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청·하청·고객 갑질 토로할 데 없어
대기업 로고가 박힌 근무복을 입고 아침 7시가 되기도 전에 출근한다. 출근 체크를 하고 에어컨, 세탁기를 이고 지고 좁은 골목을 지나 언덕 위 빌라로 배송하고 설치한다. 고객은 대기업의 우수한 서비스에 대한 눈높이가 높아 소비자 만족에 더욱 신경을 쓸 수밖에 없다. 주중 1회 이상 본사의 교육을 받고 대기업 근무복을 입고 일하는 설치기사는 기본급 0원인 개인사업자이자 사장이다.
삼성전자와 LG전자의 가전기기를 배송 및 설치하는 기사들이 하청에 하청을 거듭하는 사업구조 아래서 신음하고 있다. 연합뉴스
LG, 삼성 등에서 가전제품을 주문하면 배달과 설치를 맡은 기사가 가정을 방문한다. 가전기기는 100~300kg까지 무게가 나가는 것도 있지만 아파트뿐만 아니라 좁은 골목, 오르막에 위치한 집까지 배송이 안 되는 지역이 없다. 그런데 주문이 쇄도하는 성수기에 신바람이 날 설치기사들이 눈물로 호소하는 아이러니가 벌어지고 있다. 하청에 하청을 거듭하는 사업구조가 그 결정적인 원인이다.
삼성전자와 LG전자 제품을 배달하는 기사들은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개인사업자’다. 소비자와 최전선에서 마주하는 설치기사들은 정작 아무런 보호를 받지 못하는 개인사업자 지위로 신음하고 있다. 가전기기 설치는 주기사와 보조기사가 한 조가 되어 일한다. 주기사는 화물차를 소유한 차주로 개인사업자고, 부기사는 주기사에게 고용된다. 기사는 대기업의 협력업체와 계약을 통해 화물을 받고 이를 가정마다 배송하고 있다. 구체적으로는 ‘대기업-대기업 자회사(중간회사)-하청-기사’의 구조다.
설치기사들은 1년 중 성수기에 바짝 버는 돈으로 한 해를 나고 있다. 가전기기 배송물량이 넘쳐나는 것은 극성수기인 6~8월, 가전기기 사전예약 기간인 2~4월이다. 극성수기에 배송물량을 많이 받는 주기사의 경우 한 달에 800만~900만 원을 벌 수 있다. 하지만 보조기사에 주는 월급(200만~300만 원), 차량 구입 리스비(70만~100만 원), 보험료 등을 제하면 성수기에도 월 400만 원도 채 거머쥐기 어렵다. 소비자의 기기 사전예약 구매가 많은 2~4월 물량을 받는 것은 운이 좋아야 가능하다. 기사가 연간 올릴 수 있는 수익을 최대한으로 잡아도 3000만 원이 되지 않는다. 제품을 배달하다 하자가 발견되거나 손상이 가면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이를 구입하는 것도 기사의 몫이다.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는 기사들이 점차 목소리를 내고 있다. 최저임금이 인상돼 보조기사에게 줘야 될 급여가 늘어난 데다 업무강도가 높아 보조기사를 구하는 것조차 어렵다. 통상 200만 원 수준의 월 급여를 주면 구할 수 있던 보조기사가 이제 그 임금으로는 구할 수 없게 됐다. 20년 동안 설치기사로 인한 A 씨는 “중급 기사를 200만 원에 쓸 수 있었다면, 이제 심부름하는 사람도 그 돈으로 구할 수 없다”며 “실근무 시간이 12시간 가까이 되는데 이에 대한 모든 비용을 기사들에게 떠밀고 있다”고 토로했다.
삼성전자는 100% 자회사인 삼성전자로지텍에서 가전기기 설치와 배송 등 물류 일감을 맡기고 있다. 삼성전자로지텍은 2017년 매출이 9746억 원인데 이 가운데 계열사로부터 올린 매출이 9015억 원으로 전체의 93%에 달한다. 결국 삼성그룹 계열사 물량으로 돈을 버는 구조다. 하지만 삼성전자로지텍은 기사를 직접 고용하지 않는다. 다시 하청업체에 일을 맡긴다. 하청업체는 설치기사와 개별로 계약을 맺는다.
LG전자도 비슷하다. LG그룹의 물류는 판토스가 담당하고 있다. 판토스는 LG상사가 지분 51%를, 구광모 LG그룹 회장 7.5%, 형제인 구연경 4%, 구연수 3.5% 등 오너일가가 19.9%의 지분을 갖고 있다. 판토스의 2017년 매출은 1조 9978억 원이며, 이 가운데 LG 계열사로부터 올린 매출이 1조 5606억 원, 전체 매출의 78.36%가 LG그룹에서 나왔다. 판토스는 다시 하청을 주고 하청업체와 기사 간 계약을 통해 가전기기 설치가 이뤄진다.
대기업이 물류를 담당하는 자회사를 세우고 통행세를 받듯 수익을 올리는 동안 설치기사들의 형편은 도리어 쪼그라들고 있다. 기업으로선 부가가치가 높지 않은 업무를 외주화해 인건비 등 비용을 줄이고, 가격협상을 통해 갑의 위치에서 협력사와 하청업체를 부릴 수 있다. 물류회사를 세워 그룹사 일감을 몰아주는 방식으로 안정적으로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데다 교묘하게 규제도 피해간다. 공정거래법상 일감몰아주기는 총수일가의 직접지분을 기준으로 하고 있다. 삼성전자를 통해 삼성전자로지텍을 지배함으로써 일감몰아주기 대상에서 벗어나고, LG는 판토스에 대한 오너일가의 지분이 규제 기준인 20%에서 0.1%가 부족해 법망의 사각지대에 있다.
앞의 설치기사 김 씨는 몸을 다쳐 성수기인데도 일을 하지 못하고 있다. 보조기사 월급이 오른데다 사람을 구하기도 쉽지 않은데 하소연할 데도 마땅치 않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김 씨는 “뭔가를 말하고 싶어도 일감이 끊어질까봐 참을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라며 “말이 좋아 개인사업자지 하청업체와 원청인 삼성전자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최근 배달설치 기사들이 청와대에 청원을 넣는 등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삼성전자서비스 수리직원 8000여 명이 직접고용을 눈앞에 두고 있는 것도 자극이 됐다. 노조와해 공작 혐의로 구속기소된 최평석 전 삼성전자서비스 전무는 인사노무 전문으로 삼성전자로지텍 상무로 일했었다. 비슷한 위치에 있던 삼성전자서비스 수리직원들이 직접채용되며 설치기사들의 상대적 박탈감은 더욱 커졌다.
설치기사들은 사실상 대기업의 비정규직 근로자나 다름없는데 개인사업자로 분류되며 권리는 없고 부담만 커지고 있다고 말한다. 원청인 삼성전자와 LG전자가 개인사업자 지위에 있는 기사들을 상시적으로 관리하고, 업무지시를 해 왔다는 것이 기사들의 주장이다.
삼성의 협력업체에서 일하는 기사 B 씨는 “개인사업자면 사장인데 협력업체 파트장한테 매일 출근 체크를 받고, 수·목요일 위주로 한 주에 1~2번 월에 큰 교육 1번 등 삼성전자로지텍의 CS 교육을 받는다”고 말했다. B 씨에 따르면 협력업체에서 일하는 설치기사들은 삼성으로부터의 업무지시와 고객응대 지침 등을 주기적으로 받고 있다.
기업들은 업무지시나 강의 등을 직접 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기사를 대상으로 강의할 강사를 채용해왔다. 온라인 캡처
반면 삼성전자로지텍과 판토스는 협력업체와 계약을 맺은 설치기사들에게 어떠한 업무지시나 교육 등 지침을 내리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삼성전자 측은 “삼성전자로지텍은 협력업체와 계약하고, 협력업체가 개별 설치기사와 계약하는 것으로 안다”며 “업무지시와 교육은 협력업체를 대상으로 이뤄지고, 기사에게 직접하지 않고 외부 기관에 위탁해서 진행한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삼성전자로지텍과 판토스는 전자제품 설치기사에게 설치 교육과 CS교육을 담당할 강사를 주기적으로 채용해왔다. 기사를 대상으로 직접 교육을 하지 않는다는 기업 측 설명과는 전면 배치되는 부분이다.
대기업 관계자들도 오너일가의 곳간이 돼버린 물류 자회사를 곱게 바라보지 않고 있다. 재계 한 관계자는 “비상장에다 안정적으로 현금이 창출되는 게 물류 자회사다. 비용덩어리로 보는 직원을 줄일 수 있고 사금고처럼 활용할 수 있는 문제도 있다”고 지적했다.
뿐만 아니라 고객감동이라는 명목으로 기사들에게 요구되는 업무강도와 감정노동은 점점 심해지고 있다. 일선 기사들 사이에서는 원청업체, 하청업체는 물론 고객까지 갑들 속의 을로 사는 것이 더 이상은 힘들다는 목소리가 많다.
LG전자 설치업무를 주로 하는 C 씨는 “하청의 하청 구조, 불합리한 처우 모르는 사람은 없죠. 그런데 제가 불만을 제기하면 뭐가 바뀌나요?”라고 되물었다.
금재은 기자 silo123@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