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비리 의혹부터 밀수·탈세 혐의까지 조사 ‘총수 일가’ 정조준
회의 도중 화가 난다며 던진 조현민 대한항공 전 전무의 물컵에서 시작된 대한항공 오너 일가에 대한 사정당국 수사 기세가 남다르다. 경찰을 지휘하는 검찰만 직접 나서지 않았을 뿐이지, 그 외 경찰, 관세청, 국세청, 공정거래위원회, 국토해양부 등 사실상 모든 정부기관이 달려들었다. 사안도 제각각이다. 경찰은 조현민 전 전무의 물컵 세례를 시작으로, 대한항공의 경영 비리로 수사를 확대하고 있고, 관세청은 조양호 대한항공 회장과 부인 이명희 씨, 조현아, 조원태, 조현민 3남매 등 오너 일가가 대한항공 항공기를 이용해 밀수·탈세를 한 혐의를 포착하고 수사 중이다. 또 국세청은 지난해 말 잠정 중단했던 대한항공과 칼호텔네트워크에 대한 세무조사를 재개하는 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사정당국들의 이 같은 수사 의지는 ‘청와대 사인’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게 중론이다. 대한항공 수사에 참여하고 있는 사정당국 관계자는 “물컵 세례가 불거지고 대한항공 직원들의 제보가 언론에 줄잇고 있을 때 청와대에서 ‘사안을 엄중하게 보고 있다. 철저하게 수사를 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며 “지금 사정당국들이 일제히 대한항공 이슈에 달려붙은 것은 이 같은 청와대 사인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귀띔했다. 심지어 그는 “국민들이 국적기 자격을 박탈해야 한다고 요구하는 것에 대한 공감대가 청와대에서 힘을 받고 있다는 얘기도 들었다”며 “조양호 회장 오너 일가가 퇴진하는 게 가장 빠른 해결책이지 않을까 싶다”고 의견을 내놨다.
물컵 갑질 논란을 빚은 조현민 전 대한항공 전무가 1일 오전 서울 신월동 강서경찰서에 폭행과 업무방해 혐의를 받는 피의자 신분으로 출석하며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최준필 기자
대한항공 오너 일가를 궁지로 몰아넣은 조현민 대한항공 전 전무의 물컵 세례 사건부터 짚어보자. 사안의 시작이었던 만큼, 수사도 반환점을 돌았다. 사건을 수사 중인 강서경찰서는 지난 1일 조현민 전 전무를 폭행과 업부방해 혐의의 피의자 신분으로 소환해, 15시간 동안 조사를 벌였다.
경찰은 문제가 된 물컵 세례 과정을 어느 정도 확인했다. 조 전 전무를 소환하기 전 피해자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조 전 전무가 얼굴에 직접 음료를 뿌렸고, 유리병도 던졌다”는 진술을 받았다. 컵이 아닌 단순 음료를 신체에 던진 것만으로도 폭행이 성립하지만 유리로 된 병은 죄명이 달라진다. 흉기로 간주되기 때문. 혐의가 특수폭행으로 무거워진다.
이에 대해 조 전 전무는 경찰에서 “본인의 의견을 무시한다고 생각돼 화가 나 유리컵을 사람이 없는 45도 우측 뒤 벽쪽으로 던졌다“고 해명했다. 음료가 담긴 종이컵 역시 사람을 향해 뿌린 게 아니라, 출입구 방향으로 밀쳤는데 회의 참석자들에게 튀었다는 게 조 전 전무가 경찰에서 내놓은 해명이다.
수사팀은 언론에 ”구속영장 신청 등 신병처리 여부를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지만, 다수 경찰 관계자들은 “영장 신청을 하더라도 발부 가능성이 애매하다”고 설명한다. 수사 흐름을 아는 경찰 관계자는 “유리병을 던졌다는 진술도 있지만, 다른 피해자는 이 부분에 대해서 진술이 엇갈린다”며 “특수폭행을 인정한다고 해도 ‘고의가 아니었다’는 조 전 전무의 해명과 초범인 점 등을 감안할 때 구속영장 신청까지는 어렵다고 본다”고 의견을 개진했다.
영장을 담당했던 법원 판사 역시 “도주의 우려가 없는 점, 초범인 점, 피해자 진술 등을 이미 수사기관이 다 확보한 점 등은 구속영장을 발부하기 애매한 요소들”이라면서도 “결국 관건은 조현민 전 전무를 보호하기 위해 대한항공이 얼마나 적극적으로 피해자들을 상대로 증거 인멸을 시도했는지, 또 시도할 가능성이 있는지를 경찰이 입증하는지 여부”라고 내다봤다.
조현민 전 전무 물컵 세례 수사는 끝을 향해 가고 있지만, 진짜 수사는 이제 시작이다. 경찰과 관세청은 최근 조양호 대한항공 회장을 비롯한 한진그룹 총수 일가가 관세나 운송료를 내지 않고 해외에서 고가의 가구 등 명품을 사들였다는 직원들의 제보를 중심으로 수사에 착수했다. 특히 관세청은 지난 21일 인천공항 2터미널에 있는 대한항공 사무실과 조현민 전 전무 3남매의 자택 등 4곳을 조사했는데 이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관세청이 재벌총수 일가를 압수수색한 것은 처음이다. 관세청 등은 조양호 회장 일가의 개인 신용카드 사용 내역을 확인해, 해외에서 구입한 물품을 제대로 세금을 냈는지 일일이 확인하고 있다.
경찰 역시 ‘특수수사’ 전문 부서가 나섰다. 경찰청 특수수사과는 인천공항이 위험물터미널 임대료 관련 비리 정황을 포착하고 지난 4월 30일 인천공항을 압수수색했다. 단순 오너 일가 비리가 아닌, 기업 비리로 수사가 확대되는 셈이다.
법조계 일각에서는 ‘땅콩회항’ 때처럼 조현아 대한항공 전 부사장만 처벌받는 게 아니라, 조양호 대한항공 회장 등 일가 전체가 처벌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특히 일각에선 “조양호 회장의 소환이 불가피하다”는 전망까지 나오고 있다.
관세청 수사 흐름에 밝은 법조계 관계자는 “지금까지 확인된 조양호 회장 일가가 해외에서 신고 없이 들여온 명품들의 규모가 엄청나다고 들었다”며 수천만 원에서 수억 원을 넘는 규모라고 들었다, ‘해당 금액들을 놓고 향후 검찰에서 영장을 청구하더라도 이상하지 않다는 얘기가 공공연히 나온다“고 귀띔했다.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이 지난해 9월 19일 자택을 회사 자금으로 수리, 개축했다는 혐의로 소환돼 청사 안으로 들어서고 있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조양호 회장 퇴진 가능성도 거론된다. 앞선 사정당국 관계자는 “조양호 회장이 퇴진해야 하는 사안으로 청와대가 보고 있다”고 설명했는데, 앞선 법조계 관계자 역시 “조양호 회장이 대한항공에 가지고 있는 지분은 얼마 안 되지 않냐”며 “자녀들은 물론, 조양호 회장까지 자리에서 물러나는 게 사안을 제일 빠르게 마무리하는 방법”이라고 첨언했다.
실제 조 회장 일가 가운데 대한항공 주식을 보유한 이는 조 회장 본인 한 명뿐이다. 그마저도 지분이 0.01%에 불과하다. 대신 조 회장 일가는 ‘한진칼’의 지분을 25% 가까이 갖고 있고, 다시 ‘한진칼’은 대한항공의 지분을 29.9% 보유하는 방식으로 대한항공을 지배하고 있다. 이에 대해 ‘사기업이라 볼 수 없다, 조 회장을 퇴진시켜도 무방하다’는 주장이 나오는 것.
생각보다 어렵지 않을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대한항공 관계자는 “지금 대한항공 이사회는 조양호 회장을 중심으로, 제대로 된 역할을 하지 못하는 구조였다”며 “이사회 멤버만 제대로 구성한다면 지분이 없는 것에 가까운 조 회장과 그 일가를 배제한 경영이 가능할 것”이라고 조심스레 귀띔했다.
서환한 기자 brigh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