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곡된 합의서 반영에도 “국가 배상 책임 없다”…피해자 두번 운다
사건은 4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박 아무개 씨는 당시 사회적으로 문제가 된 전남 신안군 ‘염전 섬 노예’ 피해자 중 한 명이었다. 지적장애 2급인 박 씨는 염전에서 임금을 받지 못한 채 지난 2001년부터 2014년까지 14년간 일했다. 염전 주인은 박 씨가 일을 잘 못한다는 이유로 폭행을 일삼았다.
염전노예 사건이 사회에 알려지며 신안군 일대 염전에 대한 수사가 진행되자, 염전 주인은 노동력 착취 사실이 발각되지 않도록 박 씨를 감금하기도 했다. 수사기관의 노력 끝에 박 씨는 감금에서 풀려났고, 염전 주인은 감금 및 준사기, 근로기준법 위반 등으로 구속기소됐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재판에서 발생했다.
통상 피고인들이 감형을 할 때 가장 효과적인 대응 전략은 피해자 측의 처벌 불원 합의서다. 피해자가 “가해자의 처벌을 원치 않는다”는 입장을 재판부에 전달하는 것. 염주 측 변호인 역시 선고 3일 전, 피해자 박 씨의 지장이 찍힌 합의서를 제출했다.
통상 재판부는 합의서가 제출되면 피해자가 진정으로 합의를 원하는지 확인하는 절차를 거친다. 하지만 염전 주인의 1심 재판을 담당한 광주지법 목포지원 제1형사부는 별도의 확인 절차를 진행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 합의서를 근거 삼아 염주의 형량을 줄였다. 1심 재판부는 염주에게 징역 2년, 집행유예 4년을 선고했다.
가해자 측이 글을 모르는 피해자에게서 억지로 지장을 찍게 한 합의서. 당시 1심 재판부는 별도의 확인 절차를 거치지 않고 합의서의 효력을 인정했다.
이에 박 씨 측은 1심 재판부의 판단 과정으로 위법하다며 지난해 10월 서울중앙지법에 국가배상소송을 제기했다. 박 씨 변호인은 “1심 재판부가 피해자 박 씨의 의사를 확인하는 절차를 거치지 않았고, 박 씨가 재판절차에 출석해 의견을 진술할 권리조차 침해당했다”고 주장했다. 또 “피해자 의사가 왜곡된 합의서를 판결에 반영해 부당한 판결을 내렸고, 피해자는 이를 바로잡기 위해 항소심을 진행하면서 추가적인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받았다”며 국가를 상대로 1억 원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판례도 있다는 게 박 씨 측의 주장. 대법원 판례 중 ‘평균적인 법관의 입장에서 하였을 것으로 예상되는 것과 현저히 다르게 사실을 확정했다면 법관의 위법성과 과실이 인정된다’는 것이다. 특히 1심 재판부가 ‘평균적인 법관’으로서 지켜야 할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고 재판에서 주장했다. 박 씨 소송대리인은 “평균적인 법관이라면 피해자가 합의서를 법원에 직접 제출했는지, 본인서명 확인서 등이 첨부됐는지 여부를 확인한 뒤 재판에 반영한다”며 “더욱이 박 씨는 지적장애인으로 일반 사건보다 더 신중하게 판단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작된 합의서였지만 효과는 상당했다. 함께 기소된 다른 혐의에 대한 공소기각 사유로도 인정됐기 때문. 검사는 염주가 박 씨에게 임금 3700만 원을 지급하지 않은 사실에 근로기준법 위반 혐의를 적용했는데, 1심 재판부는 합의서를 근거로 “박 씨가 처벌을 희망하지 않는 의사표시를 한 사실을 인정할 수 있다”며 염주에 대한 근로기준법 위반 혐의에 대한 공소를 기각했다. 임금 체불 피해는 근로자가 사업주의 처벌을 원하지 않을 경우 처벌하지 않는 ‘반의사불벌죄’이기 때문이다. 염주에 대한 2심 형사 재판에서도 이 판단은 바뀌지 않았다.
안타까운 것은 1심 재판부가 다른 사건에 대해서는 합의서의 진위 판단을 했다는 점이다. 당시 1심 재판부는 박 씨 외에도 18건 이상의 염전노예 사건을 담당했는데, 그 중 지적장애가 있는 피해자 합의서의 효력을 인정하지 않은 판결도 있었다. 같은 재판부는 다른 사건에서 “처벌불원의 의사표시가 가지는 의미 등을 알아차릴 수 있는 능력이 현저히 부족하다고 보인다”고 판단했다. 심지어 박 씨가 이들에 비해 지능지수가 더 낮았다. 해당 합의서를 제출한 피해자 2명의 지능지수는 90, 75. 박 씨의 지능지수는 43이었다.
국가 상대 손배소 민사 재판에서 1심 재판부는 잘못을 시인했다. 박 씨 사건 1심 재판부의 A 판사 측은 추가적인 사실 확인을 거치지 않은 점을 민사 재판에 제출한 답변서를 통해 인정하며, “처벌불원서에 피해자의 지장이 찍혀 있는 점, 처벌불원서가 제출된 경위 등을 볼 때 효력을 인정할 만한 서류라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법원의 팔은 안으로 굽었다. 이번 사건을 심리한 서울중앙지법 민사50단독 송인우 부장판사는 “법관의 잘못이 있다고 해도 국가배상법에서 말하는 위법한 행위가 돼 국가 손해배상 책임이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라며 배상할 책임을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책임이 인정되려면 해당 법관이 위법 또는 부당한 목적을 가지고 직무 기준을 현저히 위반하는 등의 특별한 사정이 있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A 판사 등 1심 재판부가 사실 확정절차를 생략한 것이 법관의 직무수행을 ‘현저히’ 위반한 것은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다.
박 씨 측은 반발했다. 박 씨 측 변호인은 “지적장애 2급의 피해자가 직접 제출한 합의서가 아니고, 인감증명서도 첨부되지 않았다면 당연히 확인 절차를 거쳐야 하는 것 아니냐”며 “이를 수행하지 않은 게 현저한 위반이 아니라면 도대체 현저히 위반한 건 어떤 경우인지 궁금하다”고 비판했다. 이에 대해 서울고등법원의 한 부장판사는 “통상 법원은 동료 판사의 과실이 있다고 하더라도 엄청난 중과실이나 고의성이 없으면 국가상대 손배소를 인정해주지 않는다”며 “눈에 보이지 않는 동료 판사의 평판도 고려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효정 언론인 hyoj0310@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