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영 ‘국민우익수’ 추신수 ‘ML 어깨짱’…류현진 돕는 벨린저·버두고 ‘짜릿’
빠르고 정확한 송구로 팬들에게 새로운 즐거움을 선사하는 LA 다저스 외야수 코디 벨린저. 연합뉴스
[일요신문] 타구가 외야 한복판에 뚝 떨어지면, 2루 주자는 있는 힘껏 달려 홈으로 쇄도한다. 한 점을 얻어내기 위한 혼신의 질주다. 하지만 타구를 낚아 챈 외야수가 짧은 도움닫기를 마친 뒤 강한 어깨로 홈을 향해 공을 뿌리면, 야구장에 있는 모든 이의 시선이 홈플레이트에 쏠린다. 0.01초에 승부가 갈리는 찰나의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몇 초 후 외야수의 정확한 송구가 홈에 도착하고 포수가 그대로 타자를 태그해 주심이 “아웃!”을 외치면, 관중석의 절반은 우레와 같은 환호로 뒤덮인다. 야구에서 가장 손에 땀을 쥐는 상황 가운데 하나로 꼽히고, 외야수에게는 가장 큰 보람을 안기는 바로 그 순간. ‘보살(補殺)’이라는 용어로 통용됐던 ‘외야 어시스트’다.
#외야 어시스트와 강한 어깨의 가치
어시스트는 타자 주자나 주자가 아웃을 당하는 데 기여한 야수에게 주어지는 기록이다. 축구와 농구는 골을 넣기 직전 패스를 연결한 단 한 명의 선수에게만 어시스트를 주지만, 야구는 아웃이 될 수 있도록 송구를 연결하거나 공의 진로를 바꿔 놓은 야수 모두에게 이 기록을 부여한다. 물론 내야수들에게 어시스트 숫자는 큰 의미가 없다. 어차피 땅볼 타구를 잡고 각 베이스로 송구해 아웃카운트를 잡는 게 그들의 주된 임무다. 반대로 주로 플라이 아웃을 처리하는 외야수들의 어시스트 장면은 한 경기에 한 번 보기도 어렵다. 외야수의 능력뿐 아니라 경기 상황도 뒷받침돼야 가능한 기록이라서다.
외야수의 어시스트 기록에 필수 불가결한 요소는 강한 어깨다. 내야수보다 훨씬 먼 거리에서 공을 던져야 하기에 송구 스피드가 빠르면 빠를수록 유리하다. 한국인 메이저리거인 텍사스 추신수는 고교 시절까지 강속구 투수로 활약하다 외야수로 전향했다. 그의 송구 능력은 세계 최고 선수들이 모인 메이저리그에서도 톱클래스로 꼽힌다. 국내 야구팬들이 ‘레이저빔 송구’ ‘어깨 깡패’ ‘택배 송구’ 등의 별명을 붙이기도 했을 정도다. 클리블랜드에서 활약하던 2011년에는 미국의 야구전문지 베이스볼 아메리카가 30개 메이저리그 구단 감독들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에서 ‘최고의 어깨를 가진 외야수’ 1위로 뽑히기도 했다. 늘 이 부문에서 단골로 1위에 올랐던 일본인 외야수 스즈키 이치로까지 넘어선 결과였다.
외야수의 어시스트는 대부분 극적인 상황에서 나오기에 더 짜릿하다. 득점권에 주자가 있는 실점 위기에서 홈으로 쇄도하던 상대 주자의 득점을 직접 막아내는 사례가 가장 많아서다. 지난해 KT에서 은퇴한 이진영이 현역 시절 ‘국민 우익수’라는 별명을 얻게 된 데에는 2006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2라운드 일본전에서 해낸 결정적 어시스트가 한몫했다. 대표적인 강견 외야수였던 그는 0-0으로 맞선 2회 2사 2루서 일본 타자 사토자키 도모야의 우전 안타를 잡아낸 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홈으로 빠르게 송구해 일본의 선취 득점을 봉쇄했다. 어시스트 하나가 경기의 흐름까지 바꿀 수 있다는 점을 보여 준 대표적 명장면이다.
추신수는 클리블랜드에서 활약하던 지난 2011년 메이저리그 30개 구단 감독들이 꼽은 ‘최고의 어깨’에 선정됐다. 사진=이영미 기자
#다저스의 명품 어깨들, 벨린저와 버두고
최근에는 한국 야구팬도 이런 장면을 여러 차례 목격했다. 다만 아쉽게도 KBO 리그 경기가 아니라 한국인 메이저리거 류현진이 뛰고 있는 LA 다저스 경기를 통해서다. 올해 내셔널리그 최우수선수 후보로 꼽히고 있는 다저스 외야수 코디 벨린저는 50홈런에 육박하는 막강한 화력만큼이나 강한 어깨를 앞세운 탄탄한 수비로 인정을 받고 있다.
특히 5월 28일 뉴욕 메츠전에서는 ‘1일 2어시스트’를 해냈다. 0-1로 뒤진 1회 1사 1·2루서 선발클레이튼 커쇼가 토드 프래지어에게 우전 안타를 맞았지만, 벨린저가 곧바로 홈으로 정확하게 송구해 2루 주자를 아웃시켰다. 또 8-5로 쫓기던 7회 1사 만루서는 J.D 데이비스의 우익수 희생플라이를 더블플레이로 둔갑시키는 재주를 부렸다. 데이비스의 타구를 잡아 아웃카운트 한 개가 올라간 직후, 3루로 빠르게 공을 던져 한 베이스 더 진루하려면 2루 주자를 막아냈고 이닝을 끝냈다.
류현진 선발 등판 경기인 지난 6월 5일 애리조나전에서도 인상 깊은 어시스트를 기록했다. 3회 테일러 클라크에게 투수 내야안타를 내준 류현진이 1루로 악송구를 범했고, 클라크는 그 틈을 타 2루까지 내달렸다. 하지만 우익수 벨린저가 공을 잡은 뒤 재빨리 2루로 뿌려 주자를 아예 지워 버렸다.
벨린저만 이런 모습을 보여주는 게 아니다. 심지어 더 총알 같은 송구를 하는 외야수가 다저스에 또 있다. 7월 15일 보스턴 원정 경기. 역시 류현진이 선발 투수였다. 다저스가 4-2로 앞선 5회 2사 1·2루서 J.D 마르티네스가 좌전 안타를 쳤다. 적시타가 될 수 있을 만한 타구. 2루에 있던 주자 라파엘 데버스는 홈으로 전력 질주했다. 하지만 다저스 외야수 알렉스 버두고가 그 득점을 허락하지 않았다. 공을 잡은 뒤 침착하게 홈으로 송구했고, 공은 바운드 없이 다저스 포수 러셀 마틴의 글러브 안에 정확하게 꽂혔다. 데버스가 급하게 헤드 퍼스트 슬라이딩을 시도해봤지만 소용 없었다. 마틴이 곧바로 홈으로 쇄도한 데버스를 태그하면서 다저스는 실점 없이 이닝을 마쳤다. 마운드에 서 있던 선발 투수 류현진도 환한 미소로 버두고에게 박수를 보냈다.
메이저리그 사무국이 공인한 데이터 추적시스템 스탯캐스트에 따르면, 이 홈 송구는 시속 97.1마일(약 156km)로 측정됐다. 이미 버두고는 지난 4월 19일 밀워키전에서 시속 98.4마일(시속 158km)짜리 송구로 올 시즌 다저스 팀 내 최고 기록을 쓰기도 했다. 당시에도 정확한 원바운드 송구로 2루 주자의 홈 득점을 막았다. 고교 시절 시속 90마일대 강속구를 뿌리는 투수였던 그는 현지 언론과 인터뷰에서 “요즘은 100마일을 넘기는 것을 새 목표로 삼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100마일이 넘는 애런 힉스의 송구
물론 다른 팀에는 송구가 더 빠른 외야수도 있다. 뉴욕 양키스 외야수 애런 힉스는 2016년 4월 21일 오클랜드와 홈 경기에서 무려 시속 105.5마일(약 170km)에 달하는 로켓 송구를 해냈다. 양키스가 1-3으로 뒤진 4회 1사 만루서 욘더 알론소의 플라이 타구를 직접 잡은 뒤 강하게 홈으로 던져 홈으로 파고 들던 3루 주자를 태그 아웃시켰다. 타구가 꽤 깊숙하게 날아간 탓에 충분히 희생플라이가 될 만한 상황으로 보였지만, 힉스는 예상을 뛰어 넘는 빠르고 정확한 송구로 실점을 없앴다.
이때 기록된 105.5마일은 스탯캐스트가 송구 측정을 시작한 2015년 4월 이후 최고 기록으로 여전히 남아 있다. 이전까지는 휴스턴 외야수 카를로스 고메스가 기록한 시속 103.1마일(약 166㎞)이 최고였지만, 힉스가 이 기록을 가뿐하게 넘어 버렸다. 힉스는 2015년 9월 31일에도 시속 103.1마일(시속 166km) 송구로 화제를 모은 전력이 있다.
힉스 역시 앞서 언급한 추신수나 버두고처럼 고교 시절까지 시속 150㎞를 넘는 빠른 공을 던지는 투수였다. 외야수로 전향한 뒤에도 강한 어깨의 장점을 고스란히 살려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그 덕분에 올 시즌을 앞두고 양키스와 7년 총액 7000만 달러에 장기 계약을 맺기도 했다.빅리그 통산 타율이 0.236에 불과하지만, 지난 2년간 OPS(출루율+장타율) 0.838을 기록한 점을 인정받았다. 무엇보다 중견수로서의 송구 능력은 장기 계약을 이끌어낸 주된 요인 가운데 하나다. 브라이언 캐시맨 양키스 단장은 “힉스는 선구안과 파워를 겸비한 선수”라며 “특히 중견수로서 송구 능력도 좋아 공수에서 팀을 긍정적으로 이끌 수 있다”고 평가했다.
#KBO 리그의 강견들은 누구?
아쉽게도 KBO 리그에선 ‘강견’ 외야수가 점점 줄어드는 추세다. 무사나 1사 때 3루에 있던 주자가 그리 깊지 않은 외야 플라이에도 득점에 성공하는 모습이 종종 보일 정도다. 외야에서 바운드 없이 포수 미트로 바로 송구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외야수도 손에 꼽을 만큼 적다.
다저스의 벨린저가 올해 만들어 낸 ‘우익수 앞 땅볼’ 역시 국내에서는 2008년 7월 10일 목동구장에서 롯데 카림 가르시아가 기록한 게 마지막이다. 심지어 그는 토종이 아닌 외국인 선수였다. 국내 선수 가운데선 양승관 NC 코치가 삼미 시절인 1982년 해태 김일권의 우전 안타 타구를 잡아 1루에서 아웃시킨 최초의 인물로 알려져 있다. ‘역대급’ 거포로 더 유명했던 심정수도 현대 시절인 2002년 한화 이범호의 우전 안타를 ‘우전 땅볼’로 바꿔버린 진기록을 남겨 놓았다.
물론 강한 어깨가 반드시 많은 어시스트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한 전직 프로야구 감독은 “스피드보다 더 중요한 것은 포수가 잡고 곧바로 주자를 태그할 수 있도록 ‘편한’ 송구를 하는 것이다. 어깨가 그리 좋지 않은 외야수도 어시스트를 할 수 있는 이유”라며 “너무 강하지도, 약하지도 않은 송구의 노련함은 오래 경험해봐야 알 수 있는 부분”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하지만 어깨가 강한 외야수의 존재는 한 베이스 더 가려던 주자를 심리적으로 압박하는 효과까지 발휘한다. 공을 잡은 외야수의 이름을 보고 잠시 멈칫하는 순간, 승부는 끝나고 주자는 발이 묶인다. 과거 심정수, 심재학, 송지만, 박재홍, 임재철, 이진영 등이 그랬고 현역 선수 중에는 김강민(SK) 손아섭, 민병헌(이상 롯데) 나성범(NC) 정수빈(두산) 채은성(LG) 등이 그렇다. 모두 내로라하는 KBO 리그 대표 외야수들이다.
배영은 일간스포츠 기자
투수가 외야에서 만들어낸 극적인 보살 어시스트는 어깨 좋은 외야수의 전매특허다. 만약 시속 150km 강속구를 던지는 투수가 외야에 선다면? 이보다 더 유리할 수는 없다. 실제로 올해 메이저리그에서 39년 만에 외야 어시스트를 기록한 투수가 등장했다. 필라델피아 투수 빈스 벨라스케스(27)다. 벨라스케스는 지난 8월 3일 열린 시카고 화이트삭스와의 홈 경기에서 연장 13회말 1루 대주자로 교체 출장한 뒤 연장 14회초 좌익수 자리에 투입됐다. 3-3 동점 상태로 연장전이 길어지자 투수 7명을 모두 소진한 필라델피아가 중견수 로만 퀸을 마운드에 올려야 했고, 이 과정에서 좌익수 아담 헤이슬리가 중견수로 이동하면서 좌익수 자리가 비었기 때문이다. 결국 경기 이틀 전 선발등판해 휴식을 취하고 있던 벨라스케스가 좌익수를 맡아야 하는 상황이 됐다. 하지만 걱정도 잠시. 벨라스케스는 기대 이상의 활약으로 기나긴 경기에 지친 홈 팬들의 눈을 사로잡았다. 1사 2루서 화이트삭스 제임스 매켄이 좌전 안타를 때려내자 타구를 잡은 벨라스케스가 홈까지 원바운드로 정확하게 송구해 득점을 시도하던 2루 주자를 아웃시킨 것이다. 1980년 9월 11일 LA 다저스 투수 바비 카스티요가 휴스턴전에서 기록한 이후 39년 만에 처음으로 나온 투수의 어시스트 기록이었다. 메이저리그 공식 홈페이지 MLB닷컴에 따르면, 이 송구의 속도는 시속 94.7마일(약 152km)로 측정됐다. 벨라스케스의 올 시즌 직구 평균 구속(시속 94.5마일)보다 빠른 속도였다. 관중의 폭발적인 환호가 쏟아지자 벨라스케스는 한 손을 들어 화답하기도 했다. 이뿐만 아니다. 벨라스케스는 화이트삭스가 4-3으로 앞선 연장 15회초 2사 1·2루서 엘로이 히메네스의 날카로운 안타성 타구를 다이빙 캐치로 잡아내 이닝을 끝냈다. 메이저리그 공식 데이터 추적시스템인 스탯캐스트는 “외야수가 잡아낼 확률이 15%밖에 안 되는 타구였다”고 했다. 다만 필라델피아는 연장 15회말 끝내 점수를 뽑지 못해 그대로 패했다. 벨라스케스의 외야 수비쇼도 빛이 바랬다. 배영은 일간스포츠 기자 |
퍼펙트게임 만든 ‘9회말 2사 후 우익수 앞 땅볼’ 외야수의 강한 어깨는 투수의 퍼펙트게임을 완성할 수도 있다. 6년 전 일본 고교야구에서 바로 그런 장면이 나왔다. 2013년 7월 25일 열린 제95회 일본 고교야구선수권대회(여름 고시엔대회) 사이타마 예선 8강전. 우라와 학원 2학년에 재학 중이던 17세 왼손 투수 오지마 가즈야는 헤이세이 고교를 상대로 9이닝 동안 안타와 4사구를 단 하나도 내주지 않고 무실점으로 틀어 막는 완벽한 피칭을 했다. 사이타마 대회 사상 네 번째이자 1990년 이후 23년 만에 나온 퍼펙트게임이었다. 오지마는 당시 키가 175cm로 투수로는 작은 편이었고,직구 최고 구속도 시속 136km에 불과했다.하지만 1학년 때부터 팀 에이스로 활약할 만큼 제구력과 경기운영능력이 탁월했다. 이미 봄 고시엔 대회 5경기에 모두 선발 등판해 42이닝 동안 3점만 내주는 맹활약을 했고, 여름 대회에서는 퍼펙트게임까지 달성하며 기세를 올렸다. 고교야구 인기가 높은 일본에서 일약 전국구 인기 스타로 떠오르기에 충분했다. 바로 그 대기록에 드라마틱한 마침표를 찍은 마지막 아웃이 ‘우익수 앞 땅볼’이었다. 오지마는 퍼펙트게임까지 아웃카운트 단 한 개를 남긴 9회 2사 후, 이 경기 27번째 타자에게 1루와 2루 사이를 꿰뚫는 안타성 타구를 맞았다. 퍼펙트게임은 물론이고, 노히트노런까지 동시에 무산되는 듯했다. 그러나 하늘과 우익수의 도움이 뒤따랐다. 전진 수비를 하고 있던 우익수가 빠르게 앞으로 달려와 타구를 잡아낸 뒤 곧바로 1루를 향해 강하고 정확한 송구를 했다. 화들짝 놀란 타자 주자가 1루에 슬라이딩을 해봤지만, 간발의 차로 아웃. 프로 경기에서도 보기 드문 ‘우전 땅볼’로 퍼펙트게임이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오지마는 경기가 끝난 뒤 우익수와 하이파이브를 하며 잠시 즐거움을 만끽했다. 하지만 정작 인터뷰 때는 “마지막 타자에게도 평상시와 똑같은 마음으로 공을 던졌다. 다음 경기가 있기 때문에 퍼펙트게임 같은 기록에 흔들리면 안 된다”는 고교생답지 않은 소감을 남겨 한 번 더 화제를 모았다. 배영은 일간스포츠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