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한 권리…비판할 게 못돼” vs “지도자 품격에 맞지 않아”
이해찬 대표. 사진=일요신문 DB
올해 초 이해찬 대표는 “당신이 왜 5·18광주민주화운동 관련 유공자냐?”는 세간의 질문을 받았다. 이 대표는 광주 5·18 당시인 1980년 5월쯤 서울에 있었던 까닭이었다. 그는 당시 서울에서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에 가담해 있었다. 광주에 없었던 이 대표가 5·18 유공자로 지정되고 보상금 등까지 받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부적절한 지원금 타내기였다는 지적이 연이어 제기됐다.
이해찬 대표는 즉시 반박했다. 2월 15일 자신의 소셜 미디어에 “서울대 복학생협의회장이었던 나는 5월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으로 구속됐다. 광주에서 직접 희생되거나 부상당한 사람은 아니지만 당시 나는 광주민중항쟁을 김대중이 일으킨 내란으로 보았던 신군부의 재판으로 부당하게 감옥살이를 했다. 나는 기타 광주민주화운동희생자, 광주민주화운동구속자에 해당한다”며 “1999년 받은 보상금 1억 2300만 원 전액으로 ‘오월정의상’을 제정해 해마다 정의를 잘 실천하는 사람에게 수여했다”고 했다.
‘일요신문’ 확인 결과 이해찬 대표는 보상금 1억 2300만 원 가운데 실제 오월정의상에는 5000만 원만 쓰고 나머지는 7300만 원은 자신의 의정 활동비로 사용했다고 나타났다. 1999년 5월 10일 고 김근태 전 의원, 박원순 시장 등 재야출신 인사로 구성된 ‘오월정의상위원회’는 상금 1000만 원을 걸고 해마다 정의를 잘 실천한 인물에게 상을 수여했다. 이재정 성공회대 총장, 김해성 목사, 성유보 민주언론시민연합 이사장과 김주언 언론개혁시민연대 사무총장, 인세반(스티븐 린튼) 박사, 환경연합 등이 5회에 걸쳐 상을 받았다. 딱 5년만 이어졌다.
이제껏 이해찬 대표가 보상금 전액을 오월정의상에 썼다고 알고 있었던 일부 시민은 실망이라는 반응을 전했고 별 문제 없다는 의견도 나왔다. 한 더불어민주당 지지자는 “애초 일부 금액을 떼어서 오월정의상에 기탁했다고 말했으면 칭찬 받을 일이었겠지만 마치 오월정의상에 모든 돈을 다 쓴 것처럼 표현해 놔서 실망감이 크다”고 했다. 또 다른 더불어민주당 지지자는 “안 쓴 게 아니다. 돈을 받아다가 오월정의상에 쓴 건 맞지 않느냐”며 “자기 돈을 자기 생각대로 쓰는 건 비판할 게 못 된다”고 옹호론을 펼쳤다.
하지만 이해찬 대표의 해명을 두고 뒷말이 나오는 건 비단 오월정의상 관련 문제만이 아니다. 이 대표가 밝힌 보상금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와 정부의 실제 보상금 지급 이유가 다소 차이났던 까닭이었다. 이 대표는 자신이 광주민주화운동 희생자라고 밝히며 보상금 수령이 정당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5·18광주민주화운동 관련 법적으로 ‘희생자’ 개념이 생긴 건 이 대표가 보상금을 수령하고 나서 3년 뒤였다. 희생자 개념이 처음 등장한 건 2002년 제정된 5·18민주유공자예우에 관한 법률(5·18 유공자법)이었다. 이 대표가 보상금을 받은 건 1990년에 제정된 5·18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 등에 관한 법률(5·18 보상법)에 따른 혜택이었다.
5·18 보상법은 사망자와 행방불명자, 상이자를 대상으로 하는 법이었다. 이해찬 대표가 보상금을 받을 수 있었던 건 생계 지원이 필요하다는 이유에서였다. 5·18 보상법은 사망자와 행방불명자, 상이자 외 기타 지원금 항목을 따로 만들었다. 5·18민주화운동 관련 ‘생계 지원이 필요한 사람‘은 보상금을 신청할 수 있도록 했다. 생계 지원이 필요한 사람은 5·18 보상법 시행령에 ‘5·18민주화운동에 적극 참가한 사실이 원인이 돼 생업 등에 종사할 수 없었던 것으로 인정되는 사람’이라고 나온다. 이 대표는 5·18 직전에는 광장서적 대표와 돌베개출판사 대표를 역임했다. 당시 출판업계는 호황이었다. 이 대표는 내각 최정점인 교육부 장관 시절 보상금을 신청했다.
1999년 5·18 보상법에 따라 보상금을 받은 이해찬 대표는 3년 뒤인 2002년 5·18 유공자법이 제정되자 생긴 ’희생자‘ 자격으로 유공자가 됐다. 5·18 유공자법은 유공자가 5·18 보상법에 따른 보상금 외 교육, 취업, 의료 등의 분야에서도 국가 도움을 추가로 받을 수 있도록 확대 제정된 법이었다. “나라가 주는 돈 안 받는 게 이상하다”는 권리 옹호론과 함께 지도자로서의 품격에는 맞지 않는 것 아니었냐는 의견이 대립했다. 당연한 권리지만 함께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의 핵심으로 활약했으면서도 보상금을 받지 않은 장기표 신문명정책연구원 원장이나 심재권 의원에 비교돼 지도자로서 아쉬운 판단이었다는 반응이 이어졌다. (관련 기사: [인터뷰] 장기표 “5·18민주화운동 보상? 줘도 안 받아”)
이와 관련 이해찬 대표는 연락을 받지 않았다. 이해찬 의원실 관계자는 “이 대표는 언론사 개별로 대응하지 않는다”며 “1000만 원씩 5회까지 오월정의상에 썼다. 나머지는 지역구 의정 활동비로 사용했다. 지역구가 힘든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보상금은 5·18 당시 구속돼 생계에 종사할 수 없는 사람에게 주어진 돈이었다. 구속된 기간 동안 아내가 대신 출판사를 운영했다. 가장으로서 생계를 책임지지 못한 탓에 보상금을 신청했다. 교육부 장관 때 신청한 건 신청 시기가 맞물린 뿐 권력과는 아무 상관 없다“고 말했다.
5·18 관련자 1차 보상 신청 기간은 노태우 정권 때인 1990년이었다. 1차 보상이 이뤄졌을 때 5·18 보상법 시행령에는 사망자, 행방불명자, 상이자 외 생계 지원이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사람에게도 보상금을 주되 ’보상심의위원회에서 정하는 생활 수준에 미달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단서 조항이 달려 있었다. 이해찬 대표는 1차 보상과 2차 보상 신청 시기를 흘려 보낸 뒤 김대중 정권이 확정된 1998년 3차 보상 때 보상금을 신청했다고 알려졌다. 그 사이 5·18 보상법 시행령의 생계 지원 필요자 생활 수준 관련 단서 조항은 삭제됐다.
한편 당시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 때 잠시 구속됐다가 집행유예로 풀려난 고 김녹영 전 의원, 김윤식 씨, 고 이택돈 전 의원도 모두 5·18광주민주화운동 보상자 명단에 포함됐다고 확인됐다.
최훈민 기자 jipchak@ilyo.co.kr
심재철 5·18 보상금 3500만 원 받고 무상의료 혜택은 거부 심재철 자유한국당 의원의 보상금 수령을 두고도 뒷말이 나왔다. 보상금과 의료 혜택, 유공자 신청의 차이점 때문에 발생한 일이었다. 15일 ’경향신문‘은 ”심재철 의원은 ’1997년 5·18 광주 민주화 유공자라면서 발급된 무상의료 보험증을 반납하고 보훈처에 유공자 등록을 마다했다‘고 했지만 실제 보상금 3500만 원을 받았다“고 보도했다. 이는 보상금과 유공자 등록의 차이점 때문에 생긴 논란이다. 보상금은 1990년에 제정된 5·18 보상법에 따른 혜택이었다. 심재철 의원은 이 보상금을 받았다. 하지만 추가로 정부가 제공한 무상 의료 혜택은 거부했다. 심 의원은 2002년 확대 제정된 5·18 유공자법 관련 혜택도 받지 않았다. 심재철 의원실 관계자는 ”심 의원이 보상금은 받았지만 당시 추가로 정부에서 제공한 무상의료 보험증은 반납했다. 그 뒤에 생긴 유공자 등록도 신청하지 않았다“며 ”보상금과 추가 의료 혜택을 동일선상으로 놓고 거짓말을 했다는 식의 악의적 보도“라고 주장했다. 최훈민 기자 |
왜 ’배상‘이 아니고 ’보상‘일까 5·18 보상법 명칭을 ’5·18 배상법‘으로 수정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고 있다. 보상과 배상은 사전적 의미가 다르다. 보상은 국가 또는 단체의 ’적법한 행위‘ 탓에 발생한 손실을 갚아주는 행위다. 배상은 침해 당한 권리에 대해 물어주는 행위를 일컫는다. 5·18 보상법은 명칭상 국가가 ’적법한 행위‘를 했다는 의미가 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5·18 보상법 명칭이 최소 ’5·18민주화운동 관련자 배상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로 바뀌어야 한다는 지적이 나왔다. 더불어민주당 관계자는 ”법률 용어로서 ’보상‘과 ’배상‘은 의미하는 바가 매우 다르다. 이 법률 명칭을 속히 손봐야 한다“며 ”이 법을 근거로 나온 판결 역시 배상 혹은 보상으로 명확하게 재산정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최훈민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