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한 계좌 통해 계열사 돈이 자식들 회사로…일진 측 “정상적 거래, 모두 사실무근”
‘일요신문’이 단독입수한 허진규 일진그룹 회장 고발장
일진그룹 계열사인 일진파트너스(전 일진캐피탈)는 2007년 경기도 파주시의 한 아울렛 개발사업 관련 시행사인 A 업체와 공동사업약정을 체결했다. 일진파트너스 허정석 대표는 허 회장의 장남이다. 당시 A 업체는 아울렛 사업을 시행할 재정능력이 없었던 터라 사실상 일진파트너스가 사업 주체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A 업체와 계약을 체결한 분양권자들은 수차례 건설공사 중단 끝에 이미 납입한 계약금과 중도금 등을 돌려받지도 못한 채 소유권이 모두 일진 측에 넘어갔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당초 분양권자들은 A 업체를 분양사기로 고발했다. 하지만 이들은 소송과정에서 A 업체 배후에 일진이 자리하고 있다는 의심을 가지게 된다. 이 소송으로 A 업체 대표는 실형을 살게 됐고, 일진은 분양권자들을 상대로 구상금 청구 소송을 하게 된다. 이에 분양권자들은 소유권은커녕 빚더미에 앉게 된다. 분양권자들은 일진 측이 A 업체와 공동사업을 진행했던 만큼 구상금 청구는 부당하다고 입을 모았지만 판결엔 반영되지 못했다.
일진 측은 당시 상황에 대해 “일진파트너스는 A 업체와 공동사업 시행사가 아닌 투자사일 뿐이었으며, 일진 역시 A 업체에게 분양 투자사기를 당했다. 일진 측 손해가 컸던 것으로 알고 있다”고 답변했다. 이어 “구상금 청구 관련은 너무 오래된 사안이지만 법에 따라 적절하게 진행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사실상 분양 투자사기의 일반적인 사례로 덮일 뻔했던 이 사건은 소송과정에서 등장한 통장 하나로 새 국면을 맞고 있다. 그동안 제기돼 왔던 일진그룹의 각종 불-편법 의혹에 대한 뇌관으로 작용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게 됐다.
고발장에 따르면 허진규 회장은 일진그룹의 계열사인 일진전기, 일진경금속 등으로부터 그 용도가 불분명한 80억 원을 모금한 후 차명계좌(고발인은 도용계좌라고 주장)를 통해 허 회장의 자녀 등 총수일가 회사로 자금을 흘려 보냈다. 이 차명계좌는 A 업체 계좌로 일진 측이 A 업체 대표, 분양권자들과의 소송에서 제시한 투자입금 계좌다.
일진 측은 A 업체와 공동으로 관리한 계좌라고 주장했지만 A 업체 대표는 소송 당시 법정진술에서 이 계좌에 대해 자신은 전혀 몰랐으며, 재판에서 일진의 주장으로 알게 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80억 원 등의 자금에 대해선 일진 측과 개발사업 관련 투자비에 대한 변제각서를 쓴 사실은 있지만 일진 3사와 아트테크로부터 이자와 차입금 명목일 뿐 자신의 회사 계좌거래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고 법정에서 증언했다.
특히, 80억 원 중 46억여 원은 앞서 언급된 것처럼 허 회장의 장남인 허정석 대표의 일진파트너스, 장녀 허승은과 차녀 허세경의 아트테크(주)로 수차례 이체됐다. 하지만 46억 원 등 80억 원은 A 업체의 아울렛 개발사업과 전혀 무관한 것으로 과거 소송과정에서도 일진 측은 출처에 대해 소명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고발인들은 허진규 회장이 계열사의 돈을 횡령해 차명계좌 등 불법적인 방법으로 자녀들에게 증여한 것으로 강조했다. 실제로 고발장과 함께 단독입수된 일진그룹 B 전 부회장의 XX은행 계좌 금융거래 내역서에는 2009년 1월 22일 일진전기(주) 40억 원, 다음날 일진경금속(주) 5억 원, 같은달 30일 아이텍인베스트 25억 원이 이체 입금된 것으로 확인됐다.
이후 이 자금은 문제의 A 업체 계좌(B 전 부회장과 같은 은행)로 같은날 39억 8000만 원을 이체 입금시킨 후 이 중 26억 7000여 만 원을 아트테크 계좌로, 12억 3500여 만 원을 일진캐피탈(현 일진파트너스)의 계좌로 각각 이체 입금됐다. 2월 27일까지 수차례에 걸쳐 이 같은 방법으로 46억여 원이 오갔다.
‘일요신문’이 단독입수한 일진 비자금 조성 의혹 계좌.
이에 대해 일진 측은 분양권자들과의 구상금 청구소송에서 계열사들이 투자조합을 결성해 80억 원을 모금한 후 A 업체의 계좌로 이체 대여한 것이라고 반박했다.
하지만 A 업체는 소송 당시 일진파트너스와 공동으로 개설한 계좌가 있는 데도 아울렛 사업비용을 자신도 모르는 계좌를 통해 입금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일진그룹 관계자는 “관련 소송건은 2015년 10월 27일 검찰이 불기소처분을 내렸으며, 2016년 5월 24일 서울고등법원도 재정신청을 기각했다. 무슨 근거로 문제를 삼는지 이해가 안 된다”고 말했다. 비자금 조성 의혹에 대해선 “정상적인 거래 외에는 어떠한 위법이나 불법도 저지르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차명계좌 등 통장개설에 대해선 오래전 일로 담당자가 바뀌었고, 잘 모르는 일이라며 일진그룹과 허 회장이 그런 말도 안되는 수법을 쓸 이유가 없다고 주장했다.
한편, 일진그룹 측이 A 업체 계좌를 만들기 위해 폭언과 협박을 일삼은 것으로 드러나 ‘갑질’ 논란도 불거질 전망이다. A 업체 대표가 일진과의 소송전에서 법정 진술한 내용에 따르면, 80억 원 등 비자금 조성 의혹이 있던 2009년 1월에 앞선 2008년 10월경 일진 측이 돈을 정산한다며 A 업체 통장과 도장을 빼앗아 간 것으로 ‘갑질’ 협박이 시작됐다.
법정진술서에 따르면 2008년 11월경 허진규 회장은 A 업체 대표에게 차를 마시자고 불러내 “너 즉시 통장하고 법인 인감 갖고 와”라며, 도장과 통장을 빼앗고 보관증을 써준 뒤 그 보관증마저 빼앗아 갔다고 적시돼 있다. 특히, 일진그룹 측 6명이 A 업체 대표의 무릎을 꿇려놓고 “모가지를 작두로 자른다”며 정산서를 가지고 와 사인을 요구하는 등 4~5시간을 협박하는가 하면, 법인도장을 가져다가 일방적으로 정산하기도 했다. 허진규 회장이 A 업체 계좌를 도용하기 위해 갑질 횡포를 부렸으며 그 계좌는 횡령과 편법승계에 사용됐을 것이란 의심이 드는 대목이다.
일진파트너스는 일진그룹 승계 과정에서 편법 논란의 중심에 있어 왔다. 도 넘는 일감몰아주기는 2010년부터 본격화되면서 2005년 감사보고서상 자본총계 253억 4084만 원에서 2015년 자본총계 692억 4846만 원까지 불어났다. 매출도 2009년 8억 원 수준에서 단 1년 만에 4배가 넘기도 했다.
금감원 전자공시사이트(DART)에 게시된 2016년 12월 기준 감사보고서에 따르면 일진파트너스는 지주사인 일진홀딩스 지분 24.64%를 보유한 최대주주다. 일진홀딩스는 장남 허정석 대표가 대표직을 맡고 있다. 허 대표가 보유한 일진홀딩스 지분 29.1%에 일진파트너스가 보유한 일진홀딩스 지분 24.64%를 합하면 허 대표의 일진홀딩스 지분은 53.74%로 과반을 넘어 사실상 일진그룹을 지배하고 있는 셈이다.
허진규 회장의 비자금 조성 의혹을 넘어 갑질 횡포와 불법도용으로 개설된 수상한 계좌가 편법승계에 사용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된 만큼 향후 검찰 수사에 비상한 관심이 쏠리고 있다.
서동철 기자 ilyo1003@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