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위원회 참석하자 혼내…비서실장 수첩에 노소영 부부 갈등 관련 노태우 민원도
박근혜 전 대통령. 사진공동취재단
# 청와대서 최태원 내연녀 사건 논의했나
이병기 전 대통령 비서실장 수첩에서 최태원 SK 회장 내연녀를 언급한 메모가 발견됐다. 이 메모는 이 전 실장이 국정원장 임명장을 받기 위해 청와대를 방문했을 때(2014년 7월 18일) 작성됐다(※ 이 전 실장은 2014년 7월부터 2015년 2월까지 국정원장을 지냈고, 이후 2015년 2월부터 2016년 5월까지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냈다).
언론을 통해 최 회장 내연녀 존재 사실이 알려지기 한참 전이다. 최 회장은 지난 2015년 12월 29일 ‘세계일보’를 통해 노소영 씨와 이혼절차를 밟고 있으며, 혼외자가 있고 그 여성과 아이를 책임지기 위해 새로운 가정을 꾸리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 전 실장은 ‘연희동’으로부터 내용을 듣고 메모한 것이라고 진술했다. 연희동은 노태우 전 대통령을 뜻한다. 노소영 씨는 노 전 대통령 딸이다. 이 전 실장은 노태우 청와대에서 의전비서관을 지낸 바 있다.
수첩에는 최경환 경제부총리 이름과 ‘심리치료가능 여부’라는 내용도 적혀있었다. 경제수장인 최경환 당시 경제부총리를 통해 최태원 회장이 내연관계를 정리하도록 설득하려한 것 아니냐는 추측도 가능하다. 노 전 대통령 민원을 이 전 실장이 박 전 대통령에게 전달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 전 실장은 “(수첩에) 최경환 경제부총리라고 불쑥 기재한 것은 왜 기재했는지 모르겠다”면서 “최 전 부총리에게 최 회장과 관련된 이야기를 했을 수도 있는데 기억이 안 난다”고 진술했다.
# 이병기 3인방에 “똑바로 하라”
이병기 전 대통령 비서실장은 조사 과정에서 문고리 3인방을 자주 혼냈다고 진술해 눈길을 끈다.
이 전 실장은 “제가 (국정원장에서)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가게 된 이유가 정윤회 문건 파동 때문이다. 저는 청와대 들어가는 순간부터 정윤회에 대한 생각만 했다. 그래서 당시 저는 3인방 애들(문고리 3인방 안봉근, 이재만, 정호성) 혼 많이 냈다. 안봉근도 저한테 행동 똑바로 하라고 혼 많이 났다. 이재만도 처음에 갔더니 인사위원회 위원으로 와 있기에 ‘당신 수석도 아닌데 뭐 하러 인사위원회에 들어오나. 나가. 필요한 것 있으면 나한테 얘기하면 되지’라고 했다. 정호성은 애가 그런대로 문장도 쓸 줄 알고 그러기에 가끔 걔하고는 보고서 때문에 전화한 일이 있지만, 나머지는 제가 3인방하고는 별로 상대를 안 했다”고 진술했다.
# 정호성이 말하는 박근혜 업무스타일
수사기록에는 정호성 전 청와대 부속비서관이 박근혜 전 대통령 업무스타일에 대해 진술한 내용도 있다. 정 전 비서관이 재판과정에서 일부 언급한 바도 있으나 전체 내용을 처음 공개한다. 다음은 정 전 비서관 진술내용.
“웬만한 사안은 대통령께서 다 꼼꼼하게 주로 챙겼다. 본인이 일에 대해서 ‘내가 이것을 다 결정하고 그래야 된다’는 생각이 굉장히 강했던 분이다. 예를 들어 제가 매일 매일 올려드리는 보고서나 말씀자료나 이런 것이 합쳐서 굉장히 작은 글씨체로 빽빽하게 100페이지가 넘는다. 안에 들어있는 내용이 그냥 설렁설렁한 내용이 아니다. 한 페이지마다 수석들이나 이런 분들한테 바로바로 전화하면서 자세히 챙겼다. 저한테도 토요일 아침 7시부터 전화가 온다. 7시 땅 하면 전화하신다. 일찍 일어나서 일을 하시다가 너무 아침에 일찍 전화하면 미안하니까. 그래도 6시대에 전화하기는 미안하니까. 딱 7시 넘으면 전화가 시작되는 거다. 관저에서 뉴스 외에 TV 보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그런데 마치 맨날 TV나 보고 그런 분으로 알려지고 너무나 왜곡되고 그런 부분이 많기 때문에 정말 그런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24시간 일만 하시던 분인데.”
# 의외로 허술했던 전직 국정원장들
수사기록에선 의외로 허술했던 국정원장들의 면모가 드러났다. 이병호 전 국정원장은 국정원장 부임 전 퇴직금을 몽땅 날렸다. 이 전 원장은 퇴직금을 예금하러 은행에 갔다가 직원 권유로 펀드에 가입했다. 이후 펀드가 하루아침에 휴지조각이 돼 퇴직금을 날리고 반환소송을 했다.
이 전 원장은 ‘펀드도 예금 같은 것인 줄 알았다’며 ‘손해가 발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고 주장했다. 재판장은 펀드가 예금과 비슷한 것으로 생각했다는 주장에 픽 웃었다. 재판장은 ‘정보기관 간부로 근무했다는 사람이 그것도 구별 못해요’라고 핀잔을 주곤 이 전 원장에게 패소판결을 내렸다.
남재준 전 국정원장은 “검사님께서 믿으실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담배 사는 것 외에 제 손으로 물건을 사본 일이 한 번도 없다. 제가 여기 들어오기 전까지도 카드 쓸 줄을 몰랐다”고 고백했다.
# 김대중 청와대도 국정원 특활비 썼다?
이병호 전 국정원장 측 변호인은 항소이유서에서 “김대중 정부 이종찬 국정원장 회고록 법률검토를 하면서 들은 이야기”라며 “김대중 정부도 국정원 특활비를 썼다”고 주장했다.
변호인은 “이종찬 전 국정원장은 국정원 특별사업비를 역대 원장들이 관례같이 대통령에게 가져다주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그는 김대중 당시 대통령과 독대할 때 청와대에 자금을 보내드리겠다고 먼저 제안했다고 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민주화를 하려는 대통령은 그런 돈을 받으면 안 된다’고 하면서 오히려 꾸중을 했다고 한다. 역시 민주화의 거대한 상징이라고 속으로 생각하면서 이 전 원장은 돌아왔다고 한다. 그런데 몇 달 뒤 대통령 미국 순방이 있을 때 김 전 대통령 심복인 박지원 씨가 ‘돈이 필요하니 국정원에서 지원해 달라’고 했다고 한다”고 주장했다.
변호인은 다른 일화도 소개했다. 변호인은 “김대중 전 대통령은 취임 후 이 전 원장에게 더 이상 인권유린이 없어야 한다고 지시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른 어느 날 이 전 원장과 독대하면서 ‘그래도 정보기관은 역시 무서운 데가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라고 지나치듯 이야기했다”고 주장했다. 국정원 특활비 문제는 역대 정권 모두 자유로울 수 없다는 취지다.
# 김재원 “내 돈으로 불법여론조사 비용 반납하려 했다”
박근혜 청와대는 지난 20대 총선에 개입하기 위해 불법여론조사를 실시했고, 비용은 국정원이 대납했다. 총선 이후 청와대 정무수석으로 취임한 김재원 현 자유한국당 의원은 이 같은 사실을 뒤늦게 알고 자기 돈으로 불법여론조사 비용을 반납하려 했다. 청와대도 불법성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는 증거다.
김재원 전 수석은 진술서에서 “제가 2016년 6월 9일 정무수석으로 취임했을 때는 이미 박근혜 정권 상황이 상당히 좋지 않았다. 저는 정무수석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지만 사람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들어갔다. 정권이 바뀔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청와대 들어가서는 되도록 불법을 행하지 않으려고 조심했다”고 했다.
김 전 수석은 “뒤늦게 국정원이 불법여론조사 비용을 대납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제가 이헌수 당시 국정원 기조실장에게 ‘혹시 내가 사적으로 5억 원을 마련해서 되돌려 주면 (국정원이 대납한 불법여론조사 비용) 5억 원을 처음부터 지불하지 않은 것으로 처리해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이헌수 기조실장은 ‘그것은 불가능하다’는 식으로 이야기 했다”면서 “제가 생각하기에 공천에 개입한 것은 나중에라도 꼭 문제가 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정리를 하려고 했던 것”이라고 진술했다.
김명일 기자 mi73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