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팡이균 습격’ 예방책 치료제 없어…아시아 아프리카 이어 남미까지 덮치면 대재앙
달콤하고 쫀득한 데다 영양가도 풍부해서 세계 각국의 국민 간식으로 사랑받는 바나나. 그런데 바나나가 지구상에서 완전히 멸종한다면? 이럴 경우 어쩌면 우리 다음 세대는 바나나맛을 모른 채 자랄지도 모른다. 바나나를 멸종 위기로 몰아넣고 있는 것은 바로 ‘푸사리움’이라는 곰팡이균이다. 만일 바나나가 이 곰팡이균에 감염될 경우에는 그야말로 속수무책이 된다. 한번 전염이 시작되면 바나나 농장 전체가 순식간에 초토화되고 말기 때문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마땅한 치료약이나 대책이 없다는 사실이다. 이미 3~4년 전 한 차례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휩쓸고 간 ‘푸사리움’은 당시 다행히 남미에는 상륙하지 않았지만, 위험은 아직도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언제 ‘푸사리움’이 방호벽을 뚫고 남미 대륙에 상륙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최근 시사주간 ‘포쿠스’는 그런 참사가 벌어질 경우 바나나 산업의 대재앙이 시작될 것이라고 경고하면서 대책 마련을 서둘러야 한다고 촉구했다.
어쩌면 우리 다음 세대는 바나나맛을 모른 채 자랄지도 모른다. ‘푸사리움’이라는 곰팡이균이 바나나를 멸종 위기로 몰아넣고 있기 때문이다.
바나나는 사실 나무가 아니라 파초과의 다년생 풀이다. 바나나 풀은 최대 10m까지 자란다. 한번 열매를 수확한 바나나 줄기에서는 다시 열매가 자라지 않는다. 때문에 열매를 수확한 후에는 밑동을 잘라내야 하는데, 이때 뿌리 부분을 제외하고는 모두 시들어 버린다. 얼마 지나지 않아 뿌리에서 다른 싹이 나와 줄기가 자라기 시작하고, 꽃을 피운 후 다시 바나나가 열리게 된다.
현재 바나나 품종은 전세계에 1000여 종이 있지만, 대부분이 야생 바나나로 식용으로는 부적합하다. 때문에 거의 모든 야생 바나나는 그저 관상용으로 기르거나 섬유를 만드는 용도로 사용되고 있으며, 간혹 요리용으로 소비되는 바나나도 있다.
우리가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고, 또 쉽게 구입할 수 있는 바나나는 씨가 없도록 개량한 돌연변이 품종인 ‘캐번디시’다. 학명은 ‘낙원의 과실’이라는 뜻의 ‘무사 파라디시아카(Musa Paradisiaca)’다. 캐번디시 품종은 달콤하고 맛도 좋기 때문에 전세계에서 사랑 받고 있으며, 야생 바나나와 달리 씨가 없기 때문에 소비 식품으로 이상적이다.
또한 캐번디시 품종은 열매도 빨리 자리고, 모양도 동일하며, 맛도 똑같기 때문에 생산자 입장에서도 효자 상품과 다를 바 없다. 치키타, 돌레, 델몬트 등 어떤 이름을 달고 나오든 모두 마찬가지다. 이로 인해 생산, 포장, 운송, 마케팅이 간편해진 것 또한 물론이다.
하지만 캐번디시에게는 치명적인 단점이 하나 있으니, 바로 푸사리움 곰팡이균에 대한 저항성이 없다는 점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푸사리움 균의 변종인 ‘트로피컬 레이스4(TR4)’에 대해 그렇다. 사실 캐번디시는 과거 한 차례 푸사리움의 공격을 막아낸 적이 있었다. 당시 푸사리움의 공격에서 살아남은 덕분에 그렇지 못했던 그로 미셸 품종을 대체해서 현재까지 사람들의 입맛을 책임지고 있는 것이다.
100여 년 전 사람들이 주로 먹던 바나나는 현재 우리가 즐겨 먹는 캐번디시가 아니라 그로 미셸이었다. 그로 미셸은 캐번디시보다 크기도 크고 단맛도 더 강하고 더 단단해 많은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50년 전 1세대 푸사리움 곰팡이균인 ‘트로피컬 레이스1(TR1)’에 의해 전멸당하다시피 하면서 시장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당시 마땅한 치료제는 물론이요, 예방책도 없었기에 그야말로 속수무책이었다.
전세계 바나나 농장들은 푸사리움으로 쓰러져 가는 그로 미셸을 대신해서 재빨리 이에 대해 면역력을 갖고 있는 캐번디시로 품종을 교체해 나갔다. 캐번디시는 당시 베트남의 외딴 농장에서 발견되었으며, 그후 수많은 상품 개발과 복제 연구를 통해 오늘날에 이르게 됐다.
하지만 그로 미셸이 그랬듯 캐번디시의 안정기 역시 오래 가지 못했다. 푸사리움이 바나나 농장을 휩쓸고 간 지 50년도 채 지나지 않은 지난 1989년, 대만에서 푸사리움 균이 또 다시 발견됐고, 이에 감염된 바나나 풀들이 말라 죽어간 것이다. 그리고 그후 20년 동안 푸사리움은 다시 한 번 아시아 바나나 농장을 초토화시켰다. 가령 2016년 5월, 바나나 최대 생산지인 필리핀 민다나오섬에서는 바나나 농장의 5분이 1이 감염되는 위험 사태가 발생했다. 그리고 나서 푸사리움은 중동과 아프리카로 뻗어 나갔다.
그렇다면 바나나 풀은 왜 푸사리움에 감염될 경우 전멸하고 마는 걸까. 그로 미셸이나 캐번디시 모두 문제는 유전적으로 동일한 단일 품종이라는 데 있었다. 단일 품종일 경우 멸종의 위험은 높아질 수밖에 없다. 유전적으로 다양하지 않기 때문에 특정 질병에 강한 유전자 하나만이라도 살아남아 종을 보전할 확률이 낮아지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모두 죽거나 혹은 모두 살아남는 두 가지 경우만이 존재하게 된다.
푸사리움이 휩쓸고 간 바나나 농장. 우리가 먹는 캐번디시 품종은 50년 전 전멸된 그로 미셸과 유전적으로 동일한 단일 품종이기 때문에 푸사리움에 감염되면 농장이 초토화된다.
물론 푸사리움이 아직 남미에 상륙하지 않았다고 해서 마냥 안심하고 있을 수는 없다. 언제 남미 대륙을 덮칠지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사람에게는 무해하지만 바나나에게는 치명적인 푸사리움은 토양 속에 존재하기 때문에 흙을 통해 이동되는 경우가 많다. 가령 사람 신발에 묻은 흙이 그렇다. 공격성이 강한 균류인 푸사리움이 이런 경로를 통해 행여 한 번이라도 국경을 통과할 경우에는 그야말로 삽시간에 퍼져 나가게 된다.
세계 최대 바나나 수출국인 에콰도르의 과야킬 항구에서 매일 방역 작업이 이뤄지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긴장감이 감도는 과야킬 항구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마치 곰팡이균과의 전쟁을 치르는 최전선인 것처럼 보인다. 하얀색 보호복과 마스크, 그리고 보안경을 착용한 방역 작업자들이 항구에 하역되고 있는 화물 컨테이너를 향해 수시로 살충제를 분사하는 모습도 종종 볼 수 있다. 이렇게 매년 항구에 하역되고 있는 컨테이너는 40만여 개. 컨테이너에 오염물이 묻어 있을 수도 있다는 경계심으로 ‘사니바나노’ 부대는 모든 컨테이너를 철저하게 소독한다.
전선을 총괄 지휘하고 있는 ‘사니바나노’ 관청 소속의 카를로스 무엔테스는 “우리의 임무는 푸사리움이 우리 땅에 상륙하는 것을 막는 것이다”라며 비장한 어조로 말했다. ‘사니바나노’란 바나나를 보호하는 임무를 맡은 일종의 ‘바나나 보호청’이다.
한편 위험 지역을 여행하고 돌아온 사람들 역시 공항에서 세관검사를 받기 전에 반드시 소독 구역을 통과해야 한다. 혹시 신발 밑창에 묻어 있는 오염 물질로 인해 곰팡이균이 유입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에콰도르가 이렇게 바나나를 보호하기 위해 열을 올리고 있는 이유는 바나나 관련 산업이 국가적인 주요 산업이기 때문이다. 지난 2016년 540만 톤의 바나나를 수출했는데, 이는 2위 필리핀(330만 톤)과 3위 과테말라(200만 톤)를 훨씬 웃도는 규모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필리핀산 수입량은 줄어들은 반면, 남미산 수입량은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으며, ‘포쿠스’에 따르면 현재 독일의 경우에는 수입산 바나나 세 송이 가운데 하나가 에콰도르 산이다.
현재 바나나 관련 산업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는 인구는 에콰도르 전체 인구 1700만 명 가운데 200만 명에 달한다. 사정이 이러니 만일 푸사리움이 남미에 상륙할 경우, 그야말로 대재앙이 시작될 것이라는 말이 과언이 아닌 셈이다.
과야킬에서 북쪽으로 10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300헥타르 규모의 ‘하치엔다 자포테’ 농장에서는 180명의 노동자들이 일하고 있다. 이들의 월 수입은 520달러(약 55만 원) 정도. 이는 에콰도르 최저 임금보다 조금 더 많은 액수다. 현재 이곳에서는 1헥타르 당 연간 1420박스의 바나나가 전 세계로 수출되고 있다.
푸사리움 공포와 더불어 ‘포쿠스’는 바나나 농장의 문제점도 지적했다. 아동 노동력 착취, 임금 덤핑, 과도한 농약 살포 등이다. ‘포쿠스’가 방문한 한 농장의 경우에는 1년에 18번씩 공중에서 농약을 살포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이는 바나나 잎을 시들게 하는 ‘블랙 시카토카(바나나 곰팡이균)’를 예방하기 위한 작업이었다.
그 어떤 문제보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푸사리움 감염에 대비해 대책을 세워놓은 농장이 한 군데도 없다는 사실이라고 ‘포쿠스’는 말했다. 화물차나 신발에 묻은 오염된 흙을 제거하는 간단한 살균 장치 하나 갖추고 있는 곳이 없다. 아무도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데 대해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으며, 기꺼이 이를 위해 돈을 지불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이런 부주의함에 대해 과야킬대학의 식물병리학자인 프레디 막다마는 “언제 곰팡이균이 우리의 방호벽을 뚫을지 모른다”며 답답함을 토로했다. 또한 그는 “모두들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은 확실히 알고 있다. 머지 않아 말이다. 그런데도 바나나 생산자들은 지금껏 그래왔듯이 주저하면서 아무 일도 아닌 듯 행동하고 있다. 나는 이런 태도에 몹시 화가 난다”고 말했다.
현재 막다마 교수는 소수의 연구팀과 함께 TR4에 대한 면역력이 강한 바나나 품종을 개발하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하지만 인력이나 연구비, 장비 등 무엇 하나 충분한 것이 없다. 또한 실험을 할 수 있는 안전한 실험실 하나조차 없는 열악한 형편이다.
몇 달 전 막다마 교수는 TR4에 저항성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야생 바나나 품종을 하나 발견했다. ‘캘커타 4’라고 불리는 이 바나나 품종은 크기가 작고, 전분이 너무 많으며, 달콤한 맛이 부족하기 때문에 아직까지 상업용으로는 가치가 떨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캘커타 4’의 가치는 매우 높다고 막다마 교수는 말한다. TR4에 강한 유전자를 찾아낸 후 분리해서 캐번디시 품종에 유전자 정보를 주입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막다마 교수는 “이 실험이 부디 성공적이 되길 바란다”고 말하면서도 “그런데 내가 이 실험을 완료하기 전에 적군이 남미에 상륙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며 한숨을 쉬었다.
김민주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