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개 기업 승계 구도 확정에도 승계 작업 제자리…막대한 상속세가 최대 걸림돌
LG그룹은 구본무 회장 별세로 구광모 회장으로 4세 승계를 완료했다. 현대차그룹은 공정거래위원회(공정위)의 재벌 개혁 압박에 따라 지배구조 개편안을 마련, 이를 통해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에서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으로 경영권 승계를 한 번에 이룬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 현재 30대 그룹에는 이재용 삼성 부회장을 포함해 모두 15명의 총수 일가 3·4세가 부회장 직책에 올라 있다. 경영 승계가 목전이란 뜻이다. 다만 막대한 상속세와 지배구조 개편 방안 등에 부딪쳐 승계 작업이 원활하진 않다.
‘일요신문’이 국내 30대 그룹 경영권 승계 현황을 분석한 결과, 현재 LG그룹, 두산그룹, 효성그룹, 현대백화점그룹, 이상 4개 그룹사에서 총수 일가 3세 또는 4세가 지배사 최대주주에 오르는 경영 승계를 완료했다. 직책은 모두 회장이다. 지분 승계를 마쳐 최대주주이자 차기 총수 자리를 확정지은 그룹사는 삼성그룹, 현대차그룹, 한진그룹, 신세계그룹, 현대중공업그룹, 금호아시아나그룹, 대림그룹, 한국타이어그룹, 세아그룹, 이상 9곳이다. 9곳 중 6곳의 차기 총수가 부회장 직책을 가졌다. 지주사 전환 및 계열분리가 남았지만, 사실상 30대 그룹 중 43.3%가 차기 승계 구도를 확정한 셈이다. 총수 일가 3·4세임에도 지배사 지분을 갖지 않아 승계구도를 알 수 없는 곳은 SK그룹, 롯데그룹, 교보그룹, 한라그룹, 4곳에 불과했다.
현대백화점그룹·두산그룹·효성·LG그룹은 총수 일가 3세 또는 4세가 지배사 최대주주에 올랐다. 사진은 왼쪽부터 정지선 현대백화점그룹 회장, 박정원 두산그룹 회장, 조현준 ㈜효성 회장, 구광모 ㈜LG 회장. 일요신문DB.
2016년 조석래 회장이 명예회장으로 물러나며 3세 조현준 회장으로 일찌감치 경영권 승계가 이뤄진 효성도 마찬가지다. 효성가(家)는 2014년 조석래 명예회장의 차남인 조현문 전 부사장이 형 조현준 회장의 횡령·배임 의혹 등을 주장하며 진행한 고소·고발에 대해 “경영권 확보를 위한 악의적 행태”라고 규정, 장자의 편에 섰다. 당시 조 명예회장의 부인인 송광자 씨는 “동생이 형에게 대들어선 안 된다”며 장자가 가업을 이어야 한다는 뜻을 분명히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같은 태도는 조현문 전 부사장 이후 조 회장의 삼남 조현상 효성 총괄사장과 조현준 회장 간 경영 갈등에도 동일 적용됐다.
재계에선 국내 대기업에서 경영 승계를 누가 할지 정하는 것은 ‘승계 1차 작업’ 수준도 아니라고 말한다. 재계 한 관계자는 “국내 대기업의 ‘족벌경영’에서 누가 경영을 맡을지는 뻔한 것”이라며 “문제는 지배구조개편과 막대한 상속세, 오너 경영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을 어떻게 넘느냐가 관건”이라고 말했다. 문재인 정부가 밀어붙이는 일감 몰아주기 및 순환출자 해소, 공익법인 규제, 금융·보험회사의 의결권 제한, 지주회사 요건 강화 등이 경영권 승계의 대표적인 난관이다. 현대차는 정몽구 회장 이후 정의선 부회장 승계를 명확히 했음에도 승계 작업에 진척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 정 부회장은 주주 반발로 앞서 한 차례 지배구조 개편안을 철회한 후 공정위의 재벌 개혁 압박까지 받으면서 승계 작업을 미뤄둔 상태다.
상속세도 문제다. 삼성은 이재용 부회장이 삼성물산 지분 17.08%를 확보, 이건희 삼성 회장을 대신해 총수 역할을 하고 있지만, 수조 원에 달할 것으로 예상되는 상속세 부담으로 승계 최종 단계서 멈춰 선 상태다. 대림그룹 역시 총수 일가 3세 이해욱 대림산업 부회장이 대림코퍼레이션 지분 52.26%를 확보했음에도 상속세 해결 방안을 찾지 못한 채 회장 취임을 미루고 있다. 현행 상속세 및 증여세법은 상속세 납부 의무가 있는 상속인 또는 수유자는 상속개시일이 속하는 달의 말일부터 6개월 이내에 상속세의 과세가액 및 과세표준을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바에 따라 관할세무서장에게 신고하도록 돼 있다. 회장 취임 후 6개월 내에 상속세를 내기는 쉽지 않다. LG그룹도 상속세로 골머리를 앓는 것으로 알려졌다.
상황이 이렇자 30대 그룹 중 지배사 최대주주로 오르는 경영 승계뿐 아니라 상속세나 지배구조 개편까지 완료한 곳은 두산과 현대백화점이 전부다. 두산은 4세인 박정원 ㈜두산 회장이 지분 5.5%를 보유한 최대 주주로 경영 승계 작업을 마쳤다. 두산은 집안 내 장자를 중심으로 형제들이 돌아가며 회장직을 수행한 뒤 세대를 넘기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현대백화점은 정몽근 명예회장이 2006년 3세 경영인 정지선 회장에게 지분 17.09%를 증여하며 승계를 마쳤다. 현대백화점은 증여세를 한무쇼핑 지분 10.51%로 해결했다.
전문가들은 승계 구도가 완전한 승계로 이어지지 않는 이유로 경영권 위협을 든다. 상속세를 내기 위해 지분을 팔면 헤지펀드를 비롯한 외부 자본의 공격을 막을 여력을 잃는다는 것. 기업금융 자문을 전문으로 하는 임정근 법무법인 이제 변호사는 “경영권 승계 진행에 대한 정리가 내부적으로 완료된 기업도 최종 승계 작업을 미루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돈과 시간을 들여 회사 주식을 모으고 경영권 방어를 위한 자금이 확보되면 그때 승계 작업을 완료하기 위해서다”라고 말했다.
한편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는 해외 선진 기업들이 일반적으로 활용하고 있는 차등의결권 등 경영권 방어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경영 승계 재원을 확보하기 위해 기울이는 노력이 기업 현안보다 우선되다 보니 시장 경쟁력 확보가 취약해진다는 이유에서다. 차등의결권은 1주가 의결권 1표가 아닌 경영진이나 최대주주에게 더 많은 의결권을 부여하는 제도다. 예를 들어 차등의결권 하에서 주당 투표권 10개는 전체 주식의 10분의 1만으로도 전체 주식의 90%를 보유한 효과가 있다. 전경련 관계자는 “국내 대기업들이 승계 시나리오에 매몰하지 않고 장기적 관점에서 가치 증진을 위해 경영권 방어 제도를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배동주 기자 ju@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