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축통화 위협 가능성에 “규제 강화” 천명하지만 결국 자산 인정하고 상용화 길 터줄 수밖에
페이스북이 암호화폐 리브라 프로젝트를 발표하자 전 세계 금융당국이 긴장하고 있다. 암호화폐가 법정화폐를 대체하고 기축통화를 위협할 것이라고 우려하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연합뉴스
“페이스북 암호화폐 리브라는 사생활 침해나 돈세탁 창구, 소비자 보호, 금융시장 안정 등 많은 부분에서 심각한 우려를 낳는다. 우려가 해소될 때까지 (프로젝트 계획은) 진전될 수 없다.” 제롬 파월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은 최근 하원 청문회에서 페이스북 리브라에 대해 이 같은 우려를 표했다. 최근 열린 미 상·하원 청문회에서도 페이스북은 프라이버시 침해 등 각종 전력이 있는 만큼 암호화폐 발행을 신뢰할 수 없다는 지적이 나왔다.
‘리브라’는 페이스북이 개발 중인 블록체인 기반 암호화폐다. 앞서 지난 6월 페이스북은 리브라 프로젝트를 공개했다. 소비자들이 내년부터 페이스북, 왓츠앱, 인스타그램 등 운영 플랫폼에서 리브라를 구입하면, 이를 비자·이베이·우버 등 28개 회원사에서 상품과 서비스에 대한 대가로 화폐처럼 사용할 수 있는 서비스를 정식 출시하겠다는 것이다.
미국 대통령과 미 금융당국뿐 아니라 프랑스, 영국, 독일, 일본, 이탈리아, 캐나다 등 주요 7개국 재무장관 및 중앙은행 총재들도 최근 회의에서 리브라를 둘러싼 규제 강화에 의견을 모았다. 한국 금융위원회도 최근 보고서를 내 리브라가 기존 금융 안정성을 저해한다고 지적했다.
세계 금융당국의 이 같은 예민한 반응은 암호화폐 성장이 그만큼 기존 금융권에 위협적이라는 의미다. 각국의 법정통화는 물론 기축통화까지 무력화할 만큼 글로벌 금융 인프라로서 잠재력이 크다는 것을 금융당국이 인정하는 셈이다.
특히 리브라는 스테이블 코인으로 가격 변동성이 적다. 스테이블 코인은 은행에 법정화폐를 넣어두고, 그에 상응하는 가치만큼 발행하는 암호화폐다. 페이스북은 여기에 더해 파운드, 유로, 엔화 등 안정적인 법정통화와 국채 등으로 구성된 적립금·준비금을 만들고, 이에 리브라의 가치를 고정하겠다고 설명했다. 수요만으로 가격이 오르내리며 가치가 변했던 기존 코인들과 달리, 다수 통화로 구성된 은행예금, 미국 국채 등 실물 자산에 연동해 가치를 안정적으로 보장하겠다는 의미다.
프로젝트 참여사들이 다양한 분야에서 대규모 고객 기반을 확보하고 있는 점도 위협적인 이유다. 프로젝트를 이끄는 페이스북 사용자가 24억 명인데다 페이스북이 인수한 왓츠앱과 인스타그램 사용자는 25억 명으로, 세계 인구의 3분의 1이 넘는다. 리브라 연합을 구성한 28개 참여사도 비자·마스터카드부터 온라인쇼핑몰 이베이, 차량공유 우버와 리프트, 통신사 보다폰 등으로 범용성을 확보했다. 이들이 보유한 고객들이 리브라로 각종 금융서비스를 이용할 경우 중앙은행의 통화 가치가 떨어지고 기축통화의 기능도 약화될 수 있다. 신근영 한국블록체인스타트업협회 회장은 “리브라가 나옴으로써 기존 금융권의 통화 조절 기능 자체가 흔들릴 수 있다. 세계 각국이 골머리를 싸매고 있는 이유”라고 분석했다.
페이스북이 암호화폐 리브라 프로젝트를 공개하면서 암호화폐를 둘러싼 논쟁이 활발해지고 있다. 암호화폐 업계에서는 디지털 자산화는 이미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인 만큼, 각종 암호화폐들이 등장해 시장 선점을 위한 경쟁에 돌입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금은 세계 각국의 금융당국이 암호화폐에 대해 견제를 하고 있지만, 결국 거스를 수 없는 흐름 속에 보다 시장을 빠르게 선점하기 위해 암호화폐를 자산으로 인정하고 안정적으로 상용화되도록 제도를 마련하는 등 길을 터줄 것이란 게 업계 분석이다.
실제 글로벌 기업들이 암호화폐 출시를 준비하며 디지털 자산화에 경쟁적으로 뛰어들고 있다. 러시아 텔레그램은 지난해 암호화폐 ‘그램’을 일부 투자자들에게 판매하고 2조 원을 모았다. 네이버 자회사 라인은 싱가포르에서 암호화폐 ‘링크’를 발행했다. 신근영 회장은 “미 정부가 당장은 리브라를 반대하지만, 텔레그램 등 글로벌 기업들이 암호화폐 시장에 적극 뛰어드는 만큼 미국 기업이 시장을 선점해야 한다는 논리로 승인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미국이 아닌 다른 국가들도 암호화폐가 기존 금융체계에서 패권을 쥔 달러 기축통화 체제를 무너뜨릴 수 있다는 데 초점을 둘 가능성이 높다. 박성준 동국대 블록체인연구센터 센터장은 “리브라는 달러뿐 아니라 여러 통화의 가치를 토대로 가치를 산정하는 만큼 기축통화 체제에서 피해 받은 국가들도 리브라의 출현을 반길 것”이라고 봤다. 설사 리브라가 출시되지 못하더라도 법정통화를 대체할 암호화폐는 어떻게든 등장할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신 회장은 “하나둘씩 대기업들이 암호화폐를 발행할 것이고, 중국 등 일부 국가는 금융당국이 민간의 디지털자산을 통제하고자 디지털 화폐를 발행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암호화폐가 활성화하면 좋은 점은 당연 저비용과 편리성이다. 다만 암호화폐가 통용되는 초기에는 마약 및 테러자금으로 활용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개인 정보 유출, 디지털 약자의 소외, 제도화 과정에서 이해관계 충돌에 따른 진통도 수반될 것으로 보인다.
김예린 기자 yeap12@ilyo.co.kr
암호화폐 외면하는 정부 탓에 투자자들 피해 막심 암호화폐의 제도 공백으로 금융피해자들이 더 늘어나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투기성을 완화하고 건전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정부가 암호화폐를 제도권으로 편입시켜야 한다는 제언이 나온다. 지난달 말 회원 3만 명을 거느렸던 한 암호화폐 거래소 대표가 거래가 이뤄지지 않는 가짜 거래소를 차리고 회원 다수를 유치해 470억 원을 횡령한 혐의로 구속 기소됐다. 검찰은 해당 거래소의 파행적인 운영에도 외부에서 이를 파악하고 통제할 수 있는 시스템이 없어 유사한 피해가 일어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업계에서 정부에 암호화폐 제도권화를 촉구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미국 국세청은 지난 5월 암호화폐를 통화가 아닌 자산으로 규정해 수익에 대한 과세기준을 마련하고 있으며, 미 증권거래위원회는 암호화폐를 증권법의 규제 대상으로 규정하고 관리를 본격화했다. 일본 국세청은 암호화폐를 ‘암호자산’으로 정의하고 금융청이 암호화폐 거래소를 주식과 같은 수준으로 관리·감독하도록 의무화하는 법안을 마련했다. 반면 한국에서는 이러한 움직임이 전무한 상황이다. 금융위가 암호화폐 거래소 정의와 신고의무 부과 등을 골자로 한 ‘특정 금융거래정보의 보고 및 이용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입법 추진했으나 국회에서 표류 중이고, 이 외에는 어떠한 움직임도 없는 상태다. 정부가 암호화폐를 투기로 간주할 뿐 정책을 마련하지 않고 방치하는 탓에, 검증되지 않은 암호화폐 거래소들과 투기성 코인이 쏟아져 시장을 혼란스럽게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박성준 동국대 블록체인연구센터 센터장은 “지금은 검증되지 않은 암호화폐 거래소들이 마음대로 코인을 발행해 사기인지를 판단하지 못한 투자자들이 피해를 보고 있다”며 “주식 상장시 적법한 절차를 밟아 신뢰성을 부여하듯, 암호화폐도 거래와 발행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마련해 시장을 안정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예린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