당이 자신들의 협조가 없으면 개헌 추진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이용해 개헌 열차를 끝내 탈선시키면 국민과 역사는 낡은 헌법에 집착하는 ‘호헌세력’ ‘수구세력’으로 낙인찍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3월 22일 한병도 청와대 정무수석이 여야 지도부에 대통령개헌안을 직접 설명하고자 국회를 찾았지만, 자유한국당은 면담을 거부한 뒤 문재인 대통령의 개헌안 발표를 ‘개헌장사’라고 지적하면서 대통령개헌안 수령을 거부했다.
한국당 김성태 원내대표는 이날 의총에서 “대통령개헌안을 발의하면 하는 것이지 이걸 3일에 걸쳐 쪼개기 식으로 광을 파는 개헌쇼를 벌이고 있다”고 맹비난했다. 김 대표는 이 발언 수위도 모자란 듯 이날 ‘짜고 치는 사기도박단 같은 개헌 정치쇼’ ‘개헌장사’ ‘개헌 불장난을 이렇게 오래 하면 밤에 틀림없이 오줌을 싼다’ 등 원색적으로 청와대를 비난했다.
바른미래당은 문 대통령의 개헌안 발표가 이뤄진 첫날인 3월 20일 “지방선거에 이용하기 위한 알리바이용 개헌”이라고 폄하했고, 민주평화당 천정배 의원도 같은 날 한 라디오방송에 나와 “할리우드 액션이라고 부르는 것이 정확하다. 지방선거용 정략에 불과하다. 혼자 벽 보고 밀고 있는 모양새”라고 지적했다.
#왜 이리 거친 충돌을?
청와대가 대통령 개헌안을 내놓은 가운데 여당·청와대와 야당간의 개헌을 둘러싼 핵심 쟁점은 지방선거와 개헌 국민투표의 동시실시 여부다.
여당인 민주당은 겉으로는 ‘약속론’을 내세운다. 6월 지방선거에서 개헌 투표를 동시에 하는 것은 여야 모두가 지난 대선 당시 국민에게 한 약속인 만큼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더욱이 6월 지방선거 이후 개헌안만 따로 투표할 경우 1000억 원이 넘는 막대한 추가 비용이 든다는 점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야당들은 여당과 청와대의 겉과 속이 다르다며 반발하고 있다.
개헌 저지선(국회의원 3분의 1·현재 293석 기준 98석)을 확보하고 있는 자유한국당(116석) 경우, 6월 선거와 개헌 동시투표에 반대한다. 대외명분용으로는 국가적 대사인 개헌을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속전속결로 할 수 없다는 논리를 내세우고 있다. ‘심혈을 기울여’ 고민하고 또 고민한 끝에 개헌안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유한국당은 개헌 국민투표가 지방선거와 동시에 이뤄지면 개헌이 다른 선거 이슈를 압도, 야당의 필승카드인 ‘정권 심판론’이 제대로 발휘되기 힘들다는 우려도 하고 있다. 또 청와대와 여당이 계속적 개헌 바람몰이를 하면 지방선거 때 투표율이 급등할 수 있다는 걱정도 자유한국당 내부에서는 솔직히 갖고 있다. 투표율 급등은 보수 정당보다는 진보적 정당에 유리하다는 계산 때문으로 보인다.
바른미래당과 민주평화당도 청와대와 여당의 일방통행식 개헌 추진은 명분에도 안 맞고 지방선거에서 여당에 자칫 크게 밀릴 수 있는 악재로 보고 있다.
바른미래당 박주선 공동대표는 3월 20일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개헌을 빌미로 야당을 옥죄고, 지방선거에서 승리하겠다는 고도의 정략적 판단이자 계략으로 비치는 모습에 대해 심사숙고해야 한다. 개헌 무산의 책임을 야당에 떠넘기고, 지방선거에서 집권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의 승리를 견인하려는 정략적 목적의 개헌”이라고 몰아세웠다.
바른미래당 김동철 원내대표 역시 “청와대의 개헌 밀어붙이기는 개헌 무산의 책임을 야당에 떠넘기고 쟁점화해 지방선거에서 이용하려는 것”이라고 했다.
#위헌 논란에다 이념논쟁까지도 불러
문재인 대통령의 ‘대통령 개헌안’과 관련, 절차적 하자는 물론, 헌법 전문 개정의 부당성을 지적하는 목소리도 봇물을 이루고 있다. 청와대와 여당이 야권 외에도 또 다른 ‘암초들’을 만나기 시작한 것이다.
원로 헌법학자인 허영 경희대 석좌교수(82)는 3월 22일자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정부의 헌법개정안 준비 과정에 대해 “청와대 비서실이 아닌 국무회의 중심으로 이뤄졌어야 했다”고 지적했다. ‘국무회의의 심의를 거쳐야 한다(제89조)’는 헌법 규정에 충실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조 3호에는 헌법개정안 규정이 적시돼 있다.
그는 인터뷰에서 “아직까지 헌법 개정안과 관련해 국무회의를 열었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다. 청와대에서 자문위원들을 위촉해 그 사람들이 만든 걸 가지고 발의하는 것 아닌가. 발의 직전에 국무위원들이 심의한다고 해도 그건 ‘심사하고 논의’하는 게 아닌 결정된 사안에 거수기 노릇만 하는 것이다. 왜 현행 헌법을 헌신짝처럼 무시하고 하는지 알 수 없다. 일종의 위헌이다”고 지적했다.
바른미래당 김철근 대변인도 3월 22일 “청와대는 대통령 개헌안 발표가 헌법에 위배된 쇼에 불과함을 스스로 입증했다”며 “헌법 89조는 헌법 개정안 발의의 경우 국무회의 심의를 거치도록 규정하고 있지만, 청와대는 국무회의를 열어 대통령 개헌안을 심의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헌법 전문에 부마항쟁, 5·18 민주화운동, 6·10 항쟁의 민주 이념을 명시하는 내용의 대통령 개헌안을 두고서도 보수 정당은 물론, 일부 학자들의 반발이 터져나오고 있다. 헌법 전문은 헌법 개정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으로 전문을 손대서는 안 된다는 일부 헌법학자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 것이다.
한국당 정태옥 대변인도 헌법 전문에 부마항쟁과 5·18 민주화 운동, 6·10 항쟁 등을 담는 방안에 대해 “근현대의 모든 사건을 주저리주저리 넣을 필요도 없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진상이나 역사적 의미가 명확하지 않은 사건을 포함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이어 “좌파적 입장에서 의미 있는 사건을 나열하면 대한민국의 헌법이 아니라 좌파 세력의 헌법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개헌 지지세력이었던 지방의 반발까지
이런 가운데 문재인 대통령의 지방분권형 개헌에 대해 목말라했던 지방분권 운동가들은 대통령 개헌에 대해 “실망을 감추지 못한다”는 한목소리를 내고 있다. 문 대통령이 수차례 강조했던 ‘연방제 수준의 지방분권 개헌안’을 기대하면서 현 정부의 강력한 개헌 추동세력이 됐던 지방의 목소리가 대통령 개헌안에 반기를 들고 있는 것이다.
이기우 지방분권개헌국민회의 상임대표(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이번 개헌안에 지방정부의 법률제정권이 제대로 보장되지 않았다”며 “연방국가가 아닌 단방국가 이탈리아나 스페인에서도 지방정부의 법률제정권이 보장된다”고 지적했다.
전국자치분권개헌추진본부도 3월 21일 서울시청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온전한 의미의 지방분권이 되려면 지방의 입법 형식을 법률제정권으로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형기 지방분권개헌추진대구회의 상임공동대표(경북대 경제통상학부 교수)는 “국회에 지역을 대표하는 상원을 신설해 지방의 국정참여를 내실화하는 이른바 ‘지역대표형 상원제’ 도입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었다. 이로 인해 개헌 이후 지방자치를 이어나갈 안전판이 없는 게 가장 큰 문제다. C학점짜리 개헌안”이라고 혹평했다.
연방제 수준의 개헌안에 한참 모자란다는 지적에 대해 진성준 청와대 정무기획비서관은 ”‘연방제에 준하는’이라는 것은 정치적 표현이다. (우리나라가) 연방제 국가를 지향하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고 했다. 문 대통령의 ‘연방제 수준 지방분권’이 정치적 수사일 뿐이라는 점을 인정한 것으로 읽힌다.
#청와대 “밀어붙인다”
청와대는 일단 대통령 개헌안을 밀어붙인다는 방침이다.
진성준 청와대 정무기획비서관은 3월 22일 개헌안에 대한 마지막 발표를 마친 뒤 출입기자들을 만나 “정당 간 협상 시한은 아직 남았다. 3월 26일 대통령 개헌안이 발의되어도 국회에 시간이 있다. 이때 여야가 합의해서 개헌안을 마련해주실 것을 다시 한 번 당부드리고 촉구한다”고 언급, 국회가 개헌 논의의 중심에 서 있음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그러나 진 비서관은 “국회가 가진 시간 중에도 논의가 전혀 진행되지 않으면 그저 국회만 바라보고 있을 수는 없다”고 못박았다. 개헌을 위해 청와대가 끝까지 역할을 한다는 의미로 분석된다.
그는 “국회 설득을 위해 대통령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이다. 우선 헌법개정안이 발의되고 나면 국회와 상의해 대통령 국회연설을 추진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하고 있다. 헌법 81조는 국정에 관해 대통령이 국회에 나가 연설할 수 있게 했다. 무엇보다 원내 운영이나 의사일정에 핵심적 권한을 가진 각 정당 지도부를 만나거나 초청해서 설득할 예정”이라고 했다.
아울러 “국회 헌법개정특위, 정개특위 위원들과도 대통령이 만나서 설득하는 일정을 검토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를 두고 정치권 한 관계자는 “대통령 개헌안이 국회를 통과할 가능성은 전혀 없다. 바보가 아닌 이상 청와대와 여당도 이런 점을 잘 알고 있다. 청와대는 ‘국민을 위해 개헌 작업을 해왔다, 선거 횟수 줄이기 등 고질적인 정치적 낭비를 줄이기 위해 애썼다’는 점을 부각시키고 있다. 이를 통해 도덕적 우위를 획득, 향후에도 높은 여론 지지율을 유지해나가겠다는 의도다. 몰아치기 방식을 통해 정국 주도권을 절대 뺏기지 않겠다는 뜻으로 해석된다”고 했다.
최경철 매일신문 서울 정경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