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맺어준 ‘부녀’ 삶의 의미가 되다
16년간 함께 살며 핏줄 이상의 가족이 된 아빠와 딸.
16년 전인 2002년 가을. 김 씨는 당시 사업 파트너였던 도에이 찌찌의 손녀가 입원한 어린이 종합병원을 함께 가게 되었습니다. 그 병문안을 갔던 한쪽 침상에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모여 있었습니다. 갓 태어난 아기가 하얀 포대기에 싸여 버려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전에 어떤 여인이 침상에 두고 가버린 것입니다. 이 병원에는 종종 이런 일이 있다고 합니다. 아기의 온몸은 수두처럼 피부가 짓물러 있었습니다. 김 씨는 착잡한 마음으로 아기를 바라보았습니다. 태어나자마자 버려진 인생. 이런 경우는 관할 경찰서와 신문에 공고한 뒤, 20일이 지나도 보호자가 없으면 정부 고아원으로 보내지게 됩니다.
문제는 그 20일간입니다. 보호자가 나타날 때까지 아기에게 젖을 먹여야만 합니다. 어린이 환자의 엄마들이 돌아가며 젖을 물리고, 생명을 연장하며 기다립니다. 너무 안타까워 김 씨는 얼마의 돈을 수간호사에게 주고 병원을 나왔습니다. 그리곤 잊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전화가 왔습니다. 수간호사였습니다. 아기가 체중미달이라 응급처치를 하지 않으면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김 씨는 자기와는 상관없는 일이라며 전화를 끊었지만 재차 걸어왔습니다. 보호자가 나타나지 않아 아기가 죽을지도 몰라 돈을 주고 간 그를 수소문해 찾았다는 것입니다. 아기가 인큐베이터에서 한 달만 있으면 살릴 수 있다고 했습니다. 애절하게 매달리는 간호사 얘기를 듣고 결국 그는 비용을 부담하게 되었습니다.
어린이 종합병원에서 입양한 돋음이를 안고.
그러던 어느 날 꿈을 꾸었습니다. 아기가 보였습니다. 애처로운 모습이 너무 생생해 새벽에 곰곰이 생각해보았습니다. 나도 외롭게 사는데 같이 살면 서로 외롭지 않겠다는 믿음이 왔습니다. 다음날 병원장을 찾아가 입양을 청원했습니다. 하지만 아직까지 외국인은 입양이 허락되지 않아 사업파트너인 도에이 찌찌를 엄마로 세우고서야 허락이 되었습니다. 미얀마는 입양절차가 영국법을 따르는 관계로 많은 입증서류가 필요했습니다. 매년 정기보고와 수시보고가 있고, 18세까지는 정부의 관리 하에 있게 됩니다. 그래도 돋음이는 잔병치레하지 않고 잘 자랐습니다. 음악을 좋아해서 피아노도 공부했습니다. 중학교는 공립학교를 다녔는데, 아빠가 외국인이라고 놀려 적응을 못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하이스쿨은 학비가 비싼 사립학교를 보냈습니다.
중학교 때는 아빠가 외국인이라고 놀림받아 학교를 옮겨야 했다.
남들은 아이를 혼자 어떻게 키우냐고 물어봅니다. 그는 아이를 키우는 보모와 식사를 챙겨주는 요리사를 두기까지 했습니다. 혼자 살 때는 텅 빈 집이 싫어서 밤이 새도록 쏘다니다가 잠만 자고 나가던 집이었습니다. 그러나 아이를 키우면서 어둠이 깔리면 부리나케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삶이 바뀌었습니다. 그는 오히려 딸에게 감사하다고 말합니다. 그 딸은 이제 고등학교를 마치고 대학진학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한국유학을 보내려고 합니다. 딸이 한류 음악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입양. 핏줄은 아니지만 딸의 아빠로 동고동락한 16년입니다. 버린 아이에게 부모가 되어준다는 것. 그보다 고귀한 일이 있을까요. 아빠 김 씨는 힘들었던 한국을 떠나 미얀마의 긴 세월 동안 고난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미얀마에서 수강생이 가장 많은 한국어학당도 했고, 양곤국립대 명예교수로도 일해 왔습니다. 지금은 미얀마에선 한국인 최초로 국제 INGO를 허가 받아 정부의 기술학교를 인수 중입니다. 딸처럼 젊고 가난한 청년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일. 그것이 그의 또 하나의 소망입니다.
정선교 Mecc 상임고문
필자 프로필 중앙대 문예창작과 졸업, 일요신문, 경향신문 근무, 현 국제언론인클럽 미얀마지회장, 현 미얀마 난민과 빈민아동 지원단체 Mecc 상임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