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철·장동익 “그때도, 지금도 ‘나는 하지 않았다’”...재판부 ”사건 중대성 등 고려해 가능한 신속히 재판 진행“
두 남자는 한 손으로 들기 버거울 만큼 높게 쌓인 서류 뭉치 2개를 나눠 들었다. 하나는 1990년 1월부터 1993년 4월까지 경찰과 검찰 그리고 법원이 작성한 서류다. 1000쪽이 넘는 이 서류엔 두 남자가 무기징역을 받아야 하는 이유가 빼곡히 담겨 있다. 다른 하나는 최근 3년 간 모은 새 자료들이다. 수사기관과 법원이 쓴 서류보다 3배 가량 많은 이 서류에는 앞서의 이유들이 모두 잘못됐고, 그래서 다시 재판을 받아야만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낙동강변 2인조 사건 재심 청구에 관한 심리기일에 참석하기 위해 최인철 씨(왼쪽)와 장동익 씨(오른쪽)가 부산 고등법원에 들어서고 있다. 사진=문상현 기자
# ‘좁은 문’ 들어선 법원과 2인조
낙동강변 2인조가 다시 법정에 섰다. 대법원 판결은 1993년 전에 내려졌지만 마지막으로 법정에 선 건 1992년 항소심이었으니, 정확히 27년 만이다. 그때도, 지금도 “나는 하지 않았다”라는 그들의 목소리는 그대로다.
과거 그들을 처음 경찰서에 데려간 경찰과 수사결과를 토대로 재판에 넘긴 검찰, 선고를 내린 법원, 수사와 재판을 감시할 언론 중 어느 하나도 그들의 목소리를 듣지 않았다. 그런데 최근 법원이 2인조의 목소리를 다시 듣기로 했다. 부산고등법원 제1형사부(김문관 부장판사)는 지난 5월 23일 ‘낙동강변 2인조 살인사건’ 재심 청구에 관한 심문기일을 열었다. 2017년 5월, 2인조가 재심을 신청하고 올해 4월 검찰 과거사위원회가 “경찰관에게 물고문과 폭행을 당해 살인 혐의를 거짓으로 진술했다”고 결론 내린 데 따른 것이다.
법원은 재심을 열기 전까지 상당히 엄격한 심리를 거친다. 특히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등의 권고로 재심이 이뤄진 ‘과거사 사건’이 아닌, 일반 형사사건에서 법원이 다시 재판을 하기로 결정하는 건 극히 드물다. 경찰과 검찰, 그리고 1심부터 대법원에 이르기까지 수사기관과 사법부가 내린 결론이 잘못됐을 수 있다고 인정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법원도, 낙동강변 2인조도 이번 심문기일을 통해 그 좁고 좁은 문을 열었다.
아직 재심이 결정된 건 아니다. 심문기일은 재심을 해야할 지, 하지 말아야할 지 여부를 결정하기 위한 절차다. 재판부는 재심을 청구한 쪽의 이유를 듣고 그 사유가 합당한지 확인한다. 재심 개시 결정 여부는 자칫 재심 청구인들에게 기대감을 줄 수 있어 보통 서면으로 심리하지만, 이번 재판부는 별도의 심문기일을 지정해 낙동강변 2인조와 검찰 측 의견을 직접 듣고 판단하기로 했다.
재판부는 이날 심문기일을 열면서 먼저 2인조에게 발언 기회를 줬다. 최인철 씨는 “실타래처럼 꼬여버린 사건을 우리의 힘으로는 풀 길이 없었습니다. 그동안 세상 사람들을 향해 할 수 있었던 말은 ‘억울합니다’뿐이었습니다”라며 “그러나 지금, 이 자리에 계신 분들과 자녀들에게 당당하게 할 수 있는 말은 ‘저는 하지 않았습니다’입니다. 부디 저희들이 이야기를 세심하고 면밀하게 살펴주셨으면 합니다”라고 울먹였다.
장동익 씨는 “처음 경찰서에 간 날부터 대법원 판결이 내려질때까지 누구도 우리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눈 감는 날까지 저를 지켜 주리라 믿었던 법이 저를 외면 했습니다”라며 “21년을 복역하고 출소한지 6년이 지났습니다. 이제라도 진실을 꼭 밝혀주셨으면 합니다”라고 호소했다.
지난 23일 낙동강변 2인조 사건 재심 청구에 관한 심리기일에 참석하기 위해 최인철(왼쪽), 장동익(가운데) 씨와 이들의 법률 대리인 박준영 변호사(오른쪽)가 부산 고등법원을 향하고 있다. 사진=문상현 기자
재판부 역시 약 10분 가량 별도의 입장을 밝혔다. 첫 심리기일인 만큼 향후 심리 과정 등을 설명하기 위함이라고 설명했지만, 사건과 관련해 재판부가 구체적인 입장을 밝히는 건 흔한 일은 아니다. 재판부는 “아직은 이 재판의 최종 결론을 내릴 단계가 아닌 만큼 여러 가지 면에서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입장”이라며 “하지만 1991년 기소 이후 2019년 심문기일에 이르기까지 재심 청구인과 그 가족들이 겪었을 말 못할 고통과 어려운 과정들은 조금은 알고 있다. 재판부는 그런 과정과 사건의 중대성 등을 고려해 가능한 한 신속히 이 재판을 진행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심리 방향에 대해선 “재심 청구인들이 이번 재판에서 진정으로 원하는 건 본인들의 억울함을 이제라도 제대로 된 재판을 통해서 풀어달라는 취지로 알고 있다. 향후 재판 과정에서는 법과 원칙에 맞는 재판을 하는데 중점을 맞추겠다”며 “재판부는 과거사위원회 발표를 비중 있게 다루겠지만, 그와는 별개로 재심사유를 증명하는 유력한 증거들을 개별적으로 확인하겠다”고 설명했다.
재판부는 다음 기일부터 고문과 폭행에 대한 심리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재판부는 “당시 경찰관의 직무상 고문, 가혹 행위 등은 합리적 의심 없이 증명돼야 한다”며 “이들을 불러 증언을 듣고 재심 여부에 대해 종합적인 판단을 해야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2인조의 법률 대리인 박준영 변호사는 “출소한 뒤 고문 경찰관을 찾아 갔지만 모두 부인했다”며 “반드시 이들을 불러 고문 사실을 말하고, 위증하면 책임을 묻게 해달라”고 요쳥했다. 2인조 역시 “재판부가 고문 경찰관을 불러준다면 감사할 것”이라고 말했다. 검찰 역시 증인 신청에 동의했다.
박 변호사는 1991년 당시 경찰관에게 고문을 당한 또 다른 피해자 2명도 증인으로 신청할 예정이다. 앞서 낙동강변 2인조 사건을 재조사한 검찰 과거사위원회는 낙동강변 살인사건 결과 발표에서 “2인조가 경찰에 체포되기 2개월 전인 1991년 9월, 같은 장소에서 같은 방식으로 고문을 받고 허위자백을 했다가 항소심에서 무죄를 선고 받은 사례가 있다는 점 등을 조사 과정에서 새롭게 확인했다”고 밝혔다.
최인철 씨(왼쪽)과 장동익 씨(오른쪽). 사진=문상현 기자
# 나의 아내, 그리고 어머니의 유품
최인철 씨는 전날 잠을 한숨도 자지 못했다. 법정에서 혹시라도 말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을까 싶어 글을 쓰기도 하고, 찬물로 몸을 씻어 보기도 했다. 그러다 잠든 아내 곁에 한참을 머물렀다.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게 된 남편 대신, 아내는 21년 동안 갓난아기 둘과 가정을 홀로 지켜야 했다. 김양식장부터 공장, 농장 등을 전전해야 했고 그때 하나 둘 씩 생긴 지병은 몸을 심각하게 망가 뜨렸다. 지금 아내가 가진 병은 열 손가락으로는 셀 수 없다. 안과 밖, 최 씨 가족에겐 모두 감옥이었다.
장동익 씨는 머리 맡에 두고 자려던 서류 뭉치에 절을 했다. 과거 경찰과 검찰, 법원이 작성한 낙동강변 사건 기록들이다. 장 씨의 유죄가 확정된 이후 그의 어머니는 아들의 억울함을 풀어야 한다며 이 서류들을 모두 복사했다. 그리고 분홍색 보자기에 서류를 메고 10년 동안 전국을 돌았다. 2003년 11월, 장 씨의 어머니는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죽어서라도 억울함을 밝히겠다”는 유언을 남기면서 두 눈을 감지 못했다는 게 가족들의 전언이다.
장 씨 어머니가 확보한 사건 기록들은 재심 청구와 검찰 과거사위원회가 결론을 내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현재로선 사건 기록 보존 기한이 20년인 만큼 2인조가 출소한 뒤엔 이미 폐기됐을 터였다. 당시 경찰과 검찰 수사 기록에서 광범위한 조작 사실이 발견됐고, 이를 근거로 현재 법원이 재심 개시 여부를 심리하고 있다. 이 기록이 없었다면, 다시 재판받을 수 있는 ‘기적’은 없었다. 장 씨의 어머니는 그의 마지막 뜻대로 아들의 억울함을 밝히고 있다.
박준영 변호사는 이번 심리기일에서 재판부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1993년 대법원에서 무기징역이 확정됐습니다. 그로부터 26년이 흘렀습니다. 그 시간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억울함을 주장해 왔습니다. 이 법정에서 다시 무죄를 주장할 수 있다는 사실은 당사자들뿐만 아니라 가족들에게도 의미가 큽니다. 이 사건, 당초 사형이 구형됐던 사건입니다. 불행 중 다행으로 무기징역이 선고됐고 복역하던 중에 감형이 이뤄져서 21년을 복역하고 출소했습니다. 삶은 이어지지만 이들의 그것은 이미 모두 무너져 내렸습니다. 남은 시간, 얼마를 더 살진 모르겠지만 재심을 통해 두 분이 이제라도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었으면 합니다.”
한편, 낙동강변 2인조 살인사건은 1990년 1월 4일 부산 엄궁동 낙동강변 갈대숲에서 30대 여성이 시신으로 발견되면서 알려진 사건이다. 당시 경찰은 사건 현장에서 시신 외에 별다른 단서를 발견하지 못했다.
미제 사건으로 남는 듯 했지만 1년 뒤인 1991년, 경찰은 돌연 장동익, 최인철 씨를 용의자로 지목해 고문과 폭행 등으로 허위자백을 받아 구속한 뒤 검찰로 송치했다. 이들은 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21년 간 복역하다가 2013년 모범수로 특별 감형돼 출소한 뒤 2017년 5월, 무죄를 주장하며 법원에 재심을 청구했다.
‘낙동강변 살인사건’을 재조사한 법무부 산하 검찰 과거사위원회는 지난 4월 17일 최 씨와 장 씨는 1991년 사하경찰서 경찰관 4명에게 물고문과 폭행을 당해 강도살인 혐의를 거짓으로 진술했다고 결론 내렸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