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과 나쁘면 가족 신변도 위협”…2회 우승 강병철부터 ‘노피어’ 로이스터까지
지난 19일 롯데 사령탑 자리에서 내려온 양상문 감독. 연합뉴스
[일요신문] 또 한 명의 감독이 올 시즌을 채 마치지 못하고 유니폼을 벗었다. 양상문(58) 전 롯데 감독이다. 롯데는 전반기 종료 다음날인 7월 19일 “양상문 감독과 이윤원 단장의 자진사퇴 요청을 수용하기로 결정했다”고 발표했다. 롯데는 전반기에 34승 2무 58패(승률 0.370)라는 참담한 성적표를 받아 들었다. 최하위를 좀처럼 벗어나지 못했다. 전반기 막바지에는 수비에서 처참한 실책 릴레이를 펼쳐 10개 구단팬들의 조롱거리가 되기도 했다.
결국 감독과 단장 모두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양 감독은 구단을 통해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응원해주시는 팬 여러분께 좋은 경기를 보여드리지 못해 죄송하다”며 “강한 하나의 팀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으나 기대에 많이 부족했고 책임을 통감한다”고 말했다. 이로써 양 감독은 지난 5월 더그아웃을 떠난 김기태 전 KIA 감독에 이어 올 시즌 도중 지휘봉을 내려놓은 두 번째 사령탑이 됐다. 임기 첫 시즌을 채우지 못하고 물러난 감독은 KBO 리그 역사상 두 번째다.
롯데 구단은 양 감독의 퇴진을 ‘자진사퇴’라고 발표했지만, 야구계에서는 사실상 ‘경질’이라는 시각이 우세하다. 양 감독이 최근까지도 측근들과 머리를 맞대며 팀 체질 개선을 꾸준히 고민해왔고, 롯데가 양 감독의 올 시즌 잔여 연봉을 모두 지급하는 것이 그 근거다.
#‘롯데 통’ 양상문 감독은 왜, 어떻게 떠났나
롯데 감독은 ‘독이 든 성배’와도 같은 자리다. 팬들의 열정과 관심은 전국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로 뜨거운데, 성적과 경기력은 대체적으로 안 좋은 편이기 때문이다. 과거 롯데 감독을 역임했던 한 야구인은 “하루하루 마음이 편치 않았다. 결과가 안 좋을 때는 가족의 신변까지 위협받을 정도로 비난이 거셌고, 결과가 좋을 때도 너무 판이하게 달라진 평가와 찬사에 도리어 씁쓸함을 느껴야 했다”며 “부산 어딜 가도 날 알아보기 때문에 때로는 길 가다 갑자기 받게 되는 격려조차 무겁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고 털어 놓은 적이 있다.
롯데 자체가 감독을 조급하게 만드는 팀이기도 하다. 팬들이 쏘는 비난의 화살은 주로 직접 야구를 하는 선수들보다 벤치에 있는 감독에게 향했고, 구단 수뇌부는 그런 팬들의 반응과 눈앞의 결과에 일희일비하면서 인내심을 보여주지 않았다. 롯데에서 2010년 이후 계약기간을 모두 채운 사령탑은 조원우 전 감독 한 명뿐이고, 그마저도 3년 재계약 첫 시즌이 끝난 뒤 경질됐다. 2015년 지휘봉을 잡았던 이종운 전 감독 역시 단 한 시즌 만에 물러났다.
양 전 감독도 마찬가지다. 그는 부산이 고향이고 선수 생활도 롯데에서 시작했다. 이미 2004년과 2005년에 한 차례 롯데 1군 감독을 역임했고, 이후 2군 감독과 투수코치까지 맡았던 ‘롯데 통’이다. 롯데 못지않게 팬이 많은 LG에서 감독과 단장을 지내면서 산전수전도 다 겪었다. 그런 지도자가 지난해 10월 19일 롯데 18대 사령탑으로 취임한 지 9개월 만에 백기를 들었다.
한 야구인은 양 감독이 자주 그라운드로 달려 나와 불같이 항의하는 장면을 보고 “예전에는 저런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며 의아해 했다. 반드시 감독이 나서야 하는 상황도 물론 많았지만, 때로는 ‘그럴 필요까지 있었을까’ 싶은 시점도 존재했기 때문이다. 외부에서 바라보기엔 감독의 조바심으로 해석될 만했다. 다른 팀 현장 지도자 역시 “(감독을 바라보는) 롯데 내부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고 들었다”고 귀띔하기도 했다.
지난 14일 두산을 상대로 패배한 이후 관중들에게 고개숙여 인사하는 롯데 선수단. 연합뉴스
결국 악순환으로 이어진다. 타 구단이 탐낼 만한 좋은 코치들은 롯데 행을 꺼린다. 코치는 감독과 한 배를 타야 하는 운명인데, 계약 첫 시즌도 채우지 못하고 사령탑을 내보내는 팀에 굳이 몸담을 이유가 없다. 롯데는 수년간 젊은 선수들을 키우려고 애썼지만 전체적으로 성장이 더뎌 애를 먹었다. 그 어느 팀보다 절실하게 각 분야의 우수한 코치들을 필요로 하는 팀이라는 얘기다. 하지만 그런 지도자들은 롯데가 아닌 다른 팀으로 가고 싶어 한다. 위험 부담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밖에서 바라볼 때보다 안에서 파고들 때 더 허술한 팀. 하지만 변화의 의지도, 해법도, 방향성도 좀처럼 찾지 못하는 팀. 그게 현재 롯데에 대한 야구계의 인식이다. 많은 야구인들이 “맞붙기 전에는 전력이 강해 보이지만 막상 붙어 보면 이토록 상대하기 쉬운 팀이 없는 것 같다”고 말하는 이유다.
#롯데 역사에 기념비적인 감독, 박영길과 강병철
롯데는 프로야구 원년인 1982년에 출범한 구단이다. 38년간 총 18번이나 감독을 교체했고, 이제 19번째 감독을 찾아야 할 처지다. 또 다른 원년 구단인 두산(전신 OB 포함) 감독이 총 10명뿐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롯데의 다사다난했던 역사를 짐작할 수 있다.
롯데 초대 사령탑은 박영길 전 감독이다. 경남고와 동아대를 졸업하고 실업 야구 한국전력에서 활약했던 외야수 출신이자 1971년 서울에서 열린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에서 홈런 5개를 때려내 한국을 우승으로 이끈 주역이다. 이승엽 이전에 한국 야구 역대 최고 좌타자로 꼽히기도 했다. 김응용 대한야구소프트볼회장과 함께 ‘좌영길 우응용’이라는 별칭으로 불리면서 한 시대를 풍미했다. 과거 라이벌이었던 김 회장과는 여전히 막역한 친구로 지내고 있다.
박 감독은 1981년 실업리그 롯데 감독으로 부임한 뒤 그 해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이어 1982년 프로야구 출범과 함께 자연스럽게 롯데 초대 감독으로 선임됐다. 부산 야구가 낳은 최고 스타였던 그에게는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정작 롯데 감독으로 지낸 기간은 길지 않았다. 성적 부진으로 취임 2년째인 1983년 7월 중도 사퇴했다.
당시를 기억하는 야구 관계자들은 “박 감독이 최동원을 더 많이 기용했다면 감독을 그만두지 않아도 됐을 것”이라고 평가하곤 했다. 최동원은 불세출의 투수였지만, 학창시절 너무 많은 공을 던져 어깨에 피로가 쌓인 상태로 프로에 왔다. 박 감독은 그런 최동원의 몸 상태를 신경 쓰느라 등판 간격을 철저히 조절했다. 투수 분업화가 이뤄지지 않았던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관리’였다. 어쨌든 박 감독은 두 시즌을 채 채우지 못하고 당시 타격 코치였던 강병철에게 감독 대행을 맡기고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후 삼성과 태평양 감독을 지냈다.
박 감독에게 지휘봉을 물려받은 강병철 감독대행은 이듬해인 1984년 정식 감독으로 취임했다. 이후 역대 롯데 사령탑 가운데 가장 기념비적인 기록을 남긴 상징적 인물로 남게 됐다. 무려 세 차례(1984~1986년, 1991~1993년, 2006~2007년)에 걸쳐 롯데 감독을 맡은 것 자체가 놀라운 일. 무엇보다 롯데가 두 차례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할 때마다 감독석에는 강 감독이 앉아 있었다. 감독 통산 승률은 썩 좋지 않지만, 그를 호의적으로 기억하는 롯데 팬도 많은 이유다.
강 감독은 2대 감독으로 취임한 1984년 곧바로 팀을 첫 한국시리즈 우승으로 이끌었다. 최동원이 전무후무한 한국시리즈 4승 기록을 남긴 바로 그 시즌이다. 하지만 1985년 롯데 구단과 연봉 문제로 오해가 생겨 재계약하지 않았고, 1년 뒤 빙그레(한화의 전신)로 옮겨 코치 생활을 했다.
강 감독은 1991년 다시 롯데 감독으로 복귀했다. 전임 김진영 감독이 1990년 시즌 도중 성적 부진으로 물러나고 일본인인 도위창 감독대행으로 남은 시즌을 마친 롯데가 ‘우승 감독’ 강병철에게 다시 손을 내밀었다. 강 감독은 롯데로 돌아온 지 2년째인 1992년 또 한 번 팀을 한국시리즈 우승으로 이끄는 신화를 썼다. 아직까지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롯데의 귀한 우승이다. 다만 또 한 번 구단 프런트와 갈등을 빚어 문제가 됐고, 1993시즌이 끝나자 스스로 재계약을 거부했다. 동시에 한화 감독으로 자리를 옮겼다. 2000년부터 3년간 당시 신생팀이었던 SK 초대 감독을 지내기도 했다.
그렇게 끝나는 듯했던 강 감독과 롯데의 인연은 다시 한 번 이어졌다. 양상문 감독의 후임으로 2006년 롯데 지휘봉을 다시 잡았다. 한 팀 사령탑을 세 번이나 맡은 것은 KBO 리그 역사에서 강 감독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하지만 결과는 썩 좋지 못했다. 강 감독은 팀을 수렁에서 구하지 못한 채 2년 만에 롯데와 세 번째 작별 인사를 나눴다.
#재계약에 성공한 김용희, 최초 외국인 감독 로이스터
롯데에 3년 이상 머문 감독은 많지 않다. 2대와 6대 감독을 맡았던 강병철을 제외하면, 1대 박영길과 3대 성기영(1987년) 4대 어우홍(1988~1989년) 5대 김진영(1990년) 감독까지 ‘단명’ 릴레이가 이어졌다. 그 사슬을 끊은 인물이 7대 김용희 감독이다. 롯데의 프랜차이즈 스타였던 김 감독은 1994년부터 1998년 6월까지 4시즌 반 동안 팀을 지휘했다.
은퇴 뒤 롯데 코치를 역임했던 그는 강 전 감독이 한화로 떠난 뒤 39세라는 젊은 나이에 사령탑에 올랐다. 향후 차기 감독감으로 꼽히던 인물이긴 했지만, 마흔도 안 된 젊은 감독이라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인사로 통했다. 그는 미국 연수 경험을 살려 ‘자율 야구’라는 개념을 롯데에 도입했고, 투수 분업화도 처음으로 실행에 옮겼다. 실제 효과도 충분히 봤다. 첫 시즌은 6위로 마감했지만, 이듬해 정규시즌 3위로 포스트시즌에 진출해 한국시리즈 무대까지 밟았다.
김 감독은 이 성적 덕분에 1997시즌을 앞두고 재계약에 성공했다. 감독 재계약은 롯데 역사상 최초로 벌어진 일이었다. 하지만 롯데는 1997년과 1998년 주전 선수들의 줄부상과 전열 이탈로 다시 최하위에 머물렀고, 김 감독도 결국 1998시즌을 다 마치지 못하고 물러나야 했다.
김 감독 대신 대행을 맡았던 김명성 코치는 이듬해인 1999년 정식 감독으로 취임하는 데 성공했지만 2001년 시즌 도중 스트레스로 인한 건강 악화로 쓰러졌다. 결국 순위싸움이 한창이던 그해 7월 24일에 세상을 떠나 안타까움을 남겼다.
이후 우용득(2002년) 백인천(2002년 6월~2003년 8월) 감독 등과 짧은 인연을 맺었던 롯데는 또 다시 팀으로 불러들인 양상문·강병철 감독도 팀을 하위권에서 구하지 못하자 대대적인 결단을 내렸다. 2008년 메이저리그 밀워키 사령탑 출신인 제리 로이스터 감독과 3년 계약을 맺어 KBO 리그에 최초로 외국인 사령탑 시대를 열었다.
로이스터 감독은 부임 첫해부터 팀을 정규시즌 3위에 올려놓으면서 롯데에 8년 만의 가을야구를 선사했다. 더그아웃에 있는 흰색 칠판에 ‘노 피어(No Fear)’라는 단어를 적어놓고 선수들에게 두려움 없는 플레이를 독려했고, 선수들과 수평적 관계를 유지하면서 더그아웃에 활기를 불어 넣었다. 롯데가 보여 준 공격적인 야구에 팬들이 열광했고, 사직구장에는 다시 만원 관중이 들어찼다. 그러나 점점 약점도 눈에 띄었다. 지나치게 정면승부를 강조하다 보니, 아시아 야구의 특징인 섬세함과는 점점 거리가 멀어졌다. 특히 ‘내일이 없는’ 포스트시즌에서도 정공법만 추구했다. 롯데는 로이스터 감독이 재임한 3년 내내 포스트시즌에 진출했지만, 한 번도 다음 시리즈로는 올라가지 못했다. 결국 3년 임기를 모두 채운 뒤 재계약은 하지 못했다.
이후 롯데는 양승호(2011~2012년)-김시진(2013~2014년)-이종운(2015년)-조원우(2016~2018년) 감독과 함께하면서 꾸준히 한국시리즈 우승에 도전장을 던졌지만, 1992년의 영광은 아직까지 재현되지 못했다. 공필성 감독대행 체제로 남은 시즌을 치르게 된 올해 역시 롯데의 과제는 포스트시즌 진출이 아닌 최하위 탈출이다.
배영은 일간스포츠 기자
최초 외국인 감독 무산된 롯데 일본인 코치 ‘도위창’ 도위창은 로이스터 이전에 KBO 리그 최초 외국인 감독으로 기록될 뻔했던 인물이다. 그의 본명은 도이 쇼스케(土居章助). ‘도위창’이라는 이름 때문에 재일교포로 잘못 알려지기도 했지만, 한국계가 아닌 순수 일본인이다. 한국식 이름은 롯데에 코치로 부임하면서 스스로 지은 KBO 등록명이다. 1956년부터 1963년까지 일본 프로야구에서 선수로 뛴 도위창은 1975년 한국에 왔다. 한국의 롯데가 실업야구단을 창단하면서 자매구단 격인 일본의 롯데에 코치 파견을 요청했고, 친정팀 롯데에서 코치 생활을 하던 도위창이 한국 파견 코치로 낙점됐다. 이때만 해도 도이 쇼스케라는 본명을 썼다. 1982년 프로야구가 출범하면서 실업야구단 롯데가 해체되자 7년 만에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지만, 1984년 강병철 당시 감독이 도위창에게 다시 영입 제안을 했다. 한국에 애정이 깊었던 도위창은 그 제안을 받아들였고, 스스로 한국식 이름도 만들었다. 도위창은 당시 한국보다 수준이 한참 높았던 일본 프로야구의 타격 기술을 롯데 선수들에게 전수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1986년 강 감독이 자리에서 물러난 뒤에도 한 시즌 더 성기영 감독을 보좌하며 코치 생활을 했고, 1990년에도 다시 한국으로 유턴해 롯데 수석 코치를 맡았다. 바로 그해 롯데 사령탑이었던 김진영 감독이 시즌 도중 성적 부진을 이유로 사퇴했다. 그러자 롯데는 수석 코치였던 도위창을 감독대행으로 임명해 남은 시즌을 치렀다. 시즌이 끝난 뒤에는 여러 면에서 감독에 적합한 장점을 갖고 있던 도위창을 차기 감독으로 앉히려는 계획도 세웠다. 한국어에 능해 코치나 선수들과의 의사소통에도 전혀 문제가 없었다. 다만 국적이 문제였다. 당시만 해도 외국인 감독, 특히 일본인 감독은 구단의 대외적인 이미지에 좋지 않다는 의견이 많았다. 1983년 삼성이 재일교포 이충남을 감독대행으로 앉혔을 때 팬들의 반응이 싸늘했던 점도 고려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롯데는 모험을 포기하고 강병철 전 감독을 다시 선택했다. 도위창으로 더 유명했던 일본인 도이 쇼스케는 얼마 뒤 직접 지은 한국 이름을 내려놓고 일본으로 떠났다. 올해 82세 고령인 그는 지난 2011년 9월 한국에서 방송된 고 최동원 추모 다큐멘터리에 건강한 모습으로 등장해 롯데의 1984년 한국시리즈 우승 당시를 추억하기도 했다. 배영은 일간스포츠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