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회 해산 뒤 조기 총선으로 선거법 막겠다는 전략…당 내에서조차 공수표에 불과 지적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22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내년도 예산안에 대한 시정연설 중 공수처법과 수사권 조정법안 등을 언급하자 자유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와 의원들이 손으로 엑스(X)자 표시를 하고 있다. 사진=박은숙 기자
10월 22일 국회 본회의장. 시정연설을 하는 문재인 대통령을 향해 자유한국당 의원들이 양손을 머리 위로 들고 가위표(X)를 그렸다. 문 대통령이 공수처법 등을 언급한 대목에서다. 그럼에도 문 대통령은 “공수처가 있었다면 국정농단이 없었을 것”이라고 언급하며 꿋꿋이 공수처 설치를 강조했다.
시정연설 직후 한국당은 국회에서 비상 의원총회를 개최했다. 연설에 대한 혹평이 곳곳에서 쏟아졌다. 단상에 오른 나경원 원내대표는 “만약 공수처 날치기를 시도한다면 과연 20대 국회가 계속 존속해야 될 이유가 있을지 의문이 든다”며 “이제 중대한 결단의 시기가 점점 다가오고 있다. 단호히 한 마음으로 뭉쳐서 투쟁해야 될 것”이라고 했다.
‘20대 국회의 존속’, ‘중대한 결단’ 등의 언급을 놓고 한국당이 필사의 카드를 준비하고 있다는 해석이 나온다. 대표적으로 거론되는 것은 ‘의원직 총사퇴’다. 당내 강경파를 중심으로 제안이 돌고 있고 급기야 지도부까지 이 안을 정식 검토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당 핵심 관계자는 “지도부 내에서 의원직 총사퇴 의견이 나왔고 여러 부분을 검토해봤다”며 “만약 총사퇴를 할 경우 패스트트랙 통과 자체가 어렵기에 이를 막을 수 있고, 이후 광화문 광장 등 장외에 나가서 총사퇴 이유 등 우리의 목소리를 계속 전달하는 방법이 있을 것”이라고 귀띔했다. 당 내에서 검토했던 기본적인 시나리오는 이렇다.
헌법 제41조2항은 ‘국회의원의 수는 법률로 정하되, 200인 이상으로 한다’고 규정한다. 현재 의석수(297)는 더불어민주당(128) 한국당(110) 바른미래당(28) 대안신당(10) 무소속(9) 정의당(6) 민주평화당(4) 우리공화당(2) 순이다. 한국당이 전원 사퇴하면 의석수는 187석으로 줄어들어 헌법 기준에 못 미친다. 이에 의회는 해산되고 조기 총선 체제로 접어든다.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 법안을 막은 뒤 여세를 몰아 총선에서 승리하겠다는 구상이다.
하지만 회의론이 높다. 총사퇴를 하기 위해선 본회의 의결을 거쳐야 하고, 만약 폐회 중이라면 문희상 국회의장 사인을 받아야 하는데 둘 다 쉽지 않을 것이란 관측이다. 지도부 또 다른 관계자는 “가뜩이나 문 의장의 친여 편향이 문제인데, 사퇴 처리를 안 해주면서 시간을 끌고 여론의 비판을 이끌어 내는 상황을 조성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사퇴 처리가 이뤄지더라도 의회 해산과 조기 총선이 가능할지에 대한 부분도 검토 과정에서 지적됐다고 한다. 여러 자문을 구해보면 이 역시 여의치 않다는 것이다. 헌법에 나온 의원 수 200인 이상이 무너지더라도 이것이 곧 의회 해산을 의미하진 않는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임지봉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헌법에 제시된 200인 이상은 의석수를 그 이상으로 유지해야 한다는 것일 뿐, 그 미만이면 의회를 해산한다는 조항은 어디에도 없다. 보궐선거를 통해 채우면 되는 것”이라며 “의회 해산권은 의원 내각제 국가에만 있을 뿐 대통령제 하에서는 있는 국가도 잘 없다. 우리나라의 경우 박정희 전 대통령의 유신헌법 때 의회 해산권이 있었지만, 1987년 제9차 개헌 때 폐지됐다”라고 설명했다.
이처럼 의원직 총사퇴를 자세하게 뜯어보면 제약이 따르지만 그럼에도 한국당 내에선 이만한 저지 카드가 없다는 목소리가 계속 나오고 있다. 공수처뿐 아니라 선거법이 달려 있기 때문이다. 패스트트랙에 오른 선거법 개정안은 의석수를 300석(지역구 225석, 비례대표 75석)으로 하고 비례대표 의석 배분 방식을 50% 연동형으로 하고 있다. 이를 도입하면 군소 정당인 정의당이 최대 수혜를 보는 등 진보 진영에 유리하다는 판단이다.
선거법 개정안은 11월 27일쯤 본회의에 오를 것으로 관측된다. 이후 문희상 의장이 60일 이내에서 기간을 단축해 표결을 완료한다면 내년 4월 총선에 개정안이 적용될 가능성이 있다. 한국당은 이를 막아야 하지만 지난 4월 패스트트랙 저지 때 국회 선진화법 대거 위반으로 후유증이 큰 상태다. 수사대상 의원만 60명에 달한다. 8월 29일 한국당을 제외한 여야4당은 정치개혁특별위원회에서 선거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한국당은 반발했지만 더 이상 물리력을 동원하진 못했다.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와 나경원 원내대표가 10월 21일 오후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문재인 정권 헌정유린 중단과 위선자 조국 파면 촉구 광화문 집회’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다. 사진=박은숙 기자
결국 물리력을 쓰지 않고 저항하기 위해선 다른 전략을 써야 한다는 얘기다. 조국 정국 때 단행했던 릴레이 삭발이나 장외 집회는 원내보다는 원외 싸움이다. 원내에서 행할 수 있는 필리버스터의 경우 ‘지연작전’에 불과하다. 의원직 총사퇴라는 카드를 꺼낼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 나오는 배경이다.
의원직 총사퇴에 대한 언급은 패스트트랙 정국이 시작될 즈음인 지난 3월 이미 한국당 내에서 제기되기도 했다. 나경원 원내대표는 “패스트트랙으로 야합 처리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절차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것”이라며 “이렇게 멋대로 한다면 의원직 총사퇴를 불사할 것”이라고 했다. 그때보다 현재 이러한 공감대가 한층 올랐다는 것이 중론이다.
강성 친박으로 분류되는 김진태 한국당 의원은 10월 21일 MBC 라디오에 출연해 “물리력이라기보다 의원직 총사퇴 같은 더 강력한 방법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의원직 총사퇴가 지도부와도 공유되고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선 “당연히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고 답했다.
다만 이런 움직임이 실제로 어디까지 이어질지는 지켜봐야 할 전망이다. 결국 구체적 행동에 나서기보다 정치적인 구호만 가득한 ‘공수표’에 그치지 않겠느냐는 시각이다. 한 초선 의원은 사석에서 “총선을 6개월 앞두고 중진 의원들 아무도 불출마 선언을 안하고 험지(수도권)보다 양지(영남)만 찾는 마당에 누가 사퇴에 나서겠느냐”고 반문하며 “대항하기 위한 측면에서 목소리는 키우지만 실제 이행되기보다 정치적 선언에 가까울 것”이라고 꼬집었다.
과거를 거슬러 보면 당 지도부에 사퇴서를 일임하는 결의를 보인 뒤, 국회에는 사퇴서를 제출하지 않는 방법도 있다. 국민의 정부 초기인 1998년 김대중 전 대통령이 대대적인 사정드라이브에 나서자 당시 한나라당(한국당 전신) 이회창 총재는 이에 맞서 의원직 총사퇴를 당론으로 채택했다. 의원들은 사퇴서를 당 지도부에 일임했다.
이 총재는 “독재 권력을 막기 위해선 우리 모두 비장한 결의를 해야 한다”고 했고, 박희태 원내총무(원내대표)는 “야당탄압을 중지하지 않는다면 의원직 사퇴서를 국회에 정식으로 제출하겠다”고 압박하기도 했다. 하지만 사퇴서는 끝내 제출되진 않았다.
권준혁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