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 좌초 시 유승민계 탈당·민평당 이삭줍기·정의당 단일화 ‘올인’ 전망
바른미래당, 민주평화당, 정의당 등 야 3당 의원들이 지난해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 촉구 공동집회를 개최했다. 박은숙 기자
선거제 패스트트랙의 표면적 구도는 ‘반대 1(자유한국당) 대 찬성 4(더불어민주당·바른미래당·민주평화당·정의당)’다. 찬성 내지 조건부 찬성이 과반을 차지하지만, 최종 통과 여부는 회의적이다. 이 게임이 가진 특성 때문이다. 거대 양당(더불어민주당과 자유한국당)은 ‘잘해야 본전’, 소수 정당은 ‘밑져야 본전’인 게임이다.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가 “좌파 독재 고속열차” 등의 독설을 퍼부으면서 선거제 패스트트랙 무산에 총대를 멘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한국당의 ‘영남 패권주의’, 특히 대구·경북(TK)의 기득권 포기 없이는 선거제 패스트트랙은 한발도 나아가지 못한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도 마찬가지다. 권역별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은 필연적으로 민주당의 호남 기득권을 흔든다. 민주당이 ‘호남 패권주의’를 포기하지 않는 한 선거제 패스트트랙은 신기루에 불과하다. 여의도 대표적 전략가인 이해찬 민주당 대표는 한동안 권역별 연동형 비례대표를 놓고 갈지자 행보를 보였다. 정치권 한 관계자는 “잘해야 본전인 게임은 원래 소극적이기 마련”이라고 잘라 말했다.
선거제 패스트트랙 무산을 둘러싼 일부 당의 ‘미필적 고의’ 정황은 곳곳에서 발견된다. 캐스팅보트를 쥔 바른미래당은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공수처) 법안의 수정안’을 플랜B로 제시했다. 민주당에 공을 넘긴 셈이다. 수정안의 핵심은 공수처에 영장청구와 수사권만 부여하고 기소권을 떼는 것이다.
박상병 인하대 정책대학원 교수는 “민주당이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안을 만들어 ‘출구전략’을 만든 것”이라고 분석했다. 당 양대 주주의 한 축인 유승민계가 선거제 패스트트랙을 강하게 반대하면서 당 내홍만 심화하자, 사실상 무력화 수순을 밟고 있다는 것이다. 바른미래당이 되레 원심력의 희생양으로 전락한 것이다. 유승민계의 집단 탈당설도 끊이지 않는다.
홍영표 민주당 원내대표는 “바른미래당 안을 최대한 조정해서 합의를 도출할 것”이라고 밝혔지만, 선거제 패스트트랙의 동력은 사실상 꺼진 상태다. 민주당 한 의원은 “선거제 패스트트랙은 블랙홀 이슈”라며 “(논의가 본격화하면) 국회는 다시 올스톱할 것으로 본다”고 회의론에 힘을 실었다.
민주당 내부에서도 지역구 하향 조정(253석→225석)에 따른 호남 의석수 축소를 우려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용호 무소속 의원이 중앙선거관리위원회로부터 입수한 자료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선거법 개정 시 수도권 10석, 영남 8석, 호남 7석, 강원 1석이 통폐합 우선 대상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인구 하한 유권자 15만 3560명을 기준으로 전국 지역구의 시뮬레이션을 돌린 결과다. 서울 종로와 서대문갑을 비롯해 광주 동남을과 서구을 등이 통폐합 대상이다. 종로의 유력한 출마자는 문재인 정부 황태자인 임종석 전 대통령 비서실장이다. 서대문갑의 현역 의원은 당의 요청으로 입각에서 제외된 우상호 의원이다. 선거제 패스트트랙도 민주당에 상당한 모험이라는 얘기다.
한국당도 선거제 패스트트랙 플랜B로 맞불을 놨다. 나경원 한국당 원내대표는 3월 25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의원 정수를 10% 줄인다는 전제하에 지역구와 비례대표 의석수를 어떻게 배분할지 논의하자”며 “선거법만큼은 합의해서 처리해야 한다. 정개특위에서 논의하자”고 제안했다. 비례대표 전면 폐지 입장에서는 한발 물러섰지만, 민주당과 정의당 등이 받기 어려운 의원 감축을 제안, 사실상 선거제 논의 무산을 위한 카드라는 분석이 나온다. 선거제 논의를 원점으로 되돌리는 정개특위 카드를 꺼낸 것도 출구전략의 연장선이다. 민주당 한 관계자는 “수용하기 어려운 카드만 제시한다”고 불만을 터트렸다.
관전 포인트는 ‘포스트 선거제 정국’의 핵심인 정계개편 방향이다. 우선 현행 소선거구제의 최대 수혜자인 거대 양당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독자 노선’으로 총선을 돌파할 것으로 보인다. 이 경우 거대 양당의 순혈주의는 극에 달한다. 민주당은 ‘친문(친문재인)계·호남·운동권’ 그룹이 21대 총선 공천권을 장악할 가능성이 크다. 한국당은 친박(친박근혜)계를 포함한 ‘친황(친황교안)계’와 ‘영남보수’가 득세할 것으로 예상된다. 예측 가능한 ‘도로 민주당 vs 도로 한국당’의 양대 구도인 셈이다.
진보진영 한 관계자는 이와 관련해 “승자독식 구도인 소선거구제하에서는 민주당과 한국당이 1등과 2등을 나눠 먹기를 하지 않느냐”라며 “선거제 패스트트랙이 무산되면, 거대 양당이 최대 수혜를 입을 것”이라고 꼬집었다. 2016년 4·13 총선 당시 국민의당의 돌풍으로 여야 의석수가 다당제를 구축한 것도 87년 체제 이후 무려 20년 만의 일이다. 그간 거대 양당이 선거구제 개편 과정에서 ‘암묵적인 짬짜미’를 했다는 의혹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독자파 옆에선 분당 열차가 기적소리를 내고 있다. 바른미래당이 대표적이다. 애초 태생부터 이질적인 두 세력(국민의당과 바른정당)이 모였던 바른미래당은 선거제 패스트트랙을 둘러싸고 내부 갈등이 정점을 찍었다. 유승민 바른미래당 의원이 선거제 패스트트랙 반대 논의를 위한 의원총회를 소집, 두 세력은 이미 ‘한 지붕 두 가족’을 연출하고 있다.
‘정치 9단’인 박지원 민주평화당 의원은 “바른미래당 내 옛 국민의당 의원들의 움직임이 있다”고 분당 가능성을 시사했다. 변곡점은 선거제 패스트트랙 무산의 책임론에 휩싸일 손학규 대표와 김관영 원내대표 등 바른미래당 지도부의 사퇴 시점이다. 당의 양대 축이 ‘비상대책위원회냐, 전당대회냐’를 놓고 또다시 맞붙는 과정에서 완전한 결별 수순을 밟을 수도 있다.
민주평화당 사정도 복잡하다. 평화당은 창당 이후 줄곧 지지율 2∼3%에 불과했다. 21대 총선 돌파를 위한 카드가 절실한 셈이다. 이에 따라 탈당 움직임을 보이는 바른미래당 내 옛 국민의당 인사 영입에 불을 댕길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른바 ‘이삭줍기’에 실패할 경우 민주평화당도 생존을 위한 총선 발 정계개편에 적극적으로 나설 것으로 전망된다.
연대파도 있다. 진보정당인 정의당이다. 선거제 패스트트랙이 무력화하면, 정의당은 차기 총선 생존의 방식으로 민주당과의 후보 단일화 문제에 사활을 걸 것으로 보인다. 정의당 한 당직자는 “우리의 목표는 선거제도 개혁”이라며 “선거제 패스트트랙 추진에 당력을 총집중하고 있다”고 전했다. 통합진보당은 2012년 4·11 총선 당시 민주통합당(현 민주당)과의 후보 단일화를 통해 진보정당 역사상 처음으로 13석을 건졌다. 정치권 한 관계자는 “선거제가 물 건너가면 여야 구도에도 적잖은 변화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1 대 4의 구도는 포스트 선거제 정국에 진입하는 순간, ‘독자파·분당파·연대파’의 천하삼분지계로 전환할 가능성이 크다. 총선용 정계개편을 위한 새판 짜기가 불가피하다는 의미다.
윤지상 언론인
나경원 “좌파집권플랜” vs 심상정 “좁쌀정치” ‘나다르크’ vs ‘심블리’ 날선 공방 앞과 뒤 여의도의 여풍을 주도하는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와 심상정 정의당 의원이 ‘권역별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놓고 정면충돌하고 있다. 현행 선거구제의 변화 여부가 한국당과 정의당의 정치적 운명과 직결한다고 보고 벼랑 끝 전술을 앞세워 창과 방패의 최선봉에 선 것이다. 포문은 나 원내대표가 열었다. 나 원내대표는 3월 19일 권역별 연동형 비례대표제의 산출 방식과 관련해 ‘국민은 산식이 필요 없다’고 한 심 의원을 향해 “명칭도 낯선 ‘50% 권역별 연동형 비례대표제’의 실체가 여의도 최대의 수수께끼”라고 날을 세웠다.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 위원장인 심 의원은 이튿날 “나 원내대표야말로 미스터리”라고 맞받아쳤다. 나 원내대표와 심 의원은 이후에도 “연동형 비례대표제의 핵심은 좌파 장기집권 플랜”, “말꼬리나 잡는 좁쌀정치” 등으로 설전을 주고받았다. 이들은 서울대학교 동문이다. 심 의원이 78학번(사범대학 사회교육학과), 나 원내대표가 82학번(법학과)이다. 제17대 국회의원 총선거(총선) 때 나란히 원내에 진입했다. 삶의 이력은 정반대다. 심 의원은 정치 입문 전 한평생 노동운동가의 길을 걸었다. 구로공단 미싱사로 위장취업을 했던 심 의원은 1985년 비정규직 노동 해방 투쟁의 상징인 구로동맹파업을 이끌었다. 전국금속노동조합연맹 사무처장 등을 지내면서 민중민주파(PD)의 핵심으로 활동했다. 대학 시절에는 총여학생회 창설을 주도했다. 한동안 심 의원의 애칭은 ‘심다르크(심상정+잔다르크)’였다. 지난 대선 등을 거치면서 ‘심블리(심상정+러블리’)로 이미지 변신을 꾀했다. 나 원내대표는 ‘사법시험(사법연수원 제24기) 합격→판사 임용’ 등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대학 시절에도 민주화운동 대신 공부만 하는 소위 모범생이였다. 대학 동기인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은 자신의 저서 ‘진보집권플랜’에서 나 원내대표를 지칭하며 “정치인이 될 거라고는 상상해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홑몸이 아닌 상태에서 사법연수원을 마친 나 원내대표는 당시 ‘나징가제트(나경원+마징가제트)’로 불렸다. 나 원내대표가 정치권과 연을 맺은 것은 2002년 대선 때다. 나 원내대표는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대통령후보 여성특별보좌관으로 여의도 정치권에 발을 들였다. 당 대변인을 거쳐 4선의 제1야당 원내대표 자리에 올랐다. 한때 심 의원의 상징적 애칭이던 잔다르크는 나 원내대표가 이어받았다. 나 원내대표는 3월 12일 교섭단체 대표연설 데뷔전에서 “대한민국 대통령이 김정은 수석대변인이라는 낯 뜨거운 말을 듣지 않게 해 달라”고 독설을 퍼부었다. 심다르크는 ‘심블리’, 나징가제트는 ‘나다르크’로 각각 변화를 꾀한 셈이다. [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