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모임처럼 시작한 지 7개월 만에 세종문화회관 전시…“꿈 같아요”
가족들도 처음 듣는 얘기였다. 자신의 할아버지가, 자신의 남편이 북파 공작원이었다는 사실을. 자서전을 만드는 청년들의 모임 ‘달팽이’가 첫 번째 자서전을 만들며 겪은 일이다. 옆집 할머니, 동네 청년처럼 평범한 사람들을 위한 자서전을 만들자고 시작한 일인데 이상하게도 저마다 특별한 이야기가 있었다. 달팽이가 만든 자서전은 한 사람의 인생을 시대별로 정리한 연대기가 아니다. 스스로가 기억하고 있는 인생의 한 조각을 떼어내 기록한다. 화려하고 교훈적인 이야기가 자서전이 될 필요는 없었다. 저마다의 굴곡 있는 인생이 그 자체로 가치 있다고 봐서다.
달팽이는 평범한 사람들을 위한 자서전을 만든다. 왼쪽부터 배완(24), 김정재(24), 최규민(24), 이홍근(24), 황병철(23). 최준필 기자
달팽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본격적으로 활동하게 된 건 지난해 9월. 동갑내기 친구 이홍근 씨(24)와 김정재 씨(24)는 ‘자신이 평범해서 글로 남겨질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한 자서전을 만들어보자’는 생각을 나눴다. 우연히 유시민 작가가 쓴 엔딩노트 관련 스토리펀딩 글을 읽고 얻은 아이디어였다. 하지만 곧 이 씨가 공익근무요원으로 복무하게 되면서 자서전 프로젝트는 흐지부지해지는 듯했다. 이 씨는 “계속 이 작업을 해보고 싶다는 미련이 남았다. 그러던 중 군대 동기 (배)완이에게 이 프로젝트에 대해 말해봤는데 놀랍게도 그 친구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달팽이 디자이너 배완 씨(24)는 “작은할아버지는 평생 직업이 없으셨는데 최근에 돌아가시면서 본인의 일기나 기록들을 다 없애고 가셨다. 내가 알고 있던 건 그 분이 아주 예전에는 소설을 쓰셨다는 것 정도였다”며 “우연히 대학 도서관에서 그분의 소설 한 권을 발견했다. 내 가족이지만 이 사람이 너무 궁금해졌다. 그때 마침 (이)홍근이가 말을 걸어온 것”이라며 당시를 회상했다.
이런 식으로 모인 달팽이 구성원은 총 5명. 군대 동기, 학교 친구, 친구의 친구가 하나의 관심사로 모인 것. 전공자는 없지만 사진, 영상, 글쓰기, 디자인 가운데 본인이 자신있는 분야의 역할을 맡고 있다. 역할은 나뉘어있지만 인터뷰에 함께 참여하고 사진을 함께 고르며 끊임없이 대화하기에 모두가 같은 일을 한다고 볼 수도 있다.
달팽이 활동을 직업으로 삼을 생각이 있느냐는 질문에 영상 작업을 맡은 최규민 씨(24)는 단번에 “없다”고 손사래 쳤다. 다른 달팽이 구성원들의 생각도 비슷하다. 눈치 보지 않고 타인의 삶을 주제로 원하는 모든 실험을 해보고 싶어서다. 달팽이가 자서전 프로젝트를 무료로 진행하는 까닭이기도 하다. 평범한 사람들이 이야기를 기록한 잡지를 만드는 것이 달팽이 구성원들이 꿈꾸는 일이다.
이 씨는 “의뢰인에게는 제본비만 받고 있다. 현실적으로 아직 2명이 복무 중이라 영리활동을 할 수도 없다”며 “돈을 받지 않기 때문에 어떤 결과물이 나와도 좋아해 주신다. 아직은 이게 좋다”고 말했다. 배 씨는 “사진, 그림, 글, 영상의 재능을 가지고 주위 사람의 이야기를 주제로 하는 모든 작업을 시도해보고 싶다. 자서전이라는 콘텐츠에 한정시키고 싶지 않다”며 “잡지를 만들 수도 있고 영상 자서전을 만들 수도 있다. 실험 단계에 있는 거다. 자서전 프로젝트라고 이름 붙인 이유도 이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달팽이가 제작한 자서전은 지금까지 총 6권이다. 최준필 기자
달팽이가 자서전 한 권을 제작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평균 한 달. 먼저 의뢰인을 대상으로 사전 인터뷰를 진행하고 그 다음으로 자서전 주인공을 4시간 정도 인터뷰한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녹취록을 작성되면 이후 글쓰기, 디자인, 사진 보정 작업이 시작된다. 독특한 점은 인터뷰 과정에 자서전 주인공뿐 아니라 가족, 친구 등이 함께 참여한다는 것. 달팽이 멤버들은 가장 가까운 이에게도 알리지 않았던 내밀한 이야기를 풀어내는 그 과정 자체가 가치 있다고 판단한다. 달팽이 포토그래퍼 김정재 씨는 “친구의 외할아버지가 자서전의 첫 번째 주인공이셨다. 평범한 사람인 줄 알았던 할아버지가 16살에 북파공작원이 되셨는데 가족들도 몰랐던 이야기였다”며 “평범한 사람들을 찾자고 했는데 첫 작품에부터 당황했다(웃음)”고 말했다.
지난 5월 2일부터 5월 7일까지 6일간 달팽이는 세종문화회관에서 그동안의 자서전 작업물을 가지고 전시회를 열었다. 친구들끼리 취미모임처럼 벌인 일이 이렇게까지 될 줄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달팽이의 마포구 작업실은 그들의 SNS를 본 이사업체 사장님이 자신의 사무실을 쓰라고 내줬다. 이홍근 씨는 “사회가 청년이 뭔가를 한다는 것에 굶주려있다는 생각을 했다. 친구들끼리 재미있는 걸 해보고 싶었고 그냥 그걸 SNS에 올렸을 뿐”이라고 털어놨다. 김정재 씨는 “아무 생각 없이 시작했는데 사람들에게 알려졌고 전시도 하게 되다 보니 책임감이 생겼다. 이번에 팬도 생겨서 꽃다발도 받았다”고 웃었다.
달팽이 멤버들은 모르는 이의 삶을 캐물으며 역으로 자신을 돌아본다. 주인공과 자신의 차이를 발견하고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이 뒤엉켜 살아간다는 뻔한 사실을 다시 한 번 일깨운다. 달팽이 포토그래퍼 황병철 씨(23)는 “사람 생각이 이렇게까지 반대일 수 있다는 점에서 놀랐다. ‘그게 돼요?’라는 말을 반복하며 인터뷰를 말 그대로 감상했다”고 말했다. 배완 씨는 “자서전 주인공이자 영광에서 굴비 작업을 하는 할아버지의 삶은 노동과 생활이 경계가 없어 보였다. 눈떠서 일하다가 거리에서 친구 만나서 술 한잔하고 또 일한다”며 “일과 생활이 철저하게 분리된 나 같은 도시인에게는 각자의 삶에서 노동의 가치가 참 다양하다는 걸 느끼게 된 사례였다”고 말했다.
7개월간 달팽이로 활동하면서 그들의 삶은 달라졌고 또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공익근무요원으로 복무하고, 사진을 찍고 수업을 듣고 통장 잔고는 허덕인다. 하지만 달팽이 멤버들은 “그럼에도 많이 달라졌다”고 입을 모은다. 김정재 씨는 “사실 고객의 의뢰를 받고 사진을 찍는 것에 조금 무료해졌었다”며 “한 사람의 인생을 다 듣고 사진을 찍다 보니 처음으로 글 한 줄 없이 사진으로 모든 걸 설명하는 만족스러운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배완 씨는 “오글거리게 들릴 수도 있지만, 사람들을 사랑하게 됐다. 이해하기 힘들었던 행동도 저마다의 이유가 있겠구나 싶다”고 말했다.
박혜리 기자 ssssch333@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