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O에서 트레이드가 어려운 이유…역대 톱스타 트레이드는?
송은범과의 트레이드로 이제는 한화 유니폼을 입게된 투수 신정락. 연합뉴스
[일요신문] 2019시즌 KBO 리그 트레이드 시장이 7월 31일을 끝으로 문을 닫았다. 지난 3년 동안 매번 트레이드 마감 직전 ‘깜짝 빅딜’이 발표되곤 했지만, 올해는 별다른 소식 없이 조용하게 하루가 지나갔다.
사실 올해처럼 상위권 팀들과 하위권 팀들의 격차가 큰 시즌은 트레이드의 적기로 꼽힌다. 포스트시즌을 위해 당장 ‘원 포인트’ 전력 보강이 필요한 상위권 팀들과 새 판을 짜서 리빌딩을 하고 싶어 하는 하위권 팀들의 이해관계가 정확하게 맞물릴 수 있어서다. 실제로 올해는 그 어느 시즌보다 많은 구단이 활발하게 트레이드 논의를 한 것으로 알려졌고, 일부 팀들은 공개적으로 “우리 팀은 트레이드에 열려 있다”는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복수의 감독들 역시 “몇몇 팀들과 카드를 맞춰 보면서 공을 들였다”고 인정했다. 하지만 결국 카드나 조건을 맞추는 데 실패해 대부분의 트레이드 논의가 무위에 그쳤다. 시도는 풍년이었지만, 성사는 여전히 가뭄이었다.
#송은범-신정락 트레이드가 최고 빅딜
올 시즌 가장 눈길을 끈 트레이드는 가장 최근에 나왔다. 후반기 첫 3연전 마지막 날인 지난 28일 LG와 한화가 사이드암 투수 신정락(32)과 베테랑 투수 송은범(35)을 맞바꿨다. 꾸준히 5강 내 자리 잡고 있는 LG는 한국시리즈 우승을 세 차례 경험하고 아시안게임 국가대표로도 활약한 송은범의 경험을 원했다. 반면 하위권으로 처진 한화는 팀 마운드에 부족한 사이드암 투수를 영입해 불펜 다양화를 꾀하고자 했다. 천안 북일고를 졸업한 신정락은 한화 연고지역 출신 투수이기도 하다.
사실 한화가 송은범을 트레이드 시장에 내놨다는 소문은 이미 야구계에 파다했다. 스스로도 트레이드 성사 직후 “이미 이런저런 얘기를 많이 들어서 놀랍지 않았다”고 말했을 정도다. 실제로 양 팀은 약 한 달 전부터 트레이드 논의를 진행했다. 한화가 LG에 신정락 영입 의사를 전했고, 한때 다른 선수들까지 포함된 대형 트레이드까지 추진됐다가 최종 무산됐다. 그러나 시즌 내내 LG 불펜 필승조로 맹활약하던 신인 투수 정우영이 어깨 부상으로 이탈하면서 양 팀의 트레이드 논의가 다시 급물살을 탔다. 지난 시즌에도 핵심 불펜 투수의 이탈로 어려운 후반기를 보냈던 LG는 결국 다시 한화에 신정락 카드를 제시하고 송은범을 얻어왔다.
LG 입장에선 올 시즌 세 번째 트레이드다. 지난 1월에는 타자 문선재를 KIA에 주고 왼손 투수 정용운을 받아왔다. 3월에는 키움과 사인 앤드 트레이드 방식으로 프리에이전트(FA) 내야수 김민성을 영입해 3루를 보강했다. 이번엔 송은범까지 호출해 확실하게 포스트시즌 대비를 시작했다. 트레이드가 번번이 불발됐던 한화 입장에서도 가장 원했던 투수를 얻게 됐으니 밑질 것 없는 장사다. 올스타 브레이크 직후 성사된 이 1대1 트레이드는 결국 올 시즌의 마지막 ‘거래’로 남게 됐다.
#KBO 리그에서 트레이드가 어려운 이유
사실 메이저리그에서는 이 시기에 가장 활발하게 트레이드가 이뤄진다. 월드시리즈 우승을 노리는 팀들이 리빌딩을 원하는 팀에 좋은 유망주를 내주고 주전급 스타 선수를 데려오곤 한다. 상대적으로 KBO 리그는 트레이드에 소극적이다.
이유가 있다. 메이저리그는 총 30개 구단이 양대 리그로 나뉘어 경쟁하고, 한 리그 안에서도 5개 팀씩 3개 지구로 분류된다. 하지만 KBO 리그는 10개 구단이 단일 리그를 치르는 데다, 5위 안에만 들면 포스트시즌 진출 티켓을 따낼 수 있는 구조다. 하위권 팀들도 쉽게 시즌을 포기하기 어렵고, 트레이드로 보낸 선수가 맹활약할 때 더 큰 후폭풍을 맞게 된다. 실제로 대부분의 단장이 가장 걱정하는 부작용이 바로 그 ‘부메랑 효과’다.
이 때문에 팀의 간판급 선수를 과감하게 내놓는 구단은 찾아보기 어렵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가리지 않고 팬들의 입김이 거세진 터라 점점 트레이드로 모험을 하기가 부담스러워진다. 수도권 한 구단은 본의 아니게 트레이드 상대팀에 ‘좋은 일’을 많이 했다가 10개 구단 팬들의 놀림감이 됐다. 남들에게는 우스갯소리지만, 구단 관계자들에게는 엄청난 스트레스다. 트레이드에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게 된다.
한 야구 관계자는 “예전에는 트레이드가 선수들에게 다른 길을 열어주는 의미로 주로 사용됐다면, 요즘에는 구단 간의 이해관계가 더 많이 좌우된다”고 귀띔했다. 실무자들끼리 트레이드 카드를 어렵게 맞춰 합의까지 하더라도, 감독과 프런트 고위 관계자들과의 최종 결정 과정에서 의견 차가 생겨 무산되는 일이 적지 않아서다. 한 프로야구 감독은 “트레이드가 쉽지 않은 이유는 서로 너무 손해를 보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이라며 “마음에 드는 선수를 데려오고 싶다면 어느 정도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데, 안전하게 하려고 이것저것 따지다가 흐지부지된다”고 했다.
트레이드는 분명히 리그 전체에 선순환 효과를 불러온다. 그러나 정작 패를 던질 판은 잘 벌어지지 않는다. 앞서 언급한 이유로 많은 구단이 트레이드에 있어서만큼은 여전히 문을 절반만 열어 놓기 때문이다. 또 다른 구단 관계자는 “아무리 공평하게 저울질을 해 카드를 맞춰도 급해서 먼저 손을 내민 쪽이 손해를 볼 수밖에 없다”며 “현재 우리 팀에서는 경기에 많이 못 나가더라도, 다른 팀에 가서 잘 할 가능성이 높은 선수를 달라고 하면 망설이게 된다”고 했다. 그래서 많은 팀이 마지막 순간까지 장고를 거듭하고, 많은 트레이드가 성사 직전에 무산된다. 무엇보다 트레이드는 보안이 생명이다. 밖으로 새어나가는 순간, 아무리 ‘윈윈’ 가능성이 높은 트레이드라도 백지화될 때가 많다.
#역대급 톱스타 트레이드, 어떤 게 있었나
오히려 팬덤의 압박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롭던 과거에는 초대형 트레이드가 더 잦았다. 야구팬들을 충격 속으로 몰아넣은 매머드급 트레이드는 1988년 ‘사건’이 시초로 꼽힌다. 시즌이 끝난 11월 22일 롯데가 최동원, 오명록, 김성현을 삼성으로 보내고 삼성이 김시진, 전용권, 오대석, 허규옥을 롯데에 내주는 3 대 4 트레이드가 발표됐다. 롯데(최동원)와 삼성(김시진)을 상징해온 프랜차이즈 스타들의 교환에 야구계가 그야말로 발칵 뒤집혔다. 인터넷이 활성화된 2000년대 이후였다면, 팬들의 반발이 어느 정도였을지 짐작조차 하기 어렵다.
이게 끝이 아니었다. 12월 20일에 양 팀이 또 한 번 블록버스터급 트레이드를 성사시켰다. 롯데가 내야수 김용철과 투수 이문한, 삼성이 외야수 장효조와 투수 장태수를 맞바꿨다. 불과 한 달 사이에 양 팀 선수 11명이 대구에서 부산으로, 그리고 부산에서 대구로 이동하게 됐다.
여기엔 배경이 있었다. 이들 가운데 대부분이 선수 노동조합 결성과 연봉 협상 과정에서 구단과 큰 마찰을 빚은 인물들이었다. 당시만 해도 팬들의 입김이 세지 않고 구단의 뜻이 선수단 운영에 절대적인 힘을 발휘하던 시기다. 구단은 본보기 삼아 칼을 빼들었고, 말을 듣지 않는 베테랑 선수들을 ‘정리’했다.
1993년 성사된 해태 한대화와 신동수, LG 김상훈과 이병훈의 2 대 2 트레이드도 ‘빅딜’로 꼽힌다. 한대화는 1986년 해태 이적 후 여섯 차례나 팀의 우승을 앞장서 이끌었던 중심타자였고 김상훈은 ‘미스터 LG’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팀의 간판 스타였다. LG는 해결사를, 해태는 강한 왼손타자를 각각 원했기에 성사된 트레이드였다. 결과는 LG의 완승. 한대화는 이듬해 LG의 두 번째 한국시리즈 우승에 큰 몫을 해냈지만, 김상훈은 이적 후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다.
1998시즌이 끝난 뒤 이뤄진 삼성 양준혁과 해태 임창용의 트레이드도 큰 충격을 안겼다. 당시 번번이 한국시리즈 우승 문턱에서 좌절해 한 번도 우승컵을 들어 올리지 못했던 삼성은 결국 마운드 강화를 위해 양준혁, 곽채진, 황두성을 내주고 해태 사이드암 임창용을 영입하는 결단을 내렸다. 그런데 고향팀 삼성에 대한 애착이 남달랐던 양준혁이 거세게 반발했다. 다른 팀으로 가느니 해외진출을 하겠다며 저항했다. 해태 김응용 감독이 “1년만 뛰면 다른 팀에 보내주겠다”는 약속을 한 후에야 울며 겨자 먹기로 광주에 둥지를 틀었지만, 이후 양준혁은 “힘없는 선수들의 권익을 보호할 필요가 있다”며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 결성을 주도했다. 그 여파로 2000년 LG로 다시 트레이드됐고, 2001년 FA 자격을 얻은 뒤에야 친정팀으로 돌아와 끝내 삼성에서 은퇴했다.
#트레이드를 둘러싼 발상의 전환
한때는 트레이드를 날벼락으로 여기는 선수들이 많았다. 트레이드 특성상 발표 직전까지는 절대 외부에 새어나가지 않도록 비밀을 지키는 게 필수. 당사자에게도 모든 과정이 끝나야 통보를 한다. 당연히 선수들은 놀랐고, 좌절했다. ‘팀이 나를 버렸다’고 생각해서다. 그러나 최근에는 ‘새 소속팀에서 나를 선택했다’는 발상의 전환이 이뤄지고 있다. 선수층이 너무 두꺼운 팀에서 뛰어서 좀처럼 자리가 없거나 팀 내 불화에 시달리는 일부 선수들은 스스로 구단에 트레이드를 요청하기도 한다.
사상 최초이자 역대 유일한 ‘무상 트레이드’가 바로 그랬다. LG는 1992시즌을 앞두고 간판스타 김재박을 태평양으로 보내면서 선수는 물론 돈 한 푼도 받지 않았다. 사연이 있어서다. LG는 당시 38세가 된 김재박이 은퇴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김재박은 300도루(당시 -26개)와 1000안타(당시 -89개)에 미련이 남아 선수 생활을 더 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LG는 결국 김재박을 조건 없이 태평양으로 보내주는 ‘아름다운 이별’을 택했다. 김재박은 1년 더 뛰면서 별다른 활약 없이 은퇴했지만, 태평양에서 코치로 자리 잡은 뒤 후신인 현대의 초대 감독으로 부임했다.
반대로 트레이드는 성사됐으나 선수를 받지 못한 비운의 팀도 있다. 현대는 1996년 말 이희성과 최광훈을 삼성으로 보내고 베테랑 내야수 강기웅을 영입하는 트레이드를 진행했다. 그러나 삼성의 프랜차이즈 스타였던 강기웅은 “삼성이 아닌 다른 팀에서 뛰지 않겠다”며 돌연 은퇴를 선언했다. 현대는 졸지에 선수 두 명을 그냥 삼성으로 보낸 꼴이 됐다.
LG 장원삼은 과거 사상 최초로 트레이드가 무산돼 친정팀으로 돌아오는 해프닝도 겪었다. 당시 장원삼의 소속팀이던 키움은 삼성 박성훈과 장원삼의 1 대 1 트레이드를 발표했고, 장원삼은 대구로 내려가 등번호 13번이 찍힌 유니폼까지 받았다. 그러나 나머지 구단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힌 KBO가 일주일 뒤 총재 직권으로 트레이드 승인을 거부했다. 장원삼은 일주일 만에 다시 키움으로 복귀했고, 1년 뒤에야 삼성 유니폼을 입을 수 있게 됐다.
배영은 일간스포츠 기자
‘아슬아슬’ 마감일 임박 빅딜의 역사 트레이드 마감일 직전의 ‘빅딜’은 언제나 관심을 모은다. 절박한 상황에서 진행하는 트레이드라 대부분 이름값 높은 선수들이 팀을 옮기는 경우가 많아서다. 1998년 트레이드 마감일에 LG에서 현대로 이적한 내야수 박종호가 그랬고, 1999년 시장이 문을 닫기 직전 두산에서 삼성으로 유니폼을 갈아입은 포수 진갑용이 그랬다. 키움 거포 박병호는 마감일에 트레이드가 성사된 대표적인 스타 중 한명이다. 연합뉴스 키움과 LG가 2011년 7월 31일 극적으로 성사시킨 2대2 트레이드도 대표적 사례다. 키움은 베테랑 불펜 요원 송신영과 선발 유망주 김성현을 LG에 내주고 ‘미완의 거포’ 박병호와 투수 심수창을 데려왔다. 트레이드 당시에는 오히려 키움이 손해라는 평가가 나왔다. 불펜 불안에 시달리던 LG가 수준급 불펜 요원을 수혈한 반면, 박병호는 LG에서 수없이 많은 기회를 얻고도 늘 별다른 결과물을 보여 주지 못했던 선수였다. 그러나 이후 상황은 잘 알려진 대로다. 박병호는 이적 직후 붙박이 주전으로 뛰기 시작하면서 잠재력을 폭발시켰다. 이듬해인 2012년부터 메이저리그로 떠나기 전까지 4년 연속 홈런왕과 타점왕을 석권했고, 2018년 KBO 리그로 복귀한 뒤에도 변함없이 리그 간판타자로 군림하고 있다. 2016년부터는 3년 연속 7월 31일에 극적 트레이드가 이뤄져 눈길을 끌었다. 2016년에는 SK와 KIA가 투수 고효준과 임준혁을 주고 받았다. 고효준은 2017년 KIA의 통합 우승에 힘을 보태는 활약을 했지만, 이준혁은 2018시즌을 끝으로 웨이버 공시됐다. 2017년 트레이드 마감일에는 확실한 ‘윈윈’ 트레이드가 성사됐다. KIA는 2016년 세이브 1위에 오른 투수 김세현과 발 빠른 외야수 유재신을 데려 오면서 키움에 신인 왼손투수 이승호와 또 다른 왼손 투수 손동욱을 보냈다. 결과도 둘 다 좋았다. 김세현은 KIA 유니폼을 입자마자 불펜 필승조로 투입돼 우승의 주역 중 한 명으로 활약했다. KIA의 트레이드 목적에 정확하게 부합하는 활약이었다. 그리고 키움은 그 트레이드의 결실을 올 시즌 톡톡히 보고 있다. 이승호는 지난 시즌 후반기부터 선발 수업을 받은 뒤 올해 키움 선발진의 한 축으로 자리를 잡았다. 키움 마운드의 ‘영 건’들 가운데서도 대표주자로 꼽힌다. 지난해 7월 31일에는 SK와 LG가 극적으로 ‘마감 직전 거래’를 단행했다. SK가 오른손 투수 문광은을 LG에 내주고, LG에서 내야수 강승호를 받아왔다. 이 트레이드의 명암은 한 해 차로 엇갈렸다. 첫 해인 지난 시즌에는 강승호가 SK의 한국시리즈 우승에 힘을 보태면서 무게중심이 SK 쪽으로 기우는 듯했다. 문광은이 불펜에서 기대했던 역할을 해내지 못했기에 더 그랬다. 하지만 올해는 반대다. 강승호가 음주운전 사고로 임의탈퇴 중징계를 받은 반면, 문광은은 5월부터 1군에 올라와 LG 불펜의 핵심 멤버로 활약하고 있다. [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