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주지사 출마, 민주당 경선 앞둬…‘다윗과 골리앗 싸움’ 반전 드라마 펼칠까
1998년부터 2004년까지 미국의 안방극장을 휩쓸었던 인기 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를 즐겨봤던 사람이라면 아마 뉴욕주지사 민주당 예비선거에 출마한 한 후보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바로 여주인공 4인방 가운데 한 명인 ‘미란다 홉스’ 역할을 맡았던 배우 신시아 닉슨(52)이다. 처음 닉슨이 출마 선언을 했을 때만 해도 사실은 코웃음을 치는 사람이 더 많았다. 정치 경험이라고는 전무한 배우가 하루 아침에 갑자기 무슨 정치를 할 수 있겠냐는 비아냥이었다. 하지만 지난 3월만 해도 10% 초반대에 머물던 지지도는 선거를 앞둔 현재 29%까지 오른 상태다(8월 말 기준). 비록 지지율 면에서 아직은 현 뉴욕 주지사인 앤드류 쿠오모(61)에게 한참 뒤처져 있긴 하지만, 닉슨의 지지자들은 혹시 일어날지 모르는 막판 대역전극을 기대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진보적 성향이 강한 뉴욕주의 유권자들이 상대적으로 쿠오모보다 더 진보적인 닉슨의 손을 들어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 때문이다. 과연 닉슨은 뉴욕주 최초의 여성 주지사이자 최초의 레즈비언 주지사라는 새 역사를 쓸 수 있을까.
‘섹스 앤 더 시티’의 배우 신시아 닉슨이 뉴욕주지사 출마선언을 해 주목을 받고 있다. AP/연합뉴스
그녀의 인생에 결정적인 전환점이 된 것은 시즌6까지 방영됐던 HBO 방송국의 인기 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였다. 극중에서 당차고 능력있는 변호사인 ‘미란다 홉스’ 역할을 맡았던 닉슨은 이를 통해 전국구 스타로 급부상했다. 그리고 이 드라마로 에미상 코미디드라마 부문 여우조연상을 수상했으며, 이후에는 브로드웨이에서도 연기력을 인정받아 토니상 연극부문 여우주연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사람들의 뇌리 속에 ‘미란다’의 이미지는 너무나도 오래, 그리고 강렬하게 남아있었다. 어딜 가나 닉슨과 ‘미란다’를 동일시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며, 심지어 둘을 헷갈려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이것은 결코 배우의 연기 인생에 있어서는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는 사회 운동가로 활동을 시작한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가령 지난 2009년, 뉴욕주 주도인 올버니에서 상원의원들을 상대로 결혼평등법안에 대한 로비를 하고 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공화당의 한 의원은 닉슨을 가리켜 ‘위선자’라고 비난했다. 이유인즉슨, 과거 닉슨이 “결혼한 사람들은 우리의 적이다”라는 발언을 한 적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에 대해 닉슨은 이렇게 말했다. “그렇게 말하긴 했지요. 그런데 그건 ‘섹스 앤 더 시티’의 ‘미란다’가 했던 말인데요”.
닉슨에 대한 이런 편견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정치인으로서 그녀의 자질을 의심하는 사람들은 지난 3월, 그녀가 트위터를 통해 출마 선언을 하자 온갖 의심과 비난을 퍼부었다. 가령 민주당의 크리스틴 퀸 전 뉴욕시의장은 닉슨을 가리켜 “자격 미달인 레즈비언”이라고 폄하했는가 하면, ‘뉴욕타임스’는 “단언컨대 국가 전역에 불행을 몰고 올 또 한 명의 TV 스타”라고 평가절하했다.
쿠오모 주지사는 아예 대놓고 비꼬기도 했다. 닉슨을 경쟁 상대로조차 여기지 않았던 쿠오모 주지사는 “닉슨은 아마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나 빌 드 블라시오 뉴욕시장이 보낸 인물일 것이다. 이제 빌리 조엘만 출마하면 되나”라고 비아냥거렸다.
하지만 이런 비난을 꿋꿋이 버틴 닉슨의 지지율은 선거를 목전에 둔 8월 말, 30%에 육박한 상태다. 아직은 60%의 지지율을 보이고 있는 쿠오모에 비해서는 한참은 모자라긴 하지만, 쿠오모를 상대로 싸운다는 것이 애초부터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선방하고 있는 셈이기도 하다.
3선에 도전하고 있는 뉴욕주 검찰총장 출신인 쿠오모는 뉴욕의 유명한 정치 명문가 출신이다. 부친인 마리오 쿠오모 역시 뉴욕주 주지사를 역임했으며, 비록 이혼은 했지만 쿠오모는 과거 로버트 케네디의 셋째 딸인 케리 케네디와 결혼한 바 있다. 그런가 하면 “다음 목표는 백악관이다”라고 공공연하게 말하고 다닐 정도로 쿠오모는 민주당의 실세로 인정받고 있는 인물이다. 이처럼 정치 거물을 상대로 배우 출신인 닉슨이 도전장을 내밀었으니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라는 말이 나오고 있는 것도 무리는 아닌 셈인 것이다.
‘섹스 앤 더 시티’에서 당차고 능력있는 변호사인 ‘미란다 홉스’ 역할을 맡았던 닉슨.
과거 영화배우 출신이었던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은 생전에 “연기를 해보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공직을 맡을 수 있단 말인가”라며 의아해하기도 했었다.
닉슨 역시 배우로서의 경력이 정치 인생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고 있다. 오히려 장점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닉슨은 “배우들은 진정한 소통 전문가다”라고 말하면서 “단, 제임스 딘처럼 내향적인 성격의 천재 배우들은 제외해야 한다. 하지만 나는 내향적이지도 않으며, 천재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독일 시사주간 ‘포쿠스’ 역시 이런 의견에 동조했다. 닉슨이 유권자들을 만나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모습을 보면 놀랍도록 설득력 있고, 확신에 차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런 능숙한 표현력은 아마 배우로서의 재능 덕분일 것이라고 말했다.
닉슨과 대화를 하면 할수록 그녀가 자신이 주장하는 의제에 대해 명확하게 꿰뚫고 있다는 사실 또한 잘 알 수 있다고 ‘포쿠스’는 말했다. 이미 다방면에 걸친 개인 경험을 바탕으로 오래전부터 여러 가지 사회 문제에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닉슨이 특히 관심을 갖고 있는 분야는 공교육, 대중교통, 건강보험, 여성 인권, 사회 복지, 부패 청산 등이다.
때문에 이번에 내세우고 있는 공약에는 무료 건강보험 실시, 마리화나 합법화, 이민세관집행국(ICE) 폐지, 부자 증세, 낙태 권리 옹호, 대중교통 환경 개선 등이 포함되어 있다. 가령 ICE를 가리켜 “테러리스트 조직”이라며 맹비난하고 있는가 하면, 뉴욕의 열악한 지하철 환경에 대해서는 “개선이 시급하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미 지하철 안에서 두 번이나 모유 수유를 해봤을 정도로 오래전부터 항상 지하철을 이용해왔던 닉슨은 때문에 누구보다도 뉴욕의 지하철 환경이 얼마나 나쁜지 잘 알고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교통정책에 대해서는 사실상 지식이 전무하기 때문에 이를 보완하기 위해 현재 리처드 래비치(메트로폴리탄교통당국 전 회장), 찰스 코마노프(저명한 애널리스트) 등의 전문가들을 영입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한편 2006년 유방암 진단을 받고 투병했던 경험이 있는 닉슨은 그후 유방암 퇴치 운동가로 활동하기도 했었다. 가령 NBC 방송국 사장을 설득해서 황금시간대에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유방암 특별 프로그램을 방영토록 했는가 하면, 유방암 퇴치를 위한 NGO이자 연구기관인 ‘수전 G. 코멘’의 대사로도 활동한 바 있다.
공교육 문제와 관련해서는 세 자녀를 키우면서 겪었던 경험이 토대가 됐다. ‘섹스 앤 더 시티’로 한참 인기를 끌고 있을 당시 큰딸이 유치원에 들어가면서 공교육 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던 닉슨은 2002년 뉴욕 시청 앞에서 공교육 관련 예산 삭감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다가 연행되기도 했었다. 그후 닉슨은 뉴욕의 공평한 공교육을 지지하는 단체인 ‘양질의 교육을 위한 연맹’의 대변인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양성애자인 닉슨은 성소수자 문제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닉슨은 성소수자 운동가인 크리스틴 마리노니(왼쪽)와 2012년 결혼식을 올렸다.
이밖에 닉슨이 가장 관심을 두고 있는 분야는 다름아닌 성소수자와 관련된 것들이다. 스스로를 양성애자라고 천명한 닉슨은 2003년 전남편과 이혼한 후 교제를 시작한 성소수자(LGBTQ) 운동가인 크리스틴 마리노니와 2012년 결혼식을 올렸다. 현재 전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과 딸, 그리고 2011년 마리노니가 출산한 아들 등 세 자녀를 두고 있다.
커밍아웃 당시 자신의 성정체성에 대해 닉슨은 한 인터뷰에서 “나는 변한 것이 없다. 나는 평생을 남자와 살았었다. 그리고 지금은 한 여자와 사랑에 빠졌다. 하지만 그래도 낯설지가 않다. 나는 그저 한 여자와 사랑에 빠진 여자일 뿐이다”라고 당당하게 말했다.
이에 지난 2011년에는 올버니에서 동성결혼 법제화를 주장하는 시위를 벌였는가 하면, 동성결혼을 합법화하기 위한 단체인 ‘워싱턴 국민투표 74’를 후원하는 모금 행사를 여는 등 성소수자 권익 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배경에도 불구하고 과연 그녀가 정치인으로서의 자질을 인정 받아 막판 대역전에 성공할 수 있을지 여전히 의문을 품고 있는 사람들은 많다. 이에 대해 닉슨은 자신을 과소평가하지 말아줄 것을 호소하고 있다. 비록 정치 경력은 미미하지만 자신을 믿고 기회를 달라고 말하고 있는 닉슨은 “많은 사람들이 나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나의 극히 일부분만 알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일부분도 대부분이 허구 인물, 즉 ‘미란다’와 관련된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정치 경험 운운하는 것 역시 성차별적인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닉슨은 “만일 내가 똑같은 경력을 가진 남자였다면, 아마 이 정도의 의심은 받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반면, 닉슨에게 충분히 희망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전통적으로 진보 성향이 강한 뉴욕주 유권자들이 기성 정치인인 쿠오모에게 염증을 느껴 막판에는 닉슨의 손을 들어줄 것이라고 믿고 있다. 닉슨 역시 바로 이런 점을 최대한 부각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가령 지난 8월 29일 열렸던 TV 토론회에서 닉슨은 쿠오모를 가리켜 ‘부패한 기득권 세력이다’라며 거듭 공격했다. 실제 쿠오모는 두 번의 임기 기간 동안 클린턴 식의 불륜 스캔들에 연루되었는가 하면, 지난 3월에는 최측근 보좌관이 에너지기업으로부터 거액의 뇌물을 수수한 혐의로 유죄를 선고 받기도 했다.
그리고 바로 이런 점들이 진보주의자들의 심기를 건드리고 있다고 닉슨은 말한다. 닉슨이 “만일 현재 블룸버그 시장이 뉴욕의 주지사였다면, 나는 아마 출마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닉슨은 “뉴욕주 시민들은 쿠오모에게 단단히 화가 나있다”고 말하면서 “쿠오모는 민주당의 트럼프다”라고 비난하고 있다.
비록 지지율에서는 뒤처져 있지만 닉슨이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는 이유는 또 있다. 바로 앞서 열린 연방하원의원 뉴욕주 14번 선거구 후보 경선에서 여성 정치 신인인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즈(28)가 민주당 거물이자 10선 현역 의원인 조 크롤리 후보를 누르고 깜짝 승리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대역전극이었다.
또한 뉴욕시 제3당인 ‘근로가정당(WFP)’의 지지를 얻은 후보가 전통적으로 예비선거에서 승리해왔다는 점 역시 닉슨에게는 고무적이다. 아닌 게 아니라 최근 실시된 근로가정당 내 여론조사 결과, 응답자의 91.5%가 닉슨을 지지한다고 응답했기 때문이다.
이런 바람대로 과연 닉슨은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최후의 승자가 될 수 있을까. 전통적으로 진보 성향이 강한 뉴욕주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다는 것은 곧 주지사에 당선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사실상 민주당 경선은 본선이나 다를 바 없다. 민주당 경선이 미 전역에서 주목받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뉴욕주의 운명을 가를 민주당 예비 선거는 9월 13일 열리며, 중간선거는 오는 11월 6일 치러질 예정이다.
김민주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