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대표 종부세 강화 제기 등 ‘현안 해결사’ 역할…청와대 부담 덜었지만 주도권 약화 불가피
이해찬 민주당 대표. 박은숙 기자
여권 관계자들이 꼽은 이해찬호의 상징적인 장면은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 묘역 참배(8월 27일) ▲고위 당·정·청 회의(8월 30일) ▲사상 첫 당·정·청 전원회의(9월 1일)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9월 4일) ▲경기도와의 예산정책협의회(9월 11일) 등이다. 사실상 모든 행보가 주목받고 있는 셈이다.
이 대표는 첫 일정으로 국립 현충원을 찾았다. 김영삼(YS)·김대중(DJ) 전 대통령뿐 아니라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까지 참배했다. 민주당 대표가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을 참배한 것은 2015년 문 대통령이 새정치민주연합 대표를 맡았을 때가 처음이다. 이듬해 추미애 전 대표도 두 전직 대통령을 참배했다. 다만 추 대표는 이후 전두환 전 대통령을 예방하려다가 당내 강경파로부터 뭇매를 맞았다.
이 대표는 8월 30일 광주 5·18 민주묘역을 찾아 “전두환 씨가 (재판에) 불출석한다는 말을 듣고 한참 멀었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이 대표가 보수 대통령을 참배하면서도 전 전 대통령과는 거리를 둔 전략은 당내 강경파와 친문(친문재인) 지지층의 반발을 막는 결과로 이어졌다. 당 한 관계자는 “취임 초반 어떠한 잡음 없이 시작한 것이 추 전 대표와의 차이점”이라며 “이해찬의 힘이 아니겠냐”라고 말했다.
고위 당·정·청 회의에서도 ‘이해찬 파워’는 어김없이 드러났다. 이 대표는 서울 집값 급등으로 참여정부 시즌2 논란이 일자, “3주택 이상·초고가주택에 종합부동산세(종부세) 강화를 검토해야 한다”고 증세에 물꼬를 텄다. 내년도 예산에서 연구·개발(R&D)비가 적다며 증액 카드도 꺼냈다. 월 1회 고위 당·정·청 및 상임위별 당·정 회의도 관철했다.
이어진 사상 첫 당·정·청 전원회의에는 여권 인사 200여 명이 참석했다. 민주당 의원의 참석률은 95.3%(129명 중 123명)에 달했다. 교체를 앞둔 김상곤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 등까지 참석했다. 엄중한 상황 속에서 모인 당·정·청 수뇌부는 소득주도성장과 판문점선언 국회 비준 등 6개 합의사항을 발표했다.
여기서 공유된 내용은 이 대표의 교섭단체 대표연설로 이어졌다. 이 자리에선 공공기관 지방 이전에 불을 지폈다. 이에 야당은 “교섭단체 대표연설이 아니라 국정연설”이라고 비아냥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이 대표는 9월 11일 예산정책협의회에선 ‘판도라상자’인 토지공개념 이슈를 끄집어냈다. 박상병 인하대 정책대학원 초빙교수는 “이 대표가 여권 내 주도권을 확실히 잡아나가는 것”이라며 “향후 정국방향은 프레임, 진영싸움으로 흐를 것”이라고 말했다.
눈여겨볼 대목이다. 이 대표는 현재 ‘상왕’과 ‘총대’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연출하고 있다. 국정연설을 방불케 한 교섭단체 대표연설이나, ‘내가 총리할 땐’이라는 말을 앞세워 민감한 종부세나 공공기관 지방 이전을 밀어붙이는 모습은 ‘상왕’ 리더십, 그 자체다. 진보와 보수도 넘나든다. 이 대표는 9월 5일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 관계자를 만난 자리에선 “보수정권이 멀쩡히 있던 교원노조를 법외노조화를 해버렸다”며 전교조 합법화 가능성을 시사했다. 청와대조차 ‘원칙론’을 고수한 마당에 여당 대표가 보혁 갈등의 정점에 있는 전교조 이슈를 끄집어낸 것이다. 이 대표를 이튿날 박용만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을 만난 자리에선 “필요 없는 규제는 과감히 풀어야 한다”고 말했다.
진보정당 관계자는 흥미로운 진단을 내놨다. “이 대표는 강한 카리스마가 논란이 될 만한 요소를 막아버리면서 여권의 방패막이로 작용하고 있다. 이 경우 청와대도 화약고 이슈에서 방패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실제 이 대표는 8월 30일 고위 당·정·청 회의 종부세 강화와 관련해 “내가 2005년 총리할 때도 이와 비슷한 현상이 있어서 대책을 세웠다”고 말한 데 이어 9월 5일 민주노총과 만남에서도 “내가 총리 때 공무원 노조를 합법화했다”고 밝혔다. 9월 7일 전남도청에서 열린 현장 최고위원회의에서도 “내가 총리로 있을 적에 광주·전남과 공동으로 나주 혁신도시를 만들었다”고 언급했다.
정치권 안팎에선 이명박(MB) 전 대통령의 ‘내가 해봐서 아는데’와 유사한 화법이란 지적이 나왔지만, 논란거리로 비화하지는 않았다. 자칫 정체성 논란을 부를 수 있는 진보와 보수 줄타기도 마찬가지다. 이 대표의 ‘묵직한 존재감’은 왼쪽 깜빡이를 켜고 오른쪽으로 돈다는 비판마저 막아버렸다. 당 내부에서도 ‘현안 해결사’를 자처하는 이 대표의 행보로 당·정의 부담을 덜어주고 있다는 긍정론도 나온다.
그러나 동시에 딜레마다. 현 국면에서 이 대표의 파워가 커질수록 당·청 균열은 한층 심화될 수밖에 없다. 이 대표의 독주가 정권의 독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해결사를 자처하는 이 대표의 광폭 행보 이후 부처 장관들의 존재감은 종적을 감췄다. 부동산에선 정책 총괄자인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의 임대사업 축소 발언보다 이 대표의 종부세 강화가 시장을 뒤흔들고 있다. 이 대표의 R&D 예산 증액 언급으로 김동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의 존재감은 더욱 희미해졌다. 민주당 중진 의원은 “내가 아는 선에선 이 대표의 정책 발표는 당·청 조율 없이 나오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청와대 수석 등에 대한 당내 불만도 극에 달하고 있다. 정책통으로 불리는 민주당 또 다른 중진 의원은 김수현 청와대 사회수석을 향해 “당장 책임을 져야 한다”고 일갈했다. 한 당직자도 “문제가 심각하다”고 가세했다. 김 수석은 노무현·문재인 정부의 부동산 정책을 총괄했다. 종부세 등도 그의 작품이다. 김 수석은 지난해 8·2 부동산 대책을 발표하면서 “이 정부는 부동산 가격문제에 대해서는 물러서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정권 출범 직후부터 그는 ‘왕수석’으로 불렸다.
하지만 이 대표의 목소리가 커지면서 왕수석조차 입지가 상당히 축소된 상태다. 청와대의 컨트롤타워가 붕괴한 정황도 곳곳에서 포착됐다. ‘임종석발 공개초청장’ 후폭풍이 대표적이다. 청와대는 평양 남북정상회담을 앞둔 9월 10일 국회 의장단과 여야 대표단을 초청한다고 발표했지만, 1시간여 만에 불발로 끝났다. 청와대는 당사자의 동의 없이 문희상 국회의장을 비롯해 이주영·주승용 국회 부의장, 강석호 국회 외교통일위원장, 이해찬 민주당 대표, 김병준 자유한국당 비상대책위원장, 손학규 바른미래당 대표, 정동영 민주평화당 대표, 이정미 정의당 대표 등 9명의 명단을 발표했다.
이 중 민주당·평화당·정의당 대표를 제외한 나머지는 불참을 통보했다. 문희상 국회의장이 야당 소속 국회 부의장의 의견을 받아들여 최종 불참을 결정하면서 청와대는 적잖은 타격을 받았다. 애초 여야 원내대표단 방북을 추진했다가 상황이 여의치 않자, 각 당 대표 등을 포함한 동행단의 규모를 키우면서 화를 자초한 셈이다. 박지원 평화당 의원은 자신의 페이스북에서 “청와대와 의장실이 사전에 조율했다면 이런 실수가 발생할 수 있을까요”라며 “혼선의 국정이다.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실수하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꼬집었다. 찬성한 이정미 대표도 “청와대가 방북 요청 전 세심하게 사전동의를 구했어야 했다”고 꼬집었다.
민주당 핵심 관계자는 최근 일련의 상황에 대해 “컨트롤타워가 무너진 모습”이라고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우리는 원팀’이라던 공언은 간데없고 곳곳에서 파열음이 나고 있다. 이종훈 정치평론가는 “엇박자를 낼 바에야 말을 아끼는 게 낫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의 지지율이 추가 하락한다면, 당·정·청 균열은 더욱 벌어질 수밖에 없다. 배종찬 리서치앤리서치 본부장은 “중도보수층이 계속 이탈한다면, 국정 동력이 약화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고 전망했다. 국정 난맥상이 계속된다면, 정부가 국민에 패싱당하는 ‘정권 실종 사태’로 전락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윤지상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