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만에 진료실 찾은 조울증 환자에 의해…응급의료진 절반이 생명 위협 느껴
지난달 31일 강북삼성병원에서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한 환자가 칼로 의사를 수차례 찌른 사건이 발생했다.
지난달 31일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강북삼성병원. 박 아무개 씨(30)는 정신과 진료를 받기 위해 정신건강의학과를 찾았다. 박 씨는 이날 예약 없이 병원을 방문, 임세원 교수(47)로부터 외래진료를 받았다.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던 3층 정신건강의학과 복도는 박 씨가 진료실에 들어간 지 15분쯤 지나고나서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박 씨가 칼로 임 교수를 위협한 것.
CCTV 영상에 따르면 임 교수는 다급하게 진료실 밖으로 뛰쳐나와 3층 승강기로 달렸다고 한다. 박 씨는 칼을 꺼내들고 임 교수의 뒤를 쫓아 복도에 넘어진 그의 가슴과 복부를 수차례 찔렀다. 박 씨는 이날 33cm의 회칼을 몸에 지니고 있었다. 복도는 순식간의 혈흔으로 낭자했다. 오후 5시 45분쯤 급작스레 발생한 사건이었다.
병원 보안요원이 뒤늦게 현장으로 뛰어올랐지만 범행이 이미 벌어진 뒤였다. 조광현 서울 종로경찰서 형사과장은 “진료실 안에선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며 “박 씨는 복도에서 범행을 저지른 뒤 근처 의자에 그대로 앉아있었고 병원 보안요원이 그 주변을 서서 지키고 있었다”라고 설명했다. 박 씨는 병원 관계자들로부터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에 의해 현행범으로 체포됐다. 임 교수는 곧바로 응급실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지만 7시 30분쯤 끝내 숨지고 말았다.
박 씨는 평소 조울증 등의 정신질환을 앓았으며, 지난 2015년 강북삼성병원에서 조울증 치료를 위해 약 1년 반 동안 입원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박 씨는 1년 만에 다시 병원을 찾은 셈이다. 조광현 형사과장은 “박 씨가 구체적 진술은 피한 채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들만 늘어놓고 있어 범행 동기 등은 아직 파악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서울중앙지방법원은 지난 2일 저녁 박 씨에 대한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주변에선 임 교수의 죽음의 안타까움을 표하고 있다. 도망치던 당시 임 교수는 보안요원을 대신해 복도에서 두 번이나 뒤를 돌아보며 여타 의료진, 환자에게 대피하라고 주의를 줬던 것. 지난 2일 장례식장에서 기자회견을 진행했던 임 교수의 여동생은 “가족들 입장에선 가해자가 위협했을 때 오빠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갔으면 좋았을 텐데”라며 “그 모습을 평생 기억할 것”이라고 밝혔다.
지난 2일 구속 전 피의자심문(영장실질심사)을 받기 위해 법정으로 들어서고 있는 박 아무개 씨. 최준필 기자
대한의사협회는 이와 관련해 “의료인에 대한 폭행은 수시로 발생하고 있으며 살인사건 역시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진료현장에서 의료진은 무방비 상태일 수밖에 없다”며 “정부와 정치권이 그 심각성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대책 마련에 나설 것을 촉구한다”고 밝혔다.
대한응급의학회가 지난해 7월 의료진 1642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응급실 폭력실태 조사’에서, 응답자들 대부분은 ‘본인이 일하는 곳이 얼마나 안전합니까?’라는 5점 만점 질문에 ‘매우 불안’인 1점을 선택했다. 평균 점수는 1.7점을 기록했다. 응답자의 절반 이상은 근무 중 생명의 위협을 느낀 적이 있다고 답했고, 10명 중 6명은 안전요원이 상주하지 않는 곳에서 근무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사건이 발생한 강북삼성병원만 하더라도, 보안요원들은 병원의 주요 입구·로비 등에만 상주하고 있는 상태다. 사건 발생 직후 병원은 정신건강의학과 진료실 복도에 보안요원 1명을 추가로 배치시켰다. 병원 관계자는 보안 시스템 등과 관련해 “종합적인 건 경찰에 문의하길 바란다”며 구체적인 답변을 피했다.
보건복지부는 지난 2일 정신과병원 등을 대상으로 비상벨 설치와 보안요원 배치 유무, 대피통로 존재 여부 등에 대한 안전실태 파악을 추진키로 결정했다. ‘정신건강복지법’ 개정으로 정신질환 환자 정보를 관할 정신건강복지센터에 통보, 외래치료명령제도를 강화할 계획도 세우고 있다. 대한신경정신의학회 관계자는 “안전한 진료환경을 만드는 내용의 이른바 ‘임세원법’ 제정을 추진할 것”이라고도 밝혔다.
다만 의료계에선 범행 동기 등이 밝혀지지 않은 만큼 이번 사건 논란이 정신질환자에 대한 막연한 오해·편견으로 이어져선 안 된다고 지적하고 있다. 앞서의 박종익 교수는 “망상, 환청을 부르며 흔히 정신병으로 일컬어지는 조현병 같은 경우엔 충분히 범행 원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면서도 “이번 사건의 가해자가 겪고 있는 조울증은 사실 감정 기복이 심하게 나타나는 정신질환에 불과하다. 이것만이 사건 원인이 됐다고 보기엔 어려움이 있다”고 설명했다. 경찰은 범행 동기와 정확한 사실관계를 파악하기 위해 지난 3일 병원에 대한 압수수색을 진행, 박 씨의 진료 기록 등을 확보한 상태다.
이성진 기자 reveal@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