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동적 상납” 2심서 집행유예로 석방…사건 병합·노조 탄원서 등 ‘주효’
롯데그룹 입장에서는 “억울하다”고 호소할 만한 상황이었다. 이명박 정부 당시 비리를 찾아내려던 박근혜 정부에 밉보여 오너 일가가 검찰 수사를 받다가 한 차례 기소됐고, 박근혜 정권에 잘 보여 사업을 확장하려다가 ‘비선실세’ 최순실 국정농단에 관여했다는 혐의로 또 재판에 넘겨졌다. 그리고 5일, 병합된 두 사건에 대해 2심 재판부로부터 롯데그룹이 원하던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2심 재판부는 대부분의 혐의를 유죄로 판단하면서도 징역 2년 6월, 집행유예 4년이라는 너그러운 형을 선택했다.
# “최순실 재단 후원 유죄” 불구 집유
이명박 전 대통령의 1심 공판이 시작된 지 30분 뒤인, 5일 오후 2시 30분. 서울고법 형사8부(재판장 강승준)는 신동빈 회장의 최순실 씨 뇌물공여, 롯데그룹 경영비리 혐의 등에 병합 선고 판결문을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주요 혐의들에 대한 신 회장의 ‘유죄’ 판단이 재판장에 울려퍼지자 롯데그룹 관계자들의 표정이 굳어지기 시작했다.
특히 강승준 부장판사가 “K스포츠재단에 지원한 70억 원에 대해 뇌물로 볼 수 있다. 신 회장이 (면세점 사업에 대한) 대가성을 인식했다”고 설명할 땐 분위기가 더욱 심각했다.
검찰이 앞선 2심 결심 공판에서 요청한 신 회장 구형량은 징역 14년. 하지만 법원은 이중 극히 일부만 받아들였다. 강승준 부자판사는 유죄 판단에도 징역 2년 6월, 집행유예 4년을 선고했다. 분리됐던 두 재판의 양형을 합친 것(징역 4년 4월)보다 크게 줄어든 형이다.
법원이 그 이유로 밝힌 것은 크게 2가지. 앞서 유죄로 인정한 K스포츠 재단 뇌물의 경우 ‘수동적인 상황’이었다고 판단했다. 강승준 부장판사는 “대통령이 먼저 요구해 수동적으로 응했고, 불응할 경우 기업활동 전반에 불이익을 받을 두려움을 느낄 정도였다”며 “의사결정의 자유가 다소 제한된 상황에서 뇌물공여 책임을 엄히 묻기는 어렵다”고 감형 이유를 밝혔다.
또 총수 일가에 공짜 급여를 지급했다는 횡령 혐의에 대해서는 유죄로 판단한 1심과 달리 “신격호 총괄회장의 지시에 따라 급여가 지급되는 것을 용인했을지언정 공모했다고 볼 수 없다”며 무죄로 판단을 바꿨다.
# 롯데와 변호인의 ‘신의 한 수’
별개의 두 사건 병합은 사실 신동빈 회장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다. 신 회장은 지난 2016년 검찰의 롯데그룹 경영 비리 수사 과정에서 신격호 명예회장 등과 함께 기소된 횡령·배임 등의 혐의 한 건, 그리고 박근혜 전 대통령 국정농단 관련 최순실 씨가 만든 재단에 후원금을 출연하려 했던(뇌물) 사건 등 두 건으로 각각 기소됐다.
당초 롯데가 집중했던 것은 단연 롯데그룹 경영 비리 사건. 검찰이 구속영장을 청구하는 등 공격적으로 나섰는데, 1심 재판 결과는 롯데 입장에서 성공적이었다. 신 회장이 집행유예를 받는 데 성공한 것. 재판부는 상당수 혐의에 대해 무죄로 판단하며, 징역 1년 8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하지만 최순실 씨와 함께 기소된 국정농단 사건에서 70억 원 뇌물공여 혐의가 유죄로 인정돼 징역 2년 6월 실형을 받으며, 발목이 잡혔다. “어쩔 수 없었다”며 피해자임을 강조했지만, 재판부는 집행유예라는 선처를 베풀지 않았다. 정장을 입은 채 법정에 모습을 드러냈던 신동빈 회장은 그대로 법정 구속됐다. 그러자 신 회장 변호인단은 최순실 씨와 함께 받고 있는 국정농단 재판에서 신 회장만 떼어내, 롯데그룹 사건과 병합 심리해달라고 법원에 요청했다.
신 회장 입장에서는 최선이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각각 두 번의 재판으로 형을 두 번 받는 것보다 하나의 재판부에서 하나의 형을 받는 것이 형량에 유리하기 때문. 그리고 2심 선고에서 자유의 몸이 되며, 원하는 결과를 얻어냈다.
법원 출신의 한 변호사는 “원래 기업 총수의 경우 일자리 창출 등 영향력 등을 감안해 2심에서는 가급적이면 구속을 시키지 않은 선례들이 있지 않냐”며 “사법행정권 남용 등으로 수사를 받는 법원이지만 지금 경제 상황이 좋지 않은 점, 대법원 선고까지 대기업 오너를 구속시키기 부담스러운 점 등이 반영된 판단인 것 같다”고 설명했다.
# 롯데 경영 탄력 받나
신 회장의 운명을 가를 항소심 선고 결과를 앞두고 롯데그룹은 총력을 기울였다. 롯데 측은 각종 투자 및 인수합병(M&A), 사업 추진 등 굵직한 의사결정이 사실상 멈춘 상태라고 하소연해왔다. 실제 지난 2월 신 회장이 법정 구속된 직후 황각규 롯데지주 부회장을 중심으로 비상경영위원회를 꾸려 기업을 운영해 왔다. 그럼에도 한계가 있다는 게 롯데 측의 호소였다. 올해 들어 국내외에서 약 10건에 달하는 모두 11조 원 규모의 M&A를 검토했으나 결정되지 못한 것이 신 회장 구속 때문이라는 첨언이다.
이례적으로 롯데그룹 노조까지 나섰다. 롯데쇼핑 등 계열사 노동조합 집행부는 선고를 앞두고, 서울고법에 신 회장을 석방해 달라는 탄원서를 제출했다. 노조는 ‘국정농단’ 사건과 2015년 롯데 경영 비리 사건이 병합된 이후 검찰이 신 회장에게 징역 14년을 구형하자 탄원서를 준비했다. 노조는 탄원서를 통해 “롯데는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뇌물을 건넨 대가로 부정한 이득을 취한 사실이 없을뿐더러 도리어 피해자”라고 적시했다.
# 실형 피한 신격호 총괄회장
신동빈 회장이 집행유예를 선고받을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였던, 롯데그룹 비리의 주범 신격호 명예회장 역시 항소심에서 법정 구속을 피했다. 신 명예회장은 신동빈 회장, 신동주 전 부회장 등 롯데그룹 총수일가와 함께 기소됐는데, 재판부는 신 명예회장이 받고 있는 횡령·배임 혐의 가운데 롯데시네마 매점에 영업이익을 몰아주고 총수일가에게 공짜 급여를 지급했다는 등의 일부 횡령·배임 혐의만 유죄로 인정했다.
신 명예회장 역시 감형됐다. 1심(징역 4년)보다 1년 줄어든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집행유예는 아니었지만 신 총괄회장의 건강 상태를 감안해 1심과 마찬가지로 법정 구속은 하지 않았다. 또 신 명예회장의 선고를 먼저 한 뒤에, 신 명예회장이 퇴정할 수 있게 배려하기도 했다.
사건 흐름에 밝은 한 변호사는 “오너 관련 불법 행위를 총괄주도한 신 명예회장은 건강(치매)과 고령을 이유로 실형을 피하고, 이를 물려받은 신동빈 회장 역시 주도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풀려난 꼴”이라며 “검찰의 수사가 다소 억지였다는 평가가 가능하다”고 지적했다. 실제 사건에 참여했던 검찰 관계자 역시 “롯데 수사 당시 신동빈 회장에게 책임을 물으려다가 구속영장이 기각된 이유가 ‘신격호 명예회장이 주도적으로 결정한 게 많아 보인다’는 것이었는데, 1심 재판부도, 2심 재판부도 신동빈 회장에게는 큰 책임을 묻지 않다보니 오너 일가가 구속을 면하게 된 것 같다”고 풀이했다.
안재화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