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산 때 곁에 있어본 적이 없다”…선수 복지 위해 올 시즌 신설
첫 도입된 경조사 휴가를 가장 먼저 사용한 KIA 내야수 안치홍. 박정훈 기자
[일요신문] 최근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이 세계 최초로 도입한 제도는 무엇인가’라는 문제가 출제된 적이 있다. 정답은 놀랍게도 ‘남편의 출산 휴가’였다. 실제로 세종대왕은 종전 7일에 불과하던 관노비들의 산후 휴가를 100일로 늘리고, 추가로 산전 휴가 30일까지 쓰게 해 여성 노비들의 출산 전후 사망률을 현저히 줄인 인물로 평가받는다. 무엇보다 아내의 몸조리 때 곁에서 돌볼 사람이 필요하다는 판단 아래 남편에게도 30일간의 산후 출산 휴가를 줬다. 실제로 세종실록 64권에는 세종 16년 4월 26일 ‘사역인의 아내가 아이를 낳으면 그 남편도 만 삼십일 뒤에 구실을 하게 하라’고 명한 기록이 남아 있다.
세종대왕은 이렇게 조선시대부터 남편의 출산 휴가에 대한 필요성을 인식하고 적극 권장했지만, 21세기에 접어든 한국 사회에선 여전히 보편화된 문화가 아니다. 심지어 야구계는 그동안 이런 복지에서 몇 발 더 뒤처져 있던 게 사실이다. 불과 수 년 전까지만 해도 프로야구 감독이나 코치, 선수가 시즌 중 가정사로 경기장을 비우는 것은 ‘직무 유기’로 여겨졌을 정도다.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둔 한 베테랑 선수는 “단 한 번도 아내가 출산할 때 곁에 있어본 적이 없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하지만 올해부터는 확실히 달라졌다. 한국 프로야구 출범 38년 만에 처음으로 선수 복지를 위한 ‘경조사 휴가’가 신설된 덕분이다. 이 제도로 인해 누군가는 갓 태어난 딸을 곧바로 품에 안을 수 있었고, 누군가는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마지막 길을 지켰다. 조금씩 선진화하고 있는 KBO 리그 문화에서 가장 의미 있는 발걸음 중 하나다.
#경조사 휴가 제도의 도입과 정착
새로 도입된 KBO 경조사 휴가 규정에 따라 올해부터는 선수가 직계 가족 사망 또는 자녀 출생을 사유로 5일의 경조 휴가를 신청할 수 있다. 이때 해당 선수의 엔트리 등록은 말소되고 그 자리를 다른 선수가 대체할 수 있다. 원래는 한 번 1군 엔트리에서 제외되면 최소한 열흘이 지나야 1군에 복귀할 수 있지만, 경조 휴가자는 휴가가 끝나는 즉시 복귀가 가능하다.
또 이 휴가 기간도 1군 등록 일수로 인정받는다. 일반 회사원의 유급 휴가와 같은 개념이다. 프로야구 선수는 근로자가 아닌 개인사업자이기 때문에 그동안 근로기준법에 명시된 경조 휴가를 보장받기 어려웠다. 하지만 KBO에 공식적으로 이 제도가 도입되면서 연봉 협상이나 프리에이전트(FA) 취득 자격 등에 영향을 받는 1군 등록 일수를 손해보지 않게 됐다.
사실 메이저리그는 이미 한국보다 9년 앞선 2011년부터 경조사 휴가 제도를 만들어 운영해왔다. 출산 휴가는 최소 하루에서 최대 3일까지 사용할 수 있고, 조의 휴가는 최소 3일에서 최대 7일까지 허용한다. 롯데 이대호도 메이저리그 시애틀 소속이었던 2016년 시범경기 기간에 아들이 태어나 출산 휴가를 떠난 경험이 있다.
한국의 SK와 일본의 니혼햄, 메이저리그의 캔자스시티에서 모두 감독 경험이 있는 트레이힐만 마이애미 코치는 이런 이유로 “한국과 일본에서 지도자 생활을 하면서 코치들이나 선수들이 출산 휴가를 가지 않는 것에 놀랐다”며 “내 아이가 태어나는 건 인생에서 가장 놀라운 경험이다. 그런 순간은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 꼭 함께 해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실제로 한국뿐 아니라 일본도 오랜 기간 경조사로 인한 휴가를 용납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이름값 높은 거물 감독들이 앞장서 그렇게 했다. 호시노 센이치 전 한신 감독은 2003시즌 막바지에 모친상을 당하고도 팀의 우승이 먼저라는 생각에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을 정도다. 한신이 18년 만에 센트럴리그 우승을 차지한 뒤에야 어머니의 사망 소식을 외부에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주니치 사령탑이던 1997년에는 부인이 암으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구단에 알리지 않은 채 경기에 나섰는데, 일본 언론과 팬들은 그에게 “남자답다”며 박수를 보냈다는 후문이다. 일본의 이런 문화 속에 야구를 해온 시애틀 투수 기쿠치 유세이는 지난 4월 1일 부친상을 당했지만, 스스로 일본에 돌아가지 않고 미국에 남아 선발 등판을 준비하기도 했다.
반면 메이저리그의 문화는 분위기가 확연히 다르다. 2013년 6월 로빈 벤투라 시카고 화이트삭스 감독과 마크 페런트 수석코치가 각각 딸과 아들의 학교 졸업식에 참석하느라 나란히 이틀간 자리를 비웠는데도 구단이 흔쾌히 용인했다. 돈 쿠퍼 투수코치가 감독대행을 맡아 두 경기를 지휘했다. 한국에서라면 상상도 하기 어려운 일이다.
물론 처음부터 모두가 두 팔 벌려 환영한 것은 아니다. 경조사 휴가 도입 첫 해인 2011년 뉴욕 메츠 내야수 대니얼 머피가 출산 휴가를 사용했다가 지역 스포츠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비난을 받는 일도 벌어졌다. “몸값 수백만 달러를 받는 스포츠 스타들이 출산 휴가를 사용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 오프 시즌 때 아기를 낳도록 미리 계획을 세워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북미 4대 프로스포츠 가운데 야구만 육아 휴가 제도를 두고 있기에 더 그랬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경조사 휴가는 자연스러운 문화로 받아들여졌다. 2018년에는 보스턴 마무리 투수 크레이그 킴브럴이 딸 리디아의 출산과 심장 수술로 스프링캠프 대부분을 함께하지 못했지만, 동료들이 시범경기에 ‘힘내 리디아’라는 문구가 적힌 티셔츠를 맞춰 입고 뛰면서 한 마음으로 응원을 보냈다. 그렇게 팀워크를 다진 ‘스타 군단’ 보스턴은 그 해 월드시리즈에서 우승했다.
슬하에 1남 1녀를 둔 강민호는 자녀가 탄생하는 과정에서 경조사 휴가의 유무를 모두 경험했다. 연합뉴스
#안치홍과 최채흥 그리고 강민호의 사연
KBO 리그에서 경조사 휴가를 가장 먼저 사용한 선수는 KIA 내야수 안치홍이다. KIA가 지난 4월 24일 잠실 LG전에 앞서 핵심 선수인 안치홍의 1군 등록을 갑자기 말소하자 많은 이가 이유를 궁금해했다. 안치홍처럼 주전으로 확고히 자리 잡은 선수가 큰 부상이나 부진 없이 갑자기 1군에서 빠지는 상황이 흔치 않아서다. 하지만 곧 진짜 이유가 밝혀졌고, 안치홍에게는 축하 인사가 쏟아졌다. 2017년 12월 결혼한 안치홍이 1년 5개월 만에 첫 딸을 얻은 것이다.
안치홍은 23일 경기 후 아내의 출산을 보기 위해 잠실에서 광주로 급히 이동했고, 결국 24일 첫 딸이 태어나는 순간을 직접 함께하는 기쁨을 누렸다. 당시 KIA는 팀 성적이 최하위권으로 처져 고전하고 있었지만, 안치홍의 경조사 휴가를 기꺼이 허락했다. 가족 곁에서 하루를 보낸 안치홍은 25일 다시 서울로 올라와 곧바로 1군 엔트리에 재등록됐고, 무사히 경기에 나섰다. KBO 리그의 달라진 환경을 보여주는 신호탄이었다.
두 번째로 휴가를 얻은 선수는 삼성 왼손 투수 최채흥이었다. 안타깝게도 최채흥은 지난 7월 4일 아버지를 잃었다. 수원에서 KT전을 준비하다 예기치 못한 부고를 듣고 부랴부랴 구단에 휴가를 신청한 뒤 장례를 치르기 위해 경주로 향했다. 불과 몇 년 전이었다면 하루나 이틀 정도 상가를 지킨 뒤 팀에 복귀했어야 할 상황이다. 하지만 최채흥은 규정에 따라 닷새 동안 아버지의 장례 절차를 마무리하고 마음을 추스를 수 있는 시간을 얻었다. 삼성 구단은 최채흥의 심리적 안정을 위해 원래 휴가 기간보다 5일을 더 쉴 수 있도록 배려했다. 이후 팀에 돌아온 최채흥은 한동안 마운드에서 부침을 겪었지만, 8월 24일 대구 키움전에서 마침내 부친상 이후 첫 승리를 따냈다. 그는 “항상 마운드에 올라올 때마다 아버지를 향해 ‘지켜봐 주시고 도와달라’는 기도를 한다”며 “아버지께서 이 승리를 기뻐하셨으면 좋겠다”고 말해 주위를 뭉클하게 했다.
불과 4년 전인 2015년만 해도 롯데 손아섭이 위독한 아버지 곁을 지키기 위해 휴가를 신청했다가 구단에 의해 반려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당시 손아섭은 7월 14~16일 한화와의 청주 원정을 앞두고 “투병 중인 아버지가 곧 돌아가실 수도 있다”며 부산에 머물고 싶다고 요청했지만, 구단이 “일단 이번 3연전까지는 소화하자”고 만류해 결국 청주행 버스에 올랐다. 불행 중 다행으로 손아섭의 부친은 아들이 청주 원정에서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가 17일 눈을 감았다. 손아섭도 임종 직전 아버지 곁에 도착해 마지막 순간을 지키지 못하는 더 큰 불행은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사실이 외부에 알려지면서 롯데 구단과 당시 사령탑은 큰 비난을 받았다. 선수들의 기본적 복지 문제가 다시 한 번 수면 위로 떠오른 계기였다.
삼성 강민호는 신설된 규정으로 인한 변화를 몸소 체험한 대표적 선수다. 그는 롯데 소속이던 지난 2017년 6월 23일 아내 신소연 씨와의 사이에서 첫 딸을 얻었다. 하지만 경조사 휴가가 없던 터라 하루 사이 수원→부산→잠실을 오가는 고된 일정을 소화해야 했다. 출산 전날인 22일 수원 KT전을 마치고 밤늦게 숙소로 돌아갔다가 아내의 진통이 시작됐다는 소식을 들었고, 곧바로 부산으로 내려가 그 곁을 지켰다. 이어 밤을 꼬박 새운 채 딸이 태어나는 모습을 지켜본 뒤 갓 태어난 아기를 품에 안아보기가 무섭게 다시 서울행 기차에 올랐다. 기차가 오후 4시50분에 부산을 떠난 터라 강민호가 잠실구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두산전이 시작한 뒤였다.
엔트리에 포수가 두 명뿐이었던 롯데는 이날 강민호가 도착하기 전까지 선발 포수 김사훈이 행여 부상이라도 당할까 마음을 졸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붙박이 안방마님 강민호를 1군 엔트리에서 제외하고 다른 포수를 올려 10일을 허비할 수도 없는 노릇. 결국 부산으로 내려간 강민호를 곧바로 다시 불러 올려야만 했다. 첫 딸 출산의 순간을 어떻게든 함께하고 싶었던 강민호는 그렇게 급박한 24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둘째를 얻은 올해는 몸도, 마음도 훨씬 편했다. 강민호는 아내의 출산 예정일이던 8월 16일 수원 KT전에 앞서 기쁜 마음으로 삼성 구단에 경조 휴가를 신청했다. 둘째인 아들을 아내 곁에서 함께 맞이하기 위해서다. 강민호의 아들은 이튿날인 17일 아버지가 지켜 보는 가운데 세상에 태어났고, 부부는 함께 출산과 득남의 감격을 누렸다. 강민호는 막 출산한 아내 곁을 지키면서 든든하게 남편과 아버지 역할을 다 하고 팀으로 복귀했다. 삼성은 강민호가 없는 이틀간 신인 포수 김도한을 1군 엔트리에 등록하고 백업 포수 김민수를 선발 포수로 내세웠다.
배영은 일간스포츠 기자
출산 때문에 보내줬더니…돌아온 선수와 떠난 선수 가족의 경조사와 집안의 대소사를 거의 챙기지 못하고 살아 온 KBO 리그 선수들. 하지만 타지에서 온 외국인 선수들은 예외였다. 아내가 출산할 경우 5일에서 7일 정도 휴가를 얻어 고국에 다녀오는 장면을 종종 볼 수 있었다. 애초에 한국 선수들과는 다른 문화에서 선수 생활을 해온 데다 가족이나 친구들로부터 멀리 떨어진 타국에서 생활한다는 핸디캡을 각 구단이 고려 해줬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외국인 선수들은 당당하게 “내게는 경기보다 가정이 최우선”이라는 의사를 표현하는 일이 많다. 이달 초 삼성에서 퇴출된 덱 맥과이어는 지난 4월 21일 한화전에서 리그 역대 14번째이자 개인에게는 생애 최초 노히트노런을 달성한 뒤에도 “이번 대기록은 내 인생에서 두 번째로 좋은 일이다. 내 인생 최고의 순간은 아내와 결혼하고 아이를 출산했을 때였다”고 단언하기도 했다. 실제로 한화 외국인 투수였던 카를로스 비야누에바는 2017시즌을 다른 선수들보다 조금 일찍 마감했다. 9월 28일 대전 KIA전 등판을 마친 뒤 아내의 출산을 보기 위해 다음 날 도미니카공화국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다. 시즌이 일주일도 넘게 남아 있던 시기였지만, 이미 포스트시즌 탈락이 확정됐던 한화는 비야누에바에게 “남은 시즌에는 등판하지 않아도 좋다”고 조기 출국을 허락했다. 비야누에바는 포수 최재훈과 깍듯한 목례를 하고 대전의 팬들에게 모자를 벗어 인사한 뒤 한국과 작별했다. 더 특이한 사례는 역시 지난 시즌 한화에서 뛰었던 투수 키버스 샘슨이다. 그는 지난 7월 19일 아내의 출산이 임박했다는 소식을 듣고 휴가를 받아 출국했다. 출산 예정일이 20일 혹은 21일이었기에 아이가 태어나는 모습을 보고 곧바로 돌아오겠다는 계산이었다. 하지만 예정된 날짜를 넘긴 뒤에도 출산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산모와 아이를 위해 자연 분만을 기다리던 샘슨은 고민 끝에 원래 정해진 날짜인 24일에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구단에서는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 기다려도 좋다”고 했지만, 샘슨이 “요즘 팀이 계속 지고 있어 한국에 가야겠다”며 스스로 귀국을 선택했다. 결국 아이는 샘슨이 한국으로 돌아오고도 일주일이 더 지난 8월 1일 세상의 빛을 봤다. 때마침 샘슨은 바로 이날 대전 KT전에서 시즌 12승째를 올렸다. 그는 다음날 “운동 선수 출신인 아내가 내 상황을 이해해줘서 아쉬움을 달랬다”며 “밤새 영상통화로 아이를 봤더니 더 힘을 낼 수 있을 것 같다”고 웃어 보였다. 하지만 출산 때문에 출국했다가 영영 돌아오지 않은 선수도 있다. 2008년 두산에서 뛴 개리 레스다. 그 해 4월 27일 미국으로 떠난 그는 아내의 쌍둥이 아들 출산을 지켜본 뒤 일주일 뒤인 5월 3일 오후 귀국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귀국 예정일에 두산 관계자에게 이메일을 보내 “부인이 혈액 응고 현상을 보여 수혈을 받아야 하고, 태어난 아이들도 수술이 필요하다”며 “돌봐줄 사람이 없어 올 시즌에는 더 이상 야구를 할 수 없을 것 같다”고 퇴단 뜻을 밝혔다. 당시 두산 사령탑이던 김경문 전 감독은 “레스의 입장을 이해한다. 아쉬움이 크지만 레스 가족들의 쾌유를 바라는 마음”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결국 두산은 부랴부랴 레스를 임의탈퇴 공시하고 황급히 대체 외국인 선수를 물색해야 했다. [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