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세 총리’ 김종필 이해찬 각각 2위 3위…책임총리 구현 위해선 개헌 필요
일요신문은 지령 1400호를 맞아 ‘역대 최고의 총리는 누구’라는 주제로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이범석 초대 국무총리를 비롯해 21명의 전직 총리들을 대상으로 했다. 단, 임기가 일 년 이하거나 사법처리를 받은 총리는 제외했다. 장면 백두진 김종필 고건 전 총리 4명은 두 차례 총리직을 역임했다. 대학교수(11명) 정치평론가(10명) 정치부 기자(50명) 국회 관계자(10명) 등 81명이 설문에 응했다. 최대 2명까지 고를 수 있도록 했는데 26명이 2명을, 54명이 1명을 골랐으며 한 명이 ‘모르겠다’고 응답해 총 응답수는 106표였다. 또한 ‘총리의 덕목’과 ‘책임총리제 구현 방안’에 대해서도 물어봤다.
고건 전 국무총리. 이종현 기자.
예상했던 결과였다. 1위는 ‘행정의 달인’으로 불리는 고건 전 총리가 차지했다. 총 106표 중 42표를 얻었다. 고 전 총리는 김영삼 정부 마지막 총리(30대)이자 노무현 정부 초대 총리(35대)다. 그 사이엔 민선 서울시장(1998~2002)으로 재직했다. 국회 탄핵소추안 의결로 노무현 전 대통령 직무가 정지됐을 때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아 국정을 무난히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고건을 고른 응답자들 대부분 ‘안정감’을 그 이유로 들었다. 박상병 정치평론가는 “행정부 수장으로서 안정감을 주고 국정조정 능력이 탁월하다”고 했다. ‘박정희정치연구소’ 박정희 소장은 “균형감각을 가장 잘 지켰고, 정책을 시행함에 있어서 그 효과와 영향에 대해 시행 전에 3번 이상 시뮬레이션을 진행하는 등 최대한의 효과를 내게 하려는 업무스타일을 가졌다”고 설명했다. 윤태곤 정치평론가는 “굳이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라고 했다.
고 전 총리의 ‘위기관리 능력’에 점수를 준 응답자들도 있었다. 신상진 광운대 교수는 “(노무현 탄핵정국 때) 국정을 잘 운영했다”며 고 전 총리에 한 표를 던졌다. 한 정치부 기자도 “2003년 발발한 사스 당시 (고 전 총리의) 신속한 대응으로 사망자를 내지 않아 세계보건기구(WHO)가 선정한 사스 예방 모범국이 됐다”면서 “지금 시점에서 당시의 대처를 한 번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기후변화센터 명예이사장을 맡고 있는 고 전 총리에게 여러 번 소감을 부탁했지만 끝내 거절했다. 언론과의 공식 인터뷰는 일체 하지 않는다며 2017년 출간한 회고록으로 답변을 대신해달라고 요청했다. 고 전 총리는 회고록에서 “국민들로부터 과분한 지지와 사랑을 받았다. 나름의 원칙과 소신을 지키려고 애썼다. 특히 실사구시의 행정을 실천하려고 노력했다”면서 “(총리를 비롯해) 많은 공직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혜택이라고 생각한다. 혜택 받았던 것을 다 반납해야 한다. 시민단체에 참여하고 봉사하는 일이다. 한 번 공인이면 공인을 떠날 수 없는 것 같다. 잊힐 권리를 행사하고 싶은데 잘 안 되는 것 같다”고 했다.
2위는 18표를 얻은 ‘영원한 2인자’ 고 김종필 전 총리(JP)였다. JP는 박정희 정권이던 1971~1975년(11대) 총리를 맡아 4년 6개월 재임했다. 정일권 전 총리(6년 7개월)에 이어 두 번째로 임기가 길었던 총리다. 대통령 직선제 이후 임명된 총리로는 최장수다. 이어 JP는 내각제 개헌을 고리로 탄생한 김대중 정부 첫 총리(31대)를 맡았다. JP는 김대중 정부 출범과 함께 임명됐지만 당시 야당의 인준거부로 6개월간 총리 서리로 근무하기도 했다.
응답자들은 정무감각, 실세 총리로서 힘 있는 국정 운영 등을 JP의 강점으로 꼽았다. 채진원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는 “정치인 출신의 노련한 일처리가 돋보였다”고 했다. 고진동 정치평론가는 “실질적으로 대통령 권한 위임받아서 독자적인 총리의 권한을 행사했다”고 말했다. ‘총리로서 영향력을 드러낸 거의 유일한 사례’ ‘권력 분점의 롤모델’과 같은 답도 있었다.
3위엔 36대 총리 이해찬 민주당 대표(2004.6~2006.3)가 올랐다. 15표를 얻었다. JP와 비슷한 답이 주를 이뤘다. 차창훈 부산대 교수는 “분권형 책임총리를 실현했다”고 평가했다. 김태일 영남대 교수는 “내각 관리 능력이 뛰어났다”고 했다. 정치부 기자들은 ‘탁월한 국정 장악력’ ‘대통령에게까지 쓴소리를 할 수 있는 정치력’ 등의 답을 내놨다. 이 대표가 ‘대독 총리’가 아닌 실권 총리로서 자기 목소리를 냈다는 부분이 좋은 평가를 받은 것으로 분석된다.
4위는 10표를 기록한 김황식 전 총리(41대)였다. 2010년 10월에 임명돼 이명박 전 대통령 임기가 끝날 때까지 재직했다. 대법관과 감사원장에 이어 총리자리까지 오른 김 전 총리는 퇴임 후 새누리당(현 자유한국당)에 입당, 2014년 서울시장 경선에 도전했지만 정몽준 전 의원에게 패한 바 있다. 윤성이 경희대 교수는 “갈등을 잘 중재했고, 민심 소통 역할을 잘 해냈다”라고 평가했다. 한 국회 관계자는 “전형적인 엘리트 코스를 밟았지만 검소하게 살아왔다는 점에서 공직자의 주요 덕목 중 청렴을 실천했다”고 말했다. 안정적인 국정운영, 친근한 이미지 등의 답도 나왔다.
고 강영훈 전 총리가 5위(7표)로 뽑혔다. 21대인 강 전 총리는 1988년 12월 임명돼 1990년 12월까지 2년간 재직했다. 육군사관학교 교장 재직 시 5·16 군사 쿠데타 동참을 거부해 수감됐던 강 전 총리의 발탁은 당시 보수와 진보 양측에서 환영을 받았다. 도덕성을 갖췄고, 안정적으로 국정을 보좌했다는 평가다. 강 전 총리의 경우 모범적인 원로의 모습을 보여줬다는 답이 주를 이뤘다. 윤태곤 정치평론가는 “퇴임 후 적십자사 총재를 지내면서 모범적 원로의 상을 보여줬다”고 했다.
정홍원 전 총리(42대)와 황교안 한국당 대표(44대)가 각각 4표와 3표를 얻어 6위와 7위에 올랐다. 응답자들은 정 전 총리가 재임 기간 구설수 없이 국정을 이끌었고, 황 대표는 박근혜 탄핵 때 대통령 권한대행 역할을 잘 수행했다고 답했다. 29대 이수성 전 총리가 2표로 그 뒤를 이었다. 최진 대통령리더십연구원장은 이 전 총리에 대해 “부처 조율능력이 탁월했다”고 했다. 이밖에 이범석(초대) 장면(2대·7대) 남덕우(14대) 노신영(18대) 전 총리가 한 표를 받았다.
그렇다면 총리에게 필요한 덕목은 무엇일까. 안정감, 균형 및 정무감각, 도덕성, 국정 장악력이 꼽혔다. 김태일 영남대 교수는 “부처를 장악해야 한다”고 했고, 임재홍 울산대 교수는 “균형감각과 정확한 판단력”이라고 답했다. 복수의 응답자들은 “정파성을 띠는 대통령과 달리 총리는 특정 진영에 치우치지 않고 중립을 지키며 야당과 소통을 잘 해야 안정적인 국정 운영이 가능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품(도덕성)을 갖춰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책임총리제 구현과 관련해선 압도적인 답이 나왔다. ‘개헌’이었다. 책임총리 자체가 ‘말장난에 불과하다’는 지적도 많았다. 안순철 단국대 교수는 “책임총리란 표현이 부적절하고 개헌을 통해 내각제적 요소를 크게 강화하든 아니면 총리를 없애고 부통령제로 가든지 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고진동 정치평론가도 “대통령중심에서 국무총리는 스태프 역할밖에 없는 상황이다. 대통령 권한 위임이라는 소극적인 것이 아니라 국회 법 개정을 통해 적극적으로 총리직을 보호해야 한다. 임기까지 보호하는 방안이 있다”고 했다.
총리 권한을 보장하기 위한 여러 대안도 제시됐다. 미국식 부통령제와 마찬가지로 관계 법령을 고쳐 대통령 선거 시 국무총리 지명자를 ‘러닝메이트’로 하자는 아이디어가 눈길을 끌었다. 총리가 부처의 각료들을 2배수로 추천하고, 대통령이 낙점하는 방식도 나왔다. 총리의 인사제청권을 실질적으로 보장하자는 얘기였다. 제왕적 대통령제를 견제하기 위해 국회가 총리를 추천하거나 선출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이 모두 헌법을 바꿔야 가능한 일로, 결론은 ‘개헌’인 셈이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
번번이 대권 문턱서 낙마…총리 잔혹사 끊을 수 있을까 역대 국무총리 중 대권에 도전한 인물은 모두 9명이나 되지만 번번이 문턱에서 낙마했다. 최근 이낙연 총리와 황교안 전 총리가 유력 대권주자로 떠오르면서 ‘총리 대권 잔혹사’를 끊어낼 수 있을지 관심이 모아진다. 지금까지 총리가 대통령이 된 경우는 고 최규하 전 대통령이 유일하다. 최 전 대통령은 1976년부터 1979년까지 총리직(12대)을 맡았다. 최 전 대통령은 박정희 전 대통령 사망 후 8개월간 대통령을 지냈다. 그러나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간접적으로 선출된 것으로, 1987년 직선제 이후 총리 출신 대통령은 아직 없다. 가장 먼저 대권에 도전했던 인물은 고 김종필 전 총리다. 김 전 총리는 일찌감치 박정희 뒤를 이을 차기 대통령으로 꼽혔지만 한동안 정치활동이 금지되는 등 굴곡진 인생을 살았다. 결국 대권 꿈을 이루지 못하고 ‘영원한 2인자’라는 별명을 얻었다. 1997년 대선에는 총리 출신 3인방이 대권에 도전했다. 김영삼 정부에서 총리를 지낸 이회창 이홍구 이수성이 그 주인공이다. 이들은 신한국당의 이른바 ‘9룡’에 속하기도 했다. 이홍구 전 총리는 신한국당 대선경선 직전 불출마를 선언했고, 이수성 전 총리는 끝까지 경선을 치렀지만 후보 6인 중 5위에 머물렀다. 경선 승자는 이회창 전 총리였다. 이 전 총리는 1997년 대선에서 초반 승리가 확실시 됐지만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종필 전 총리가 DJP연합을 구성하면서 1.6% 차이로 패했다. 2002년 대선에서도 1위를 달리다 아들 병역 기피 의혹이 불거지며 고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패했다. 이 전 총리의 도전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2007년에도 대선에 도전했으나 무소속으로 출마해 15% 득표하는데 그쳤다. 김대중 정부 이한동 전 총리는 하나로국민연합이란 정당 후보로 2002년 대선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설문조사에서 1위를 차지한 고건 전 총리도 대권에 도전했지만 고배를 마셨다. 고 전 총리는 2007년 12월 대선을 앞두고 한때 차기 주자 지지율 1위를 기록했다. 2006년 11월 신당 창당 의사를 밝히며 본격적인 대권 행보에 나섰다. 그러나 두 달 뒤인 2007년 1월 “대결적 정치구조 앞에서 저의 역량이 너무나 부족함을 통감한다”며 불출마 선언을 했다. 총리를 2번이나 지낸 ‘행정의 달인’이었지만 권력투쟁을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그에게 대선은 너무 버거운 무대였다. 역시 노무현 정부 총리였던 이해찬 한명숙은 당내 대선경선에 출마했지만 대선후보가 되는데 실패했다. 이명박 정부 정운찬 전 총리도 유력 대선주자였지만 꿈을 이루지 못했다. 한동안 여야 양쪽 모두에서 영입제안을 받을 정도로 이미지가 좋았지만 뒷심이 부족했다. 정 전 총리는 19대 대선 출마를 선언했으나 선거를 한 달도 채 안남기고 낮은 지지율에 출마를 포기했다. 총리의 대권 도전은 현재 진행형이다. 그러나 정치권에선 회의적 시선이 팽배하다. 총리 출신들이 인지도 면에서 다른 차기 주자들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대선은 ‘인기투표’가 아니다. 조직력 열세, 가혹한 검증, 권력의지 부족 등은 총리 출신 정치인들이 극복해야 할 과제로 꼽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