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기 든 판사 재산 관계까지 들여다 봐…형사 고발 여부는 의견 ‘분분’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임종헌 전 차장 등 전 법원행정처 소속 판사들에 대한 검찰 수사 의뢰(혹은 고발)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데, 법원 한편에서는 “삼권분립의 한 축인 사법부가 검찰 수사를 받는 선례를 남기면 안 된다”는 반발도 적지 않다. 사법부가 존립한 이래 한 차례도 검찰 수사를 받은 적이 없기 때문. 1년 넘게 진행된 블랙리스트의 그림자가 법원 내 깊게 드리워져, 걷히지 않고 있다. 김명수 대법원장은 검찰 고발 여부를 ‘고민해보겠다’는 신중한 입장인데, 김 원장의 불분명한 태도에 법원 내부 의견도 분분해지고 있다.
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퇴임식에 참석하고 있다. 이날 퇴임식에서 양승태 대법원장은 “정치세력의 부당한 영향력으로부터 사법부 독립을 지켜내야 할 것”이라고 발언했다.
# 드러난 법원 민낯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였어요. 일선 판사들은 충격이 상당합니다.” (서울고등법원 A 판사)
184페이지에 달하는 사법행정권 남용의혹 관련 특별조사단(조사단) 조사 결과를 본 일선 판사의 반응이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는 “개별 재판부 판단에 개입하지 않는다”고 공언해 왔지만, 이를 의심할 만한 내용들이 포함돼 있었다. 양승태 원장 시절 법원행정처를 실질적으로 이끈 것은 임종헌 전 차장. 그는 법원의 핵심 정책이었던 ‘상고법원 추진’에 반대하는 법원 내 목소리(판사)에 민감하게 반응했고, 적극적으로 대응책을 강구한 것으로 드러났다.
조사 결과에 따르면, 임종헌 전 차장은 상고법원 도입에 반대한다는 내용의 글을 코트넷에 올린 적이 있는 차 아무개 판사가 겸직 허가 신청을 받지 않고 언론에 글을 기고한다는 보고를 받자, 기고 내용의 법관 윤리 위반 여부 등을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또 “차 판사가 경제적으로 어려워서 판사를 오래하지 못할 것 같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당시 윤리감사관을 시켜 차 판사의 재산 관계를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임 전 차장 스스로가 “차 판사 외에는 재산관계를 검토해보라고 한 적이 없다”고 할 정도로 이례적인 지시였는데, 조사단은 임 전 차장의 지시에 대해 “특정 판사의 뒷조사다. 사법행정권의 남용”이라고 조사 보고서에 적시했다.
판사들은 당시 상고법원 도입을 추진하던 대법원·법원행정처와 주변 환경을 고려해야 봐야 한다고 설명한다. 당시 행정처에 있던 한 판사는 “상고법원을 추진하는 데 있어, 청와대(박근혜 당시 대통령)도 지지 의사를 밝히지 않았고, 정치권도 당시 여당(지금 자유한국당) 내에서조차 상고법원 도입 찬반이 엇갈렸다”며 “외부의 시선이 곱지 않다보니 법원 내부 반대 목소리가 조금이라도 언론을 통해 확대될 경우를 더 많이 우려했고, 자연스레 내부 판사들의 상고법원 반대 의견이 밖으로 드러나는 것을 막기 위한 단속을 심하게 했던 것은 사실”이라고 털어놨다.
문제는 보고 없이 외부 언론에 기고하는 것을 징계해본 적이 없을 정도로 법원이 판사 개개인과 재판부의 독립을 보장해주는 성격이 강한 조직이었다는 점이다. 한 고등부장판사는 “상하 관계가 분명한 일반 회사에서는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법원은 재판부 독립이 강하게 지켜지다보니 웬만해서는 판사 성향이나 정치적 견해 표명을 놓고 징계를 한 적이 없다”며 “이번에 드러난 것에 판사들이 이렇게 강경하게 반응하는 것 자체가 ‘그만큼 판사 개개인이 느끼는 재판 독립성이 중요하다’고 봐도 된다”고 덧붙였다.
# 청와대 눈치 보기 급급
하지만 양승태 전 대법원장 등 당시 법원 수뇌부가 상고법원에 지나치게 집착했다는 것은, 모두가 인정하는 실수다. 박근혜 전 대통령 당시 청와대의 지지를 받지 않고는 상고법원 도입이 불가능에 가까웠고, 자연스레 이를 주도했던 법원행정처는 청와대가 주목하는 주요 정치·사회 판결 결과를 놓고 내부적인 검토를 적극적으로 했다.
판결에 앞서 해당 재판부에 친한 판사들을 통해 판결 흐름을 미리 확인해 보려 했고, 심한 경우 이를 문서로 정리했다. 특히 통상임금 판결이나, 원세훈 전 국정원장 댓글 사건에 대해 ‘각계 동향 파악’이라는 제목으로 선고 결과에 대한 외부 기관 반응을 정리했는데, 이 과정에서 “(청와대) 민정라인을 통하여 판결의 취지가 잘 보고, 전달됐음”과 같은 표현들이 적시될 만큼 청와대·국회와 긴밀하게 소통했다. 단순히 검토에 그치지 않고, 청와대와 소통하며 이를 정치적으로 흥정했다는 의혹이 나오는 이유다.
일각에서는 이를 놓고 “법원행정처가 사건 처리 방향을 지시한 것이 아니냐”라는 ‘재판 거래’ 의혹이 제기되고 있지만, 조사단은 해당 재판부 판사 등의 조사를 통해 “실제 개입은 없었다”고 설명했다. 당시 대법원 관계자들은 “상고법원은 고위직 판사 인사 적체와 평생 판사제 도입을 추진했던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최우선 추진 과제이다보니 발생한 사고”라고 입을 모아 진단한다. 앞선 판사는 “결국 상고법원 도입을 위해 독립된 사법부가 입법부(국회)와 행정부(청와대) 분위기를 먼저 살피다보니, 주요 사건들이 정치적인 영향을 받는 모양새가 된 것은 사실”이라며 “결과를 놓고 해명을 하거나 유리하게 포장을 한 정도인데, 상고법원만 아니었어도 이렇게 무리해서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 서서히 조사 확대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치부를 과감히 드러낸 김명수 대법원장. 벌써 3차례나 TF를 꾸렸지만, 사건의 흐름은 조금씩 달랐다. 처음에는 ‘블랙리스트 판사 리스트 존재 및 인사 불이익 의혹’에서 시작해, 법원행정처의 사법권 남용으로 수사를 확대했다. 그리고 사건이 확대될수록,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문제들이 더 드러나고 있다.
김명수 대법원장. 고성준 기자
조사 기간이 석 달 가까이 걸린 것은 첫 TF 때와 달리, 범위는 방대해졌기 때문이다. 법관 인사 개입 여부뿐 아니라, 법관에 대한 성향 및 동향 파악, 청와대 동향 파악 및 재판 독립 침해, 훼손 의혹으로 확대해 조사를 벌였다. 그리고 “사법 행정권이 남용된 것은 명백한 사실이지만, 검찰 등 형사 처벌할 정도는 아니고 특정 판사에 대한 뒷조사는 있었지만 인사 불이익은 없었다”는, 다소 모호한 결론을 내놨다.
법원 내부는 여전히 뒤숭숭하다. 특히 형사 처벌 여부를 놓고는, 판사들의 의견이 모두 조금씩 다르다. 지방에 근무 중인 한 부장판사는 “다소 문제가 있을 수 있지만 법적으로 문제가 될 행동을 한 적은 없다고 들었다”며 “실제 세 번의 조사에서 모두 ‘위법 소지는 없었다’고 결론이 나왔는데 왜 이렇게 계속 사건을 확대하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행정처에 근무한 적이 있는 판사와 없는 판사, 또 정치 성향 등에 따라 이번 사안에 대한 생각이 판이하게 달라서 판사들끼리도 서로 의견을 나누는 것을 피하고 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 사과는 빠르게, 수사 선택은 신중히
김명수 대법원장은 조사 결과 발표 6일 만에, 대국민 사과 입장을 밝혔다. 김명수 대법원장이 지난달 31일,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의 사법행정권 남용 및 ‘재판 거래’ 의혹과 관련해 사법부 수장으로서의 사과와 재발 방지 대책을 담은 대국민 담화문을 발표했다. 2000자 분량 담화문에서 그는 “사법행정권 남용이 자행된 시기에 법원에 몸담은 한 명의 법관으로서 참회하고 사법부를 대표해 진심으로 사과의 말씀을 올린다”고 밝혔다.
전국철도노조 KTX열차승무지부 조합원들이 5월 30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대법원장 비서실장과의 면담을 언론에 공개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박정훈 기자
내부는 더 뒤숭숭해지고 있다. 서울고법 관계자는 “여전히 의혹이 있음에도 덮는다면 내부 갈등만 더 조장할 것”이라며 “지금 상태에서는 검찰 등 외부의 칼을 빌어서라도 확실하게 확인을 해야 한다”고 수사를 촉구했다. 조사 결과 청와대와 의견을 주고 받은 사실이 드러난 KTX 승무원 관련 재판의 경우, 사건 당사자들이 대법원을 찾아와 강하게 반발하기도 했다.
시민단체 등의 고발로 이미 사건을 서울중앙지검 공공형사수사부(부장검사 김성훈)에 배당해 놓은 검찰은 난감해 하면서도, 법원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다. 검찰 관계자는 “판사 개개인의 비리는 수사를 한 적이 있어도, 법원 내 의사 결정 과정에 대해 대법원장을 수사한 적은 한 번도 없다”며 “법원은 우리의 수사에 대해 채점을 해주는 조직 아니냐. 잘못 건드렸다가는 우리가 피해를 볼 수도 있기 때문에 대법원 차원의 결정이 없으면 먼저 착수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침묵하고 있던 양승태 전 대법원장 역시 검찰 수사 가능성이 거론되자, 1일 오후 성남시 자택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대법원 재판이나 하급심 재판에 부당하게 간섭, 관여한 바가 결단코 없다”며 “하물며 재판을 무슨 흥정거리로 삼아서 왜곡하고 거래를 한 일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이는 심한 모욕”이라고 해명했다. 그는 “법원이라는 조직은 우리 사회에서 가장 건전한 조직이라고 확신한다”며 “마음에 고통을 받은 사람이 있으면 사과드린다”고 밝혔다.
또 “이번 조사에서는 반대하는 견해가 있었고 그런 과정에서 법원행정처에서 부적절한 행위를 한 것이 지적됐다. 그것은 잘못된 것”이라며 “그러나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런 정책에 반대를 한 사람이나, 일반적인 재판에서 특정 성향을 나타낸 사람에 대해 어떤 편향된 조치를 하거나 불이익을 준 적이 없다”고 말했다.
아직까진 실제 검찰 수사로 이어질 가능성은 상대적으로 낮다는 게 법조계 중론이다. 대법원 관계자는 “다소 행정권이 남용되는 등 잘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검찰에 전 대법원장이 수사를 받는 전례를 남기는 것 자체가 불명예”라며 “잘못된 선례를 남기면 앞으로 대법원장들이 계속 검찰 수사를 받을 수 있다. 다소 의혹이 남는다고 하더라도 이제 갈등을 봉합할 때가 됐다”고 의견을 피력했다. 실제 대법관들 사이에서도, 이번 사안을 놓고 “수사가 필요하다”는 측과 “검찰 수사는 안 된다”는 입장이 첨예하게 나뉘는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고등법원의 한 부장판사는 “김 원장이 들어와서 많이 자기 사람을 앉혔지만 법원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보수적인 조직”이라며 “실제 검찰 수사까지 결정할 경우 법원은 더 심한 내홍에 휩싸일 수 있다”고 우려했다.
서환한 기자 brigh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