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희롱-갑질’ 의혹 넘어 국악원-문체부 ‘졸속 조사’ 논란으로 확전
지난 11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위계에 의한 갑질 및 인권탄압 사태 진상규명 촉구 집회’. 최준필 기자
[일요신문] 지난 11일 무더위가 한창인 광화문 광장에서 검은색 옷을 입은 한 무리가 눈에 띄었다. 이들은 국립국악원 무용단원들로 ‘국립국악원무용단 갑질, 인권탄압 사태 진상규명 비상대책위원회(이하 비대위)’라는 이름으로 ‘위계에 의한 갑질 및 인권탄압 사태 진상규명 촉구 집회’를 열기 위해 모였다.
#막말에 공연배제까지
비대위는 국악원 무용단 내 일부 상급 지위자들을 규탄했다. 비대위는 이 자리에서 “단원들에게 지속적인 갑질 행태와 인격모독을 일삼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우리 사회의 고질적 병폐인 갑질 행태가 국악원 무용단에서도 자행되고 있다”며 “전통무용 발전에 기여하려는 단원들의 공동 노력이 훼손되고 사기와 의욕이 저하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철저한 진상조사와 책임자 처벌을 내세우고 인격모독 등을 일삼은 국악원 무용단 감독의 채용을 반대했다. 아울러 무용단내 만연한 병폐를 근절하고 재발방지를 촉구했다.
집회 현장에서 열린 국립국악원 무용단원들의 퍼포먼스
이에 앞서 지난 8일부터 국악원 입구에서는 무용단 갑질 등에 대한 1인 시위가 시작됐다. 점심시간을 이용해서는 국악원 마당에서 성명서 발표도 진행됐다.
비대위는 이전까지 감독대행 직을 2년 가까이 맡아 온 A 씨의 정식감독 채용 반대 입장을 강조했다. 국악원 무용단 내 인격모독 등 병폐의 주인공이 A 씨라는 지적이다.
단원들은 A 씨를 포함해 고위급 인사들로부터 받은 피해 사례도 일부 공개했다. 수치심을 유발하는 언어적 폭력 외에도 일부 단원은 알 수 없는 이유로 6개월 이상 공연 출연진에서 배제되기도 했다.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다. 단원들이 집회를 열자, 온라인상에서 이들의 외모를 비하하는 등의 악성 댓글에 더 큰 상처를 받기도 했다.
무용단은 지난 2년간 감독채용 절차에서 적격자가 없다는 이유로 감독대행 체제를 유지해왔다. 대행을 맡은 A 씨는 채용절차 당시 실적 미달로 심사에서 탈락한 바 있다. 하지만 그는 현재 정식 감독직 부임이 유력한 것으로 알려졌다. 심지어 국립국악원장은 그가 정식 감독이라는 가정 하에 단원들과 면담을 진행한 것으로 전해졌다.
#거리로 나설 수밖에 없었던 이유
비대위가 처음부터 연습실이나 무대가 아닌 거리로 나섰던 것은 아니다. 이들은 각종 갑질 등에 대해 지난 5월 무용단 자치기구인 ‘단원 노동복지협의회’를 통해 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했다. 단원들의 피해 사례 등을 조사했고 의견을 종합해 국악원장과 기획관리과에 제출했다.
하지만 이들의 기대와는 달리 국악원 내에서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오히려 문제를 지적받은 A 씨 등의 추궁만 단원들에게 돌아갔을 뿐이다.
이후 5월 말에는 국악원 내 기획관리과에서 단원 개별면담을 실시했다. 이틀간 4명이 면담을 받으면서 단원들은 진상조사나 사실확인이 아닌 “누군가의 강요 없이 본인 생각으로 행동에 참여한 것이 확실한가”와 같은 회유와 취조성 질문만 받아 항의하는 소동이 있기도 했다. 결국 면담은 기획관리과 자체 판단으로 중단됐다.
일주일이 지나지 않아 기획관리과에서는 개별조사의 어려움을 이유로 단원들에게 설문지 작성을 요구했다. 단원들은 당시 설문지 내용이 납득하기 어려웠다고 주장했다. 앞서 단원들의 호소문과 관련해 ‘작성 과정에서 타인에게 주장의 내용을 강요하거나 강요받은 사실이 있나’라는 질문이 담겼다. 단원들의 문제제기에 대해 주동자를 색출하려는 듯한 모습이었다. 결국 단원들은 설문지 작성을 거부해 조사가 중단됐다.
국악원 측과 무용단원 간의 갈등이 점점 심화된 7월 중순 국악원장과 무용단원 전체의 면담이 성사됐다. 하지만 진상 조사를 위한 조사단 구성부터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해 서로의 입장차만 확인한 채 성과 없이 마무리됐다. 그리고 국악원 측에선 “더 이상 협상은 없다”는 강경 입장으로 선회했다.
결국 단원들로선 집회를 열어 자신들의 억울함과 국악원의 실태를 알리기로 결심했다. 광화문 집회 등으로 세간의 관심이 쏠리자 문화체육관광부가 부랴부랴 나섰다. 문체부는 지난 14일부터 소속기관인 국립국악원에 대한 조사를 실시했다. 이에 국악원 관계자는 ‘일요신문’과의 전화통화에서 “이번 사태에 대해 아직까지 어떤 입장을 내놓기가 조심스럽다”면서 “문체부 감사담당관이 나와서 조사를 진행중이다. 조사가 마무리되면 입장을 밝히겠다”고 말했다.
단원들이 무용단 감독 부임을 반대하며 갑질 의혹 대상자로 지목한 A 씨는 “오랫동안 국악원에서 근무해 온 단원들 간의 감정상 문제”라면서 “갑질이나 인격모독 등을 주장하는데 모욕감을 주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다. 군무를 맞추는 과정에서 더 좋은 무대를 만들려다가 일어난 일”이라고 설명했다. 일부 단원의 공연 배제 주장과 관련해선 “단원들의 공연 출연 횟수를 맞춰주려 노력했다. 기록도 가지고 있다. 다만 기량에 따라 차이는 존재할 수 있다. 이 부분을 섭섭해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또한 단원들의 성명 발표, 집회 등에 대해서는 “국립국악원의 문화를 더 좋은 쪽으로 발전시키자는 의견에는 동의한다”면서 “처음부터 당사자들에게 먼저 고충을 털어 놓고 그래도 변화되는 부분이 없을 경우 외부에 목소리를 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든다”고 말했다.
지난 14일 문체부가 단원들에게 건넨 조서.
문체부의 조사가 시작됐지만 사태 해결 가능성은 여전히 미지수다. 비대위는 앞서 지난 6월에도 문체부 측에 사정을 알린 바 있다. 하지만 문체부 측에서는 “국악원 사태를 알고 있지만 공무원 신분이 아니기에 문체부 소관이 아니다. 국악원 내에서 해결할 일”이라는 답변만 돌아왔다. 단원들은 “시간이 흘러 단원들이 거리로 나서고 이 같은 내용이 언론에 보도되자 문체부에서 먼저 접촉해 왔다”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문체부 조사가 시작된다는 소식에도 단원들의 의심은 여전하다. 실제로 한 단원은 “감사담당관이라는 사람 한 명이 와서 다음날 제출하라는 말과 함께 ‘조서’라는 종이를 한 장씩 나눠준 것이 전부”라면서 “무성의한 태도로 진행되는 조사에 응할 수 없다”고 밝혔다. 문체부 측에서 나눠준 ‘확인 조서’도 공개했다. 그러면서 “우리는 갑질, 인권모독 등 민감한 부분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성희롱이 될 수 있는 문제다. 좀 더 세심하고 정교한 조사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문체부 조사가 시작된 지 단 하루 만에 단원들은 ‘조사 거부’를 결정했다. 단원들 사이에선 문체부의 행태를 두고 늑장 대응도 모자라 졸속조사라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이번 사태와 관련해 이동민 문화민주주의실천연대 공동위원장은 “전통 무용계에서 이처럼 단원들이 문제를 제기한 사례는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라면서 “그동안 내부 문제가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이번 사안은 국악원 단원들의 근무 여건과 갑질 및 인격모독 관련 사항 등 두 가지 측면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이 위원장은 문체부의 태도에 대해서도 목소리를 냈다. 그는 “문체부가 그동안 사태를 축소하려는 모습을 보인 것으로 알고 있다”면서 “그동안의 방식으로 이번 일을 조사할 것이 아니라 인권 전문가, 법률 자문위원 등 외부 전문 인력과 함께 면밀한 조사가 필요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김상래 기자 scourge@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