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S ‘파격 수혈’ 통해 15대 총선 승리하며 레임덕 돌파…민주당 벤치마킹 검토
고 김영삼 전 대통령(YS)과 문재인 대통령의 공통점이다. 최근 여의도에선 ‘원내 의석 재분배’ 분수령이 될 내년 제21대 국회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문재인·YS 평행이론이 부쩍 회자되는 모습이다. 여권 내부에서조차 YS 정부의 15대 총선 공천을 벤치마킹해야 한다는 얘기가 파다하다. 승부사 YS가 띄운 개혁 공천이 여전히 여의도 정치 한가운데를 관통하는 셈이다. 친문(친문재인)계 아킬레스건인 배제 정치와 YS 개혁 공천의 접점 찾기가 문재인 정부 운명의 최대 시험대가 될 전망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10월 22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내년도 예산안에 대한 시정연설을 하고 있다. 사진=박은숙 기자
집권 3년 차 문 대통령 지지도는 YS와 판박이다. 5년 단임제에서 상고하저 지지도는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지만 문 대통령과 YS는 취임 초 80∼90% 지지도, 이후 급격한 하락세 등의 추세 곡선이 꼭 빼닮았다. 이명박 정부 때 청와대 정무수석을 지낸 박형준 동아대 교수는 “문 대통령 지지도 추세는 역대 대통령 중 YS와 가장 비슷하다”고 밝혔다. 지지도 추세뿐 아니라 고향(경남 거제)과 출신고(경남고) 등도 같다.
상고하저 지지도 요인도 마찬가지다. 문 대통령이 취임 초 높은 지지도를 기록한 것은 적폐 청산 등 개혁 행보가 결정적 역할을 했다. 여론조사기관 리얼미터가 CBS ‘김현정의 뉴스쇼’ 의뢰로 2017년 5월 17일 하루 동안 전국 19세 이상 성인 504명을 대상으로 문 대통령의 취임 후 가장 인상적인 행보를 조사한 결과(발표는 5월 18일·이하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참조), 응답자의 30.4%가 ‘적폐청산·개혁’을 꼽았다. 업무지시 1호였던 일자리위원회 등 ‘민생·경제회복 의지(11.1%)’보다 3배가량 많았다.
YS도 취임 직후인 1993년 3월 6일 군부의 핵심이었던 ‘하나회’를 해체했다. 무기 구입 비리 등에 대한 감사를 병행, 대장 계급 7명과 중장 이하 장성급 12명이 옷을 벗었다. 같은 해 8월 12일 오후 8시 긴급재정경제명령 제16을 발동, 금융실명제를 전격적으로 실시했다. 배종찬 인사이트케이 연구소장은 “문 대통령과 YS 모두 경제보다는 개혁에 방점을 찍은 대통령”이라고 분석했다.
문 대통령과 YS의 평행이론은 이뿐만이 아니다. 외교 행보도 엇비슷하다. 취임 직후엔 두 정부 모두 일촉즉발 위기였다. 북한은 문 대통령이 취임한 2017년 12차례나 미사일을 발사했다. YS 취임 첫해에는 북한의 핵환산금지조약(NPT) 탈퇴 선언으로 한반도가 얼어붙었다. 하지만 문 대통령은 지난해 평창 동계올림픽을 계기로 1년간 3번이나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만났다. 올해 6월 30일에는 판문점에서 사상 처음으로 남북미 정상이 회동했다.
YS도 집권 초 김일성 북한 국가주석과 남북 정상회담을 추진했다. YS는 전면전 카드를 만지던 미국 정부를 설득했다. 그러나 남북 정상회담(1994년 7월 25일)을 보름여 앞두고 김 주석이 사망, 끝내 한반도의 봄은 오지 않았다. 문 대통령도 남북 관계 개선으로 취임 초 국정 장악력을 끌어올렸지만, ‘평창올림픽 남북 단일팀 구성’을 둘러싼 논란은 지지도 하락의 변곡점으로 작용했다.
문 대통령 지지도가 급락한 결정적 원인은 역시 ‘경제’였다. 여론조사기관 한국갤럽의 10월 셋째 주(15∼17일 조사·18일 발표) 조사에서 문 대통령 지지도는 취임 후 처음으로 39%로 하락했다. 문 대통령에 대한 부정평가(53%) 이유는 ‘경제·민생 문제 해결 부족’이 25%로, ‘인사 문제(17%)’를 앞섰다. 경제는 대선후보 시절부터 문 대통령 최대 아킬레스건으로 꼽혔다.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문 대통령과 맞붙었던 캠프 측 관계자는 “문재인 캠프 인사들이 TV 토론회를 앞두고 경제 이슈를 가장 많이 걱정했다”고 귀띔했다.
친노(친노무현)계 관계자도 “정확히 지난해 6·13 지방선거 직후부터 경제 무능 프레임에 대한 우려가 커졌다”라고 회고했다. 6·13 지방선거를 치른 지 이틀 만에 발표된 통계청의 ‘5월 고용동향’은 참사 그 자체였다. 석 달 연속 10만 명대를 기록하던 취업자 증가 폭이 7만 명 수준으로 떨어졌다. 김동연 당시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5월 고용 동향에 대해 “충격적”이라며 고개를 숙였다. 최저임금으로 대표되던 소득주도성장 정책이 서서히 자취를 감추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YS는 한국 경제 고도성장기의 마지막 대통령이었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YS 취임 첫해부터 집권 3년 차인 1993∼1995년 3년간 실질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6.8%→9.2%→9.6%’였다. 1995년에는 1인당 국민소득이 처음으로 1만 달러를 돌파했다. 이듬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했다. 하지만 샴페인을 일찍 터트린 부작용은 이미 곳곳에서 발발했다. 1994년 경상수지는 마이너스(-) 44억 6300만 달러에서 1995년 -97억 5100만 달러로 2배 이상 커졌다. 만성적인 물가 폭등에도 시달렸다. 기승전·개혁으로 역대 최고 대통령에 근접했던 YS는 집권 말 한보 비리 사태 등에 직격탄을 맞으면서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을 받는 신세로 전락했다.
2016년 11월 22일 서울 동작구 국립현충원 현충관에서 열린 김영삼 대통령 서거 1주기 추모식에서 차남 김현철 씨가 유족을 대표해 인사하고 있다. 사진=최준필 기자
민심은 이미 집권 3년 차부터 들끓기 시작했다. 민주자유당은 1995년 첫 민선이었던 6·27 지방선거 당시 총 15곳의 광역자치단체장 선거에서 5곳(경기·인천·부산·경남·경북)을 얻는 데 그쳤다. 서울시장은 정계 복귀한 김대중 전 대통령(DJ)이 지원한 조순 민주당 후보에게 내줬다. 대전·충남·충북 등 중원은 YS와 결별을 선언한 김종필 전 국무총리(JP)의 자유민주연합이 싹쓸이했다. 대구는 무소속 후보(문희갑)에게 패했다.
이듬해 치른 15대 총선은 YS 정부의 ‘레임덕이냐, 아니냐’를 결정하는 분기점이었다. 3김(김영삼·김대중·김종필)이 맞붙은 마지막 선거이기도 했다. 객관적인 전력은 야권이 우세했다. 임기 4년 차를 맞은 김영삼 전 대통령은 레임덕(권력누수)에 접어들었다. 여당 내부도 분열로 들끓었다. 신한국당이 1995년 6·27 지방선거에서 패배한 지 4개월 만인 그해 10월 국회에서 노태우 전 대통령 부정축재·비자금 사건이 폭로됐다. YS는 이후 돌연 5·18 관련자 처벌에 관한 특별법 제정의 소급입법을 국회에 요청, 당내 민정계의 반발 조짐의 싹을 잘라버렸다. 5·6공 잔재청산을 앞세운 YS의 ‘역사 바로세우기’ 등이 본격화한 것도 이때다.
인적 쇄신에 나선 신한국당은 15대 총선에서 139석을 얻어 새정치국민회의(79석)와 자유민주연합(50석)의 거센 도전을 뿌리쳤다. 상도동계 한 인사는 “YS의 개혁 공천이 총선 승리의 원동력”이라고 밝혔다. 1995년 지방선거 직후 새판 짜기에 들어간 여당은 YS와 대립각을 세웠던 이회창 전 국무총리, 1995년 지방선거에서 YS의 영입 제의를 거절했던 박찬종 변호사를 각각 영입해 당 간판으로 내세웠다. 민중당 출신의 재야 운동권에 몸을 담았던 김문수·이재오부터, ‘모래시계 검사’ 홍준표 등까지 좌우를 가리지 않고 수혈했다.
그 결과 신한국당은 수도권 96곳(서울 47+경기 38+인천 11) 중 54석(서울 27+경기 18+인천 9)에서 승리했다. 집권당이 서울에서 이긴 최초의 국회의원 선거였다. 새정치국민회의는 수도권에서 30석(서울 18+경기 10+인천 2)만 건졌다. 여당 내부에서 YS 개혁 공천을 롤 모델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도 이와 무관치 않다.
문제는 현재 당·청의 엇박자다. 이해찬호는 11월 5일∼12월 23일까지 현역 128명에 대한 평가에 착수한다. 사실상 컷오프인 ‘하위 20%’를 가려내는 현역 물갈이 신호탄을 쏜 셈이다. 이미 민주당 산하 선출직공직자평가위원회는 9월 초 현역 의원 대상으로 총선 불출마 의사를 타진했다. 여당발 살생부 논란이 일자 이해찬 대표는 9월 17일과 19일 권역별로 의원들과 오찬을 한 자리에서 “중진 물갈이론은 소설”이라고 해명했다.
청와대는 강경 일변도다. 문 대통령은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사퇴 이후에도 검찰 압박 강도를 높였다. 문 대통령은 10월 18일 이례적으로 김오수 법무부 차관 등을 청와대로 불러 “조국 개혁안을 10월 내 끝내라”고 지시했다. 10월 22일 국회에서 한 내년도 예산안 시정연설에서는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외 대안은 있는지 묻고 싶다”고 반문했다.
민주당의 한 의원은 “수도권과 PK 지역 민심이 심상치 않다”고 우려했다. 이해찬 대표는 조국 사퇴 이후 당 내부에서 지도부 입장 표명을 요구하자 비공개 최고위원회의를 열고 “지금 입장을 밝히면 청와대가 난처해진다”는 취지의 발언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익명을 요구한 여론조사전문가는 “40% 지지층만 있으면 총선에서 이길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라고 꼬집었다.
윤지상 언론인
YS 개혁공천 설계자는 ‘소통령 김현철’ “김영삼 전 대통령(YS) 차남 김현철의 아이디어였다.” YS 정부가 승부수로 띄운 제15대 국회의원 총선거(총선) 때의 ‘개혁 공천’은 소통령으로 불렸던 김현철 김영삼민주센터 상임이사가 주도했다. 김현철 이사는 개혁 공천을 추진한 이유에 대해 “기득권 저항 때문이었다”라고 말했다. 당시 여당은 1995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참패 이후 민정계의 반란이 극에 달한 시점이었다. 임기 4년 차에 치른 총선마저 패할 경우 문민정부 간판을 닫을 수밖에 없다고 판단한 셈이다. 그 중심엔 여론조사가 있었다. 김 이사는 노태우 정권 때인 1988년 중앙여론조사연구소 설립했다. 한국 정치의 여론조사 시대를 연 1세대로 통한다. 1992년 14대 대선 때 이를 적용, YS가 영원한 맞수인 김대중 전 대통령을 꺾는 데 일조했다. 15대 총선 때도 개혁 공천을 단행하면 이길 수 있다는 보고서를 만들어 개혁 공천을 진두지휘했다. 1996년 2월에는 민주자유당 당명을 신한국당으로 바꿨다. 총선 승부처가 수도권에 있다고 보고 이념적 성향 등과 관계없이 정치 신인을 대거 영입했다. 상도동계 한 관계자는 “본선 승리 경쟁력을 중점으로 본 것”이라며 “새 인물과 세대교체로 야당의 ‘정권심판론’을 돌파했다”고 회고했다. 김 이사가 새 피 수혈 대상자를 물색하면 이원종 당시 청와대 정무수석이 여론조사를 돌려 그 결과를 강삼재 신한국당 사무총장 등과 공유했다. 이 수석은 1993년 12월∼1997년 2월까지 문민정부 청와대 정무수석을 맡았던 YS 정부의 핵심 참모였다. 이 수석을 제외한 주돈식(1993년 2월∼12월), 강인섭(1997년 2월∼1997년 7월), 조홍래(1997년 7월∼1998년 2월) 정무수석은 임기 1년도 채우지 못했다. 강삼재 총장은 집권당의 ‘실세 사무총장’의 대명사였지만, 당시 신한국당이 ‘사심 없는 공천’을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승부사 YS 아래 ‘김현철·이원종·강삼재’의 삼각 편대가 신한국당의 개혁 공천을 주도한 셈이다. 하지만 15대 총선에서 원내 진입한 김무성 자유한국당 의원은 20대 총선 직전 한 언론과 인터뷰에서 “(15대 총선 당시) 내가 부끄러워서 말하지 못할 정도로 비민주적이고 탈법행위가 있었다”고 폭로했다. 이에 김 이사는 즉각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정치적 아들이 할 일인가”라고 비판했다. YS 비서로 정치권에 발을 들여놓은 김 의원은 2015년 말 YS 서거 당시 ‘상주 역할’을 자임했다. 윤지상 언론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