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AR 판독에 선수들 웃고 울고…K리그 조기 도입에 ‘판정 뒤집기’ 익숙한 한국
이제 축구에서 심판이 손으로 네모(VAR 시그널)를 그리는 모습은 어색하지 않은 장면이 됐다. K리그에서 활약중인 조지음 심판. 사진=한국프로축구연맹
[일요신문] 축구 경기장에서 종종 선수들이 골을 넣고 곧바로 환호하지 않고 주심의 눈치를 살피는 상황은 이제 어색하지 않은 장면이 됐다. 주심이 경기장 위에서 양손으로 네모를 그리거나 한쪽 손을 귀에 갖다 대는 장면 또한 마찬가지다.
#축구를 바꾼 비디오 판독
비디오 판독 시스템(VAR·Video Assistant Referees)은 지난 2016년 3월 등장하며 축구를 바꾸기 시작했다. ‘심판 오심을 줄이겠다’는 목표로 축구 규정과 경기방식을 결정하는 협의체인 국제축구평의회(IFAB)에 의해 탄생했다. 같은 해 9월 열린 2016 FIFA 클럽 월드컵부터 운영되기 시작했다.
야구, 농구, 배구, 테니스 등 많은 종목에서 비디오 판독 시스템이 운영되고 있었지만 축구만은 ‘오심도 경기의 일부’라며 좀처럼 도입이 되지 않고 있었다. 일각에서는 거부감마저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중계기술의 발달로 결정적 오심이 경기 이후 회자되는 일이 잦아졌다. 이에 축구계도 더 이상 손을 놓고 있을 수만은 없는 상황이 됐다.
축구계 최고 권위 대회인 월드컵에도 VAR이 도입됐다. 2018 러시아 월드컵은 VAR이 가동된 최초의 월드컵이었다.
월드컵 역사상 첫 VAR 가동은 프랑스와 호주의 조별리그 경기였다. 프랑스 공격수 앙투안 그리즈만이 드리블 중 넘어졌다. 경기가 그대로 진행되는 듯 했지만 심판은 귀에 손을 갖다 댔다. 느린 장면을 확인하자 그리즈만의 발과 호주 수비수의 발이 접촉하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또한 최초 태클이 시작된 지점은 페널티 박스 바깥이었지만 발과 발이 닿은 곳은 박스 안이었다. 이어진 심판의 판정은 페널티킥 선언이었다. 이외에도 프랑스는 크로아티아와의 결승전에도 VAR 판독 과정을 거쳐 페널티킥을 얻어냈다. 우승 과정에 VAR 덕을 톡톡히 본 프랑스였다.
VAR 판독 끝에 골로 인정받은 김영권의 골장면. 사진=대한축구협회
#VAR에 울고 웃은 태극전사
대한민국의 월드컵 또한 VAR이 큰 영향을 미쳤다. 첫 경기 스웨덴전 박스 안에서의 반칙이 VAR에 의해 적발돼 페널티킥을 내줬다. ‘카잔의 기적’을 만들어낸 독일전에서는 김영권의 골이 VAR 과정을 거쳐 인정됐다. 최초 판정은 오프사이드였다. VAR이 아니었다면 승부가 달라질 수도 있었던 경기들이었다.
‘신화’로 불리는 2019 폴란드 U-20 월드컵 또한 대한민국의 선전에 VAR이 결정적 역할을 한 대회였다. 지난 2017년 한국 대회 이후 VAR이 도입된 두 번째 대회였다. 조별리그를 통과한 대한민국의 상대는 운명의 라이벌 일본이었다. 전반전을 어렵게 무실점으로 마무리한 대표팀은 후반 초반 상대에게 골을 허용했다. 하지만 VAR 판독 이후 오프사이드가 선언돼 골이 취소됐다. 이후 오세훈의 골이 터지며 대표팀은 8강에 오를 수 있었다. 세네갈을 만난 8강전에서는 7번의 VAR 판독이 이어졌다.
한일전 승리는 ‘VAR 경험이 승부를 갈랐다’는 분석이 뒤따랐다. 당시 대한민국 선수단 21명 중 15명이 K리그 소속 선수였다. K리그는 세계적으로도 드물게 1부와 2부 모두 VAR을 도입한 리그다. 이들은 매주 리그 경기에서 VAR 판독을 직접 경험하고 있다. 이강인이 활동 중인 스페인 프리메라리가 역시 VAR이 시행되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은 사정이 달랐다. 이들은 고교생 1명을 제외하면 전원이 J리그 소속이었다. J리그는 아직 VAR을 도입하지 않았다. VAR에 대한 경험이 적은 이들은 한일전 당시 자신들의 골이 취소되자 유독 좌절하는 모습을 보였다. 일본 언론도 “골 취소 이후 심리적으로 불안해 패배로 이어졌다”는 반응을 내놨다.
K리그 경기 중 ‘온필드리뷰’를 진행중인 고형진 심판. 사진=한국프로축구연맹
대한민국 선수들이 국제 대회에서 수차례 이어진 VAR 판독에도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었던 데에는 K리그의 노력이 있었다. K리그는 2017년 7월부터 VAR을 도입했다. 세계적으로도 발 빠른 선택이었으며 아시아에서는 첫 번째였다. 이듬해엔 세계 최초로 2부리그에서도 VAR을 시행했다.
K리그에서 처음으로 VAR 판독이 실시된 경기는 2017년 7월 1일 인천과 광주의 경기였다. 전반 31분 광주 수비수 박동진이 상대를 막아서는 과정에서 반칙을 범했고 경고가 주어졌다. 인천이 반칙이 일어난 지점에서 프리킥을 차려는 찰나, VAR이 가동됐다. 곧이어 주심은 최초 판정을 그대로 유지했다.
골과 관련된 최초의 VAR 판독은 이와 동시에 벌어진 울산과 수원의 경기였다. 후반 16분 울산 공격수 이종호가 측면 크로스를 감각적인 헤딩골로 연결했지만 경기가 곧바로 재개되지 않았다. 심판은 VAR 판독 이후 골 취소를 선언했다. 열정적인 골 세레머니를 펼쳤던 이종호는 머쓱한 표정을 지어야했다. 울산이 골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반칙이 있었기 때문이다.
유난히도 무게감이 남달랐던 VAR 판독도 있었다. 때는 지난 2017년 11월 26일, 상주 상무와 부산 아이파크의 승강 플레이오프 2차전이었다. 상주는 1부리그 잔류, 부산은 승격을 놓고 벌어진 경기였다. 1, 2차전 점수 합계 1-1로 팽팽한 승부가 이어지던 후반, 양 팀 골망이 한 번씩 흔들렸다. 하지만 두 골 모두 VAR 판독 결과 취소됐다. 이들 모두 골로 인정을 받았다면 부산이 승격할 수도 있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합계 1-1 상황이 유지됐고 승부차기 끝에 상주가 1부리그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손흥민도 ‘VAR 덕’에 새역사 주인공으로
유럽 축구 중심에서 활약하는 손흥민은 소속팀 토트넘에서 새역사를 쓴 이번 2018-2019 시즌 VAR 덕에 가슴을 쓸어 내렸다. 팀 역사상 최초 유럽축구연맹(UEFA) 4강 진출 여부가 걸려있던 지난 4월 17일 맨체스터 시티와의 8강 2차전, 손흥민은 경기 시작 10분 만에 2골을 몰아치며 유럽을 놀라게 했다.
끝까지 최후 승자를 알 수 없던 접전에서 VAR이 결정적 장면을 만들어 냈다. 경기 후반 토트넘과 맨시티가 각각 1골씩을 주고받았다. 하지만 VAR 판독 결과 토트넘은 골을 인정 받았고 맨시티는 골이 취소됐다. 토트넘은 4강에 진출하며 역사를 새로 썼다.
당초 UEFA 챔피언스리그는 2018-2019 시즌 VAR 도입 계획이 없었다. 하지만 조별리그서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오심이 이어졌고 토너먼트부터 급히 VAR을 가동하기 시작했다. UEFA의 빠른 대처가 없었다면 토트넘의 4강 진출은 없던 일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손흥민이 리그에서 VAR 판독을 기다리는 장면을 리그에서는 볼 수 없었다. VAR을 도입한 독일, 스페인, 이탈리아 리그 등과 달리 잉글랜드의 프리미어리그는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그간 도입 계획이 없었지만 챔피언스리그와 마찬가지로 판정 논란이 이어지자 차기 시즌부터 대세를 따르게 됐다.
VAR 판독 과정임을 알리는 전광판. FIFA는 판독과정 현장 공개를 허락하지 않고 있다. 사진=대한축구협회
지난 2018 러시아 월드컵 이후 FIFA는 “판정 정확도가 향상됐다”며 VAR 도입을 자화자찬 한 바 있다. 2019 캐나다 여자 월드컵이 진행 중인 최근에도 이 같은 발표를 했다.
이들의 주장대로 VAR이 많은 오심들을 잡아내고 있지만 여전히 심판 판정에 대한 논란은 지속된다. VAR에 대한 비판이 쏟아진 대표적 사례는 지난 월드컵 포르투갈과 모로코의 경기다. 경기 후 많은 축구 전문가들도 ‘모로코가 이득을 취할 수 있는 장면에선 VAR 판독이 이뤄지지 않았다’는 논평을 내놨다.
심판이 판정을 내리는 과정에서 기계의 도움을 받게 됐지만 결국 최종 결정을 내리는 것은 인간(심판)이다. VAR 판독에 돌입할지, 경기장 위에서 주심이 화면을 직접 확인할지(온 필드 리뷰), 마지막으로 어떤 판정을 내릴지는 모두 심판이 결정한다. 이에 피파가 주장하는 ‘향상된 판정 정확도’도 100%에 이르지는 못한다.
이외에도 VAR 진행 과정에 대한 지적도 이어지고 있다. 각국 리그 규모에 따라 투자 금액이 다르기에 VAR에 동원되는 장비 질에서 격차가 생기는 것이다. 심판 역량 차이도 존재한다. K리그도 심판들의 숙련도가 올라가며 도입 초기보다 VAR 판독 소요 시간이 줄어드는 과정을 경험하고 있다.
또한 현장에서 경기를 지켜보는 관중들은 VAR 판독과 관련해 궁금증을 호소한다. 중계를 보는 시청자는 VAR 판독 과정의 리플레이를 직접 확인할 수 있지만 현장에선 전광판에 ‘VAR 판독중’이라는 문구가 띄워질 뿐이다. 이와 관련해 한국프로축구연맹 관계자는 “FIFA에서 허락하지 않는 부분이다”라며 “VAR이 좀 더 정착되고 안정적으로 운영된다면 언젠가는 전광판에서도 리플레이 화면을 확인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김상래 기자 scourge@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