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즌 전 목표는 5위 진입, 아직 갈 길 멀어…좋아하는 골프로 누린 것 많아 행복”
올 시즌 LPGA 최고 골퍼로 등극한 고진영은 “아직 다 보여주지 못한 부분이 많다”며 자신감을 보였다. 사진=이영미 기자
―올 겨울이 춥지 않을 것 같다. 굉장한 시즌을 보냈고, 좋은 성적에 따른 상들도 많았다. 올 시즌을 보낸 소회가 궁금하다.
“물론 잘하긴 했지만 아직 다 보여주지 못한 부분이 많다. 스윙 폼을 수정하는 등 보완해서 더 좋은 선수가 되고 싶다. 결과적으로는 전관왕에 올랐지만 경기 내용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내 실력이 뛰어나서 이 자리에 있는 건 아니라고 본다. 아직 갈 길이 멀다. 해야 할 것도 많고.”
―너무 겸손한 모습 아닌가.
“한국에서 투어 생활할 때는 다른 선수들과 경쟁 구도를 이뤘어도 ‘1등’ 자리에는 오르지 못했다. 항상 나보다 잘하는 선수가 있었다. 그럼에도 힘든 줄 모르고 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고진영, 참 끈기 있었네’라는 생각이 든다. 20대 초반의 어린 나이에 정상의 자리에 오르려고 노심초사하며 버틴 부분이 미국 투어 생활에 큰 도움이 됐다. 버티는 힘을 잘 비축한 덕분에 고단한 외국 생활을 견뎌낼 수 있었다.”
고진영은 자신이 올 시즌 전관왕을 휩쓸기는 했지만 골프의 완성도 면에서는 선배 ‘대스타’들처럼 더 많은 걸 채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고진영이 언급한 ‘대스타’의 의미는 명예의 전당에 오르고, 이름을 남길 만한 업적을 남긴 선수로서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 박인비라고.
―2018년 LPGA에 첫 발을 내딛기 전까지만 해도 미국 투어 생활에 대해 고민한 것으로 알고 있다. 이렇게 잘할 줄 알았다면 괜히 걱정했다는 생각이 들 것 같다.
“잘될 때는 ‘좀 더 빨리 올걸’ 하고 생각하지만 잘 안될 때는 ‘괜히 왔나?’ 하는 생각도 든다. 분명한 것은 LPGA가 골퍼들한테 최상의 투어 환경을 제공하기 때문에 골프에만 집중할 수 있어 좋았다. 1년 차 때는 골프 코스만 보였다면 2년 차 때는 코스 외의 자연 환경에 시선이 가더라. 만약 내가 계속 ‘땅만 파는’ 상황이었다면 주위에 눈을 돌리지 못했을 것이다. 한국이나 미국이나 좋은 성적이 뒷받침돼야 동기 부여가 가능해지는 것 같다.”
고진영은 2019년 LPGA에서 시즌 4승과 함께 상금왕, 최저타수상, 올해의 선수상을 휩쓸었다. 사진=갤럭시아SM 제공
―지난 2월 뱅크 오브 호프 파운더스 컵 우승을 시작으로 메이저 대회인 ANA 인스퍼레이션, 에비앙 챔피언십, 그리고 캐나다 여자오픈을 제패하며 무려 4승을 거뒀다. 그중 가장 인상적인 대회를 꼽는다면.
“8월 캐나다에서 열렸던 CP 여자오픈 우승이다. 그 대회에서 사흘 내내 72홀 노 보기를 기록한 덕분에 최종 합계 26언더파 262타를 기록하며 시즌 4승을 달성했다. 재미있는 것은 어느 대회보다 CP 여자오픈은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출전했다는 점이다. 대회 출전 여부를 놓고 고민하는 사이에 캐디는 개인 일정을 잡았고, 대회 참가 여부를 뒤늦게 결정한 나로서는 캐디에게 뭐라고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목요일 대회가 시작되기 전날 캐디가 대회 장소에 도착해서 9홀만 돌고 나머지 9홀은 연습도 못한 채 1라운드를 맞이했다.”
―그런데 첫날 공동 2위, 둘째 날 단독 2위, 셋째 날 공동 선두, 마지막 날 우승을 확정짓는 등 대회 내내 상위권에 이름을 올렸다.
“정말 신기했다. 죽도록 연습해도 우승을 할까 말까 하는데 코스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출전한 대회에서 우승했으니 ‘이게 뭐지?’ 싶더라. 알다가도 모를 게 골프인 것 같다(웃음).”
―LPGA 메이저 대회인 에비앙 챔피언십 우승 시상식에서는 스카이다이버가 하늘에서 태극기 세리머니를 펼친 후 그 태극기를 우승자에게 건네주는 모습으로 깊은 감동을 선사했다.
“태극기 세리머니가 정말 뭉클했다. 당시 한국은 ‘노 재팬’ 운동이 펼쳐지면서 국민들이 분노에 차 있던 상황이었는데 에비앙 챔피언십에서 선보인 태극기 세리머니가 국민들에게 조금이라도 위안을 줬을 것이라고 믿고 싶었다. 그런 점에서 더 큰 의미가 있었다.”
―에비앙 챔피언십의 마지막 라운드를 김효주 박성현과 함께 챔피언조에서 치렀다. 챔피언조를 한국 선수들과 함께한 건 처음인가.
“미국에서는 처음이었다. 당시 1, 2위와 타수 차이가 있고 나와 (박)인비 언니가 공동 3위, 2라운드 단독 선두였던 (이)미향 언니와 펑샨샨이 1타 뒤에서 우승을 노리고 있어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 대회를 지켜본 지인 중 한 분이 내게 우승할 수 있을 것 같으니 포기하지 말라고 조언해주는 게 아닌가. ‘설마?’ 하고 생각했지만 경기가 재개되는 순간 자연스럽게 집중이 됐다. 결국 최종일 라운드에서 버디 5개, 보기 1개를 기록하며 4언더파 67타(파71)로 대회를 마치며 공동 2위와 2타차로 우승을 차지할 수 있었다.”
―올 시즌 앞두고 이 정도의 성적을 낼 것이라고 예상한 적이 있었나.
“세계 랭킹 5위 진입이 목표였다.”
―왜 세계 랭킹 5위 안으로 목표를 잡은 건가.
“5등 안으로 들어갈 만한 실력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거기까지 넘볼 수 있는 실력이 아니었음에도 좋은 결과를 안게 돼 감사할 따름이다.”
고진영은 지난 10월 27일 부산에서 막을 내린 LPGA투어 BMW 레이디스 챔피언십에서 공동 9위에 오르고 올해의 선수상을 확정지었을 때 기자회견을 통해 부모님의 빚을 거론한 적이 있다. 자신을 뒷바라지하기 위해 부모님이 많은 빚을 졌다는 사실을 알고 골프를 더 열심히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제 그 빚은 모두 갚았고, 더 많은 돈을 벌고 있지만 그는 현실에 안주하지 않는다. 인터뷰를 통해 언급한 것처럼 아직 채우고 만들어가야 할 일이 많이 남았기 때문이다. 그는 인터뷰 말미에 이런 이야기를 들려준다.
“내가 좋아하는 골프를 통해 부와 명예를 누릴 수 있다는 건 축복받은 삶이다. 이 삶에 감사한 마음을 갖고 주위를 돌보고 베풀며 사는 사람이 되고 싶다.”
이영미 스포츠전문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