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바 사태’ 증거인멸 유죄, 이재용 파기환송심 영향 가능성...삼성 “재판, 경영·인사와 큰 관련 없을 것”
12월에 열리는 삼성그룹 관련 재판만 총 4건이다. 국정농단 관련 파기환송심과 삼성바이오로직스 증거인멸 사건, 삼성계열사(삼성에버랜드, 삼성전자서비스)의 노조 파괴 사건 등이다. 이들 사건에는 그룹 오너뿐만 아니라 회사 전반을 이끌어가는 부사장급 임원들이 연루돼 있다. 파기환송심을 제외한 나머지 3건 모두 선고가 내려진다.
이 가운데 특히 재계와 법조계 관심을 끈 건 삼성바이오로직스 증거인멸 사건 1심 선고공판. 삼성바이오 회계부정 의혹과 관련해 내려진 법원의 첫 판단으로, 삼성그룹을 총괄하는 미래전략실 출신의 ‘재무통’과 사업지원 태스크포스 소속 부사장 등 총 3명의 그룹 핵심 임원이 연루돼 재판정에 섰다. 이들은 검찰이 회계부정 의혹 수사에 착수하자, 지난해 5월부터 삼성바이오와 에피스 내부 문건 등을 은폐·조작하도록 지시한 혐의를 받고 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24부(소병석 부장판사)는 지난 12월 9일 이 아무개 삼성전자 재경팀 부사장에게 징역 2년, 삼성전자 태스크포스 소속 김 아무개 부사장과 박 아무개 부사장에게 나란히 징역 1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했다. 같은 혐의로 기소된 삼성바이오로직스와 에피스 임직원 5명에 대해서는 모두 집행유예가 선고됐다. 재판부는 “엄청난 양의 자료 일체를 그룹 차원에서 조직적이고 대대적으로 인멸·은닉하게 했다”며 “형사책임의 경중을 판단할 수 있는 증거들이 인멸·은닉돼 실체적 진실 발견에 지장을 초래해 결코 죄책이 가볍지 않다”고 설명했다.
증거인멸 재판에서 유죄 선고가 내려지면서 아직 재판에 넘겨지지 않은 회계부정 혐의 관련 검찰 수사에 속도가 붙을 전망이다. 회계부정 재판에서도 유죄가 내려질 가능성이 높다는 관측이 힘을 얻고 있다. 회계부정 검찰 수사는 지난 8월 이후 5개월째 멈춰있다. 검찰 수사로 회계부정 혐의가 뚜렷이 드러나면 “이재용 부회장이 경영권 승계를 위해 삼성바이오의 가치를 무리하게 부풀렸다”는 추론에도 무게가 실린다.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서원(개명 전 최순실) 씨 측에 뇌물을 준 혐의 등으로 기소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지난 12월 6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국정농단’ 관련 파기환송심 3차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사진=임준선 기자
이 재판의 핵심 쟁점은 ‘이재용 부회장이 박근혜 전 대통령과 비선실세 최서원 씨(개명 전 최순실)에게 뇌물을 건넨 이유’다. 특검은 이 부회장과 삼성이 경영권 승계 작업을 원활히 추진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뇌물을 줬고, 삼성바이오 수사로 그 전모를 드러내는 단서가 포착됐다고 보고 있다. 특검은 삼성바이오 회계부정 사건 수사기록이 ‘중요한 양형 사유’가 된다는 입장이다.
국정농단 특검에 이어 삼성바이오 수사에도 참여하고 있는 이복현 부장검사는 이번 심리에서 재판부에 이재용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 구현을 위한 부정회계 등 구체적 작업이 그룹 내부에서 있었다는 점을 강조하며 수사를 통해 확보한 관련 서류를 제출한다고 밝혔다. 삼성바이오 사건과 국정농단 뇌물 사건이 유기적으로 연결된다는 취지다.
반대 의견도 있다. 증거인멸에 연루된 임직원 ‘전원 유죄’ 선고가 다른 수사나 재판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 것이란 해석이다. 증거인멸 선고 과정에서 재판부가 분식회계 등 회계부정과 관련해서는 결론을 내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앞서 검찰은 공소를 제기하면서 삼성그룹 임직원들이 증거를 인멸·은닉하려 했던 ‘타인의 형사사건’은 삼성바이오 회계부정 사건으로, 그 사건의 배경은 이재용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작업이라고 명시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공소장에서 이 내용 가운데 이재용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작업 문구를 직권으로 삭제했다. 경영권 승계까지 고려하지 않더라도, 회계부정 의혹과 관련한 검찰 수사가 개시될 가능성이 있었고, 이후 재판에서 치열하게 다툴 쟁점이 포함된 것을 확인했다는 것만으로도 증거인멸 사건을 판단하기 충분하다는 입장이다. 재판부는 이례적으로 선고를 내리기 전 이 내용을 설명하면서 “회계부정 쟁점에 대해서는 어떤 최종적 결론을 내지 않았다고 분명히 말한다”고 못 박기도 했다.
삼성 측도 증거인멸 혐의는 대체로 인정하면서도, 회계부정이나 경영권 승계 의혹은 강력히 부인하고 있다. 앞선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법리적으로도 회계부정은 밝혀진 것이 전혀 없고 경영권 승계작업도 증거인멸과는 무관하다고 주장한다. 앞서의 파기환송심에서도 “별건 재판”이라는 표현을 쓰며 “내용과 쟁점이 현저히 다르다”고 재차 강조했다. 파기환송심 재판부는 특검과 삼성 쪽 의견을 살펴본 이듬해 1월 17일 4차 공판에서 삼성바이오 수사 자료 등의 증거 채택 여부를 결정할 예정이다.
삼성에버랜드 노조 와해 의혹으로 재판에 넘겨진 강경훈 삼성전자 부사장이 13일 오후 서울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리는 1심 선고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삼성그룹과 관련된 또 다른 재판은 삼성에버랜드와 삼성전자서비스 등 계열사들의 ‘노동조합 와해’ 사건이다. 삼성에버랜드 사건은 삼성그룹 고위급 간부들이 노조 활동을 방해했다는 의혹이 불거진 이후 처음으로 선고가 내려진다. 과거 삼성그룹 미래전략실 소속 강경훈 삼성전자 부사장이 연루돼 있다. 미전실 인사지원팀에서 노조 업무를 총괄한 강 부사장과 11명의 임직원은 2011년 6월부터 지난해 3월까지 금속노조 삼성지회 에버랜드 노조 설립 및 활동을 방해한 혐의를 받고 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부 33부(손동환 부장판사)는 12월 13일 업무방해와 노동조합법 위반 혐의 등으로 강 부사장에 대해 징역 1년 4개월의 실형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미전실은 삼성그룹 전 계열사를 지원, 조직하는 최고 의사결정 보좌기관으로 비노조 경영을 고수하는 사령탑 역할을 하며 각 계열사 노사문제를 수시로 확인, 점검했다”며 “삼성이 그룹 노사전략을 토대로 그룹 차원에서 노조설립 저지 및 무력화로 비노조 경영방침을 유지했다”고 밝혔다.
삼성전자서비스 노조 와해 사건도 조만간 선고가 내려진다. 이 사건에도 연루된 강 부사장 외에도 삼성그룹 핵심 임원은 또 있다. 이상훈 삼성전자 이사회 의장으로, 그는 최근 수년 사이 삼성그룹이 ‘책임경영’을 강조하며 이사회 역할을 강화한 이후 핵심 역할을 맡고 있다. 이 의장 등은 삼성전자서비스 노조 설립 움직임이 일던 2013년 6월 종합상황실을 꾸려 노조 탈퇴 등을 종용하고 조합 활동을 이유로 임금 삭감 등을 한 혐의를 받는다. 이 의장과 강 부사장은 노조 활동에 관여한 적 없다고 주장해왔다.
한편 핵심 임원들이 줄줄이 실형을 선고 받으면서 삼성의 연말 정기 인사는 예상보다 늦어지고 있다. 재판이 모두 마무리된 이후 내년에 단행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실제 삼성전자는 16일로 예정돼 있던 글로벌 전략회의를 그대로 열기로 했다. 이 회의는 그동안 정기 인사가 이뤄진 이후 새 임원들이 참석하는 자리였다. 삼성은 “그룹 임원과 관련한 재판과 인사 및 내년 경영은 큰 관련이 없다. 항소 여부 결정 등 재판과 관련한 내용은 각 계열사 별로 대응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