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이야기, 영화 외적 상처 우려에 지인들도 만류…“일단 부딪쳐보자는 게 내 스타일”
배우가 자신의 출연작에 자부심을 갖는 건 당연하지만 전도연이 영화 ‘생일’(감독 이종언·제작 나우필름·레드피터)에 품은 마음은 각별하다. 출연을 결심하기까지 상당한 고민의 시간도 필요했다. 처음엔 “못 하겠다”고 거절했지만 마음이 쉬이 접히지 않았다. 제작진은 때때로 전도연에 ‘어떤 마음이냐’고 물어왔고, 그럴 때마다 전도연은 자신이 느낀 감정 그대로 영화와 그 인물에 대해 이야기했다.
평소 출연작을 결정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을 보내지 않는 전도연이 이번엔 유독 망설이고 주저한 데는 이유가 있다. ‘생일’은 세월호 참사로 가족을 떠나보내고 남은 유가족의 이야기로 2014년 4월 16일 이후 삶이 송두리째 바뀐 이들을 다루고 있다. ‘시’ 연출부 등을 거쳐 이번 작품으로 데뷔한 이종언 감독은 2015년 6월 무렵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의 심리 치유센터인 ‘이웃’에서 봉사활동을 시작한 뒤 그 경험을 바탕으로 시나리오를 완성했다.
4월 3일 개봉하는 이 영화를 두고 누군가는 ‘세월호 이야기를 하기엔 너무 이르다’고 말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기억해야 할 이야기’라고 한다. 작품을 완성한 전도연은 “잊지 말아야 할 이야기”라고 했다.
사진제공=숲엔터테인먼트
영화 개봉을 며칠 앞두고 만난 전도연에게 ‘생일’의 출연 제안을 왜 거절했는지부터 물었다. 그는 “배우가 영화 제안을 고사하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다”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종언 감독이 글을 썼고, 작품을 만든다기에 ‘무슨 이야기예요’ 물었어요. ‘세월호 이야기’라는 답을 듣고는 사람들과 똑같이 반응했죠. ‘지금 세월호 이야기하는 게 괜찮아요?’라고 말이죠. 그렇게 시나리오를 받아 읽는데 정말 좋았어요. 좋았는데…, 좋으면서도 펑펑 울었어요.”
‘생일’은 세월호 참사로 고등학생인 아들을 잃은 엄마 순남, 어떤 이유에서인지 5년 동안 집을 떠났다가 돌아온 남편 정일(설경구 분), 비극에 잠긴 도시에서 서로를 보듬고 살아가는 이웃, 떠난 친구를 그리워하는 남은 친구들의 이야기다. 떠난 이들을 함께 애도하고, 남은 이들을 위로하는 영화는 참혹한 상처를 다루지만 내내 따뜻한 시선을 견지한다.
순남을 연기한 전도연은 “아이를 잃은 엄마라는 설정에서부터 겁이 났다”고 했다. 그의 대표작이기도 한 영화 ‘밀양’에서 남편과 아이를 차례로 잃는 인물 신혜의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생일’이 세월호 이야기여서 어려움도 있었지만 개인적으론 ‘밀양’의 신혜가 걸렸어요. 그 작품을 하고나서 다시는 아이 잃은 엄마 역할은 안할래, 했죠. 음…. ‘생일’을 만나기 전까지 4년여의 연기 공백을 보냈는데 그동안 여러 작품의 제안이 왔지만 거절했어요. 사람들은 ‘전도연은 왜 어려운 것밖에 안 해?’라고 묻죠. 사실 그런 역할들이 주로 오거든요. 피하고 피하다보니 ‘생일’까지 왔어요. 가까운 사람들조차 ‘하지 말라’고 했어요. 영화 외적으로 상처받을 것 같다면서요.”
그래도 전도연은 ‘생일’을 잡았다.
“세월호 이야기가 끝난 게 아니잖아요. 과정 속에 있고 오해와 편견 속에 있고. 영화와 상관없는 어떤 공격들이 있을 수도 있고…. 하지만 출연을 결심하면서 다 감당했어요. 나는 지금 영화를 시작하지만 나보다 훨씬 전부터 겪은 사람들도 있으니까. 시나리오를 쓴 이종언 감독은 또 얼마나 힘들었을까. 충분히 응원해주고 싶었어요.”
순남은 아들의 빈자리를 인정할 수 없는 엄마다. 계절이 바뀌면 아들의 새 옷을 사고, 유가족 모임에도 나가지 않은 채 슬픔을 혼자 감당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연기하면서 점점 더 ‘진짜’에 집착하게 된다”는 전도연은 한 인물을 온전히 체화한 배우가 보일 수 있는 연기를 ‘생일’에서 펼친다. 전도연이 아니고서야 ‘생일’을, 순남을, 누가 그려낼 수 있을지 떠오르지 않는다. 덕분에 ‘생일’은 꼭 세월호 유가족뿐 아니라 소중한 누군가를 하루아침에 잃은 이들에게 건네는 위로와 애도로도 읽힌다.
사진제공=숲엔터테인먼트
전도연은 ‘생일’을 준비하면서 세월호 유가족을 만나지 않았다. “어려웠고 무서운 과정을 통해 내가 영화에 출연하기로 결정했으니, 나는 시나리오에만 집중하고 싶었다”고 했다. 영화 개봉을 앞두고 갖은 몇 차례의 유가족 시사회에서야 비로소 실제 아픔을 겪은 이들을 마주할 수 있었다. 영화 상영이 끝나고 무대에 올랐지만 전도연은 “들어갈 때부터 나올 때까지 눈을 제대로 뜨지 못했다”고 돌이켰다.
“내가 왜 이걸 자꾸만 피하려고 했을까…. 너무 죄송했어요. 제가 뭐라고 드릴 말씀은 없었어요. 그저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고는 말씀 드렸죠. 극장 중간에 앉은 한 어머니께서 달려와서 노란 리본이 수놓인 지갑을 전해주시는 데, 눈물이 터져버렸죠. ‘생일’은 힘든 고비를 넘고, 넘고, 또 넘은 작품인 것 같아요.”
전도연은 연기도, 일상도 “일단 부딪쳐보자는 주의”라고 했다. 해보지도 않고 피하는 게 “가장 싫다”는 그는 “찜찜하고 불편한 상태로 있지 말고 (문제를) 대면해 시원하게 해결하는 게 내 스타일”이라고 했다. 세월호 참사 유가족의 이야기라는 사실 때문에 ‘생일’을 향한 여러 시선이 쏟아지고, 작품에 참여한 모두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전도연은 ‘부딪쳐본다’는 그 성격대로 솔직한 이야기를 멈추지 않았다.
영화에선 무게감이 상당하지만 일상의 전도연은 좀처럼 나이 들지 않는 듯한 모습이다. 1972년생인 그가 마흔일곱 살이란 사실이 무색할 정도다. 10년 넘도록 습관적으로 집중한 운동도 요즘은 하지 않는다는 그는 “다만 규칙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고 했다. 매일 아침 5시 30분에 일어나 초등학생인 딸 간식 도시락을 싸는 것으로 일과를 시작한다. 그렇다고 나이 듦에 고민이 없는 건 아니다.
“100세 인생이라는 데, 몇 년 전부터 뭘 해도 재미가 없어졌어요. 이렇게 재미없게 100살까지 살아야 하나 싶었죠. 어떻게 하면 재미있을까, 뭘 해야 행복할까. 사실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잖아요. 행복도 즐거움도 찰나이지, 일상일 순 없으니까요. 생각을 바꿨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에 감사하자고. 저는 배우이기에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은 걸 가졌고, 불평불만을 하면 벌 받을 수 있다고도 생각해요. 게다가 이렇게 예쁜 딸도 있고, 남편도 있잖아요. 하하!”
이해리 스포츠동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