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끝난 일을 왜?’ 석 달 전 고통받던 그의 달라진 오늘…‘경찰 20년 명예 걸고 재수사’ 수사반장 비보엔 충격도
바람과는 전혀 다른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다시는 갈 일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경찰서와 검찰청에 갔다. 기자들이 찾아오더니, 매일 TV와 신문에 자신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가 억울한 삶을 살았다는 말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범인이 아니다”라는 말을 믿어주는 사람들이 생겼다. 그의 어제와 오늘이 달라졌다. 지난 12월 26일 기준으로 불과 3개월 8일, 정확히 100일 동안 일어난 변화다.
화성연쇄살인사건, 아니 이춘재 연쇄살인사건의 8차 사건 범인으로 옥살이를 했다가 재심을 청구한 윤 아무개 씨 이야기다. 성탄절 오후, 윤 씨와 만나 지나간 시간들을 돌아봤다. 이 기사는 일요신문이 이춘재 사건을 취재하고 윤 씨를 따라 다니고 인터뷰를 하면서 쓴, 그의 삶을 바꾼 100일의 기록이다.
지난 12월 25일 성탄절 윤 씨를 만나 지난 3개월을 돌아봤다. 사진=이종현 기자
#9월 18일, 이춘재와 DNA
경찰이 ‘이춘재 연쇄살인사건’의 단서를 발견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윤 씨가 깜짝 놀랐던 건 잠시뿐이었다. 9월 18일 이춘재의 DNA가 검출된 것으로 알려진 건 총 10건의 연쇄살인사건 중 3건(3, 5, 7차 사건)이었다. 8차 사건을 빗겨갔다. 윤 씨는 “‘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금방 관심을 거뒀다”고 말했다.
그러나 윤 씨 생각과 달리 8차 사건은 이춘재 소식과 늘 한 몸처럼 연결됐다. 이 사건은 이춘재가 저지르지 않은 ‘모방범죄’였고 다른 사람이 범인으로 잡혀 감옥에 갔다는 내용이었다. 걱정과 분노가 한꺼번에 밀려왔다. 출소 10년, 겨우 붙잡은 직장과 지금의 생활이 뿌리째 흔들리는 것만 같았다. 가족들은 이미 ‘끝난 일’이 왜 다시 TV에 나오느냐며 가슴을 쳤다. 제발, 조용히 넘어갔으면 했다.
이춘재 소식이 처음 알려진 지 일주일가량이 지났을 때였다. 윤 씨에게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경찰이었다. 할 이야기가 있다며 만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윤 씨는 거절했다. ‘전과자’를 상대로 간단한 사실관계를 묻는 정도로만 생각했고, 무엇보다 매일같이 ‘모방범죄자’로 언급되는 게 지긋지긋했다.
경찰들은 윤 씨가 사는 곳까지 찾아왔다. 경기남부지방경찰청 소속 팀장과 반장, 수사관이라고 소개한 이들은 서류뭉치를 들고 꼭 만나서 해야 할 말이 있다며 윤 씨를 설득했다. 그들은 한숨을 쉬며 이렇게 말했다. “맞는 게 하나도 없어요.”
과거 수사기록에 허점들이 너무나도 많다는 설명이었다. 윤 씨를 찾아온 세 명의 형사들이 8차 사건 기록을 일주일간 돌아가면서 검토를 해봤는데, 수사의 시작부터 끝까지 전부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뿐이었다고 했다. 혼란스러웠다. 30년 전 “나는 범인이 아니다”라며 윤 씨가 홀로 외친 말을, 오늘 마주보고 앉은 형사가 대신해주고 있었다.
그들은 8차 사건을 다시 조사하겠다고 했다. 윤 씨는 지금 조사해서 달라지는 게 있겠느냐고 물었다. 100% 뒤집을 수 있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정말 그게 가능하냐고 다시 물었다. 반장이라고 소개한 형사는 이렇게 말했다. “경찰 생활 20년 명예를 걸겠습니다.”
윤 씨는 지난 9월 경찰이 찾아와 “명예를 걸고 재수사하겠다”는 말에 혼란스러웠다고 말했다. 사진=이종현 기자
#10월 7일, 끊었던 담배를 피우다
10월 4일, 지인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이춘재가 8차 사건도 자신의 범행이라고 자백했다는 소식을 전해줬다. 형사들이 왜 다녀갔고, 왜 재조사를 하겠다고 했는지 이제야 정확히 알게 됐다. 명치끝에서 어지러움이 일었다. 3일 뒤인 10월 7일, 아침 일찍부터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기자들이 집 앞에 몰려왔다. 카메라가 길에 늘어섰고 누군가는 창문을 두들겼다. 영문을 몰라 운동복 차림에 러닝셔츠를 입고 밖으로 나왔다.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재심을 해도 내가 한다. 당신들이 왜 나서느냐. 내가 잡혔을 때 당신들은 뭘 했나. 인터뷰할 생각 없다. 돌아가라.”
윤 씨는 심경이 어떤지, 재심을 청구할 건지 묻는 기자들을 향해 소리쳤다. 30년 전 화성사건을 보도하며 자신을 잔혹한 살인마로 표현했던 과거 기자들의 모습이 겹쳐보였다. 기자들은 윤 씨가 경찰에 신고를 하고 나서야 떠났다. 집을 비우고 열흘 동안 모텔을 전전했다.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웠다.
집을 피해있는 동안 윤 씨는 재심 사건을 여러 차례 맡았던 박준영 변호사를 만났다. 앞서 박 변호사는 공개적으로 사건을 맡을 의향이 있다고 밝혔고, 윤 씨 쪽에선 가족들이 재심 가능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조용히 변호사를 찾고 있었다. 주변 사람들과 찾아온 기자들이 윤 씨에게 박 변호사를 추천했다. 윤 씨와 박 변호사를 둘러싼 모든 사람들이 둘을 이어주려 하고 있었다.
윤 씨는 “글씨 쓰고 읽는 게 서투른데도 박준영 변호사를 인터넷에서 검색해 찾아봤다. 한참 걸렸지만 ‘믿을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윤 씨의 사건을 맡기로 결정한 날 박 변호사는 일요신문과의 통화에서 “윤 씨 입장에서 이춘재의 자백은 하늘이 주신 기회”라며 “이번 사건이 담고 있는 의미도 크다. 사건에 딱 맞는 변호인단을 구성해 잘 해결해볼 생각이다”라고 말했다.
10월 27일, 윤 씨가 30년 만에 처음으로 공식석상에서 입장을 밝혔다. 경찰이 윤 씨를 상대로 2차 참고인 조사를 진행한 날인데, 이에 앞서 기자회견 형식으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됐다. 기자회견을 앞두고 국밥을 먹으며 윤 씨는 “기자회견에서도, 경찰에서도 할 말은 할 거다”라고 말했다.
윤 씨는 이춘재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자백을 안 했다면 이런 일이 없었을 거고, 사건도 묻혔을 거라고 했다. 과거 고문 등 강압수사를 벌였던 경찰관들을 향해 “양심이 있으면 당당히 나와서 사과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나중에 윤 씨는 이 말이 자신이 했던 말 가운데 가장 속을 끓게 만든 말이었다고 했다. 그는 기자회견을 마치고 조사를 받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다리를 절면서 한 칸씩 계단을 오르는 뒷모습이 카메라에 담겼다.
지난 10월 27일, 윤 씨가 30년 만에 처음으로 공식석상에서 입장을 밝혔다. 사진=고성준 기자
#11월 13일, “나는 무죄입니다”
윤 씨는 10월과 11월에 걸쳐 경찰에서 총 6차례 참고인 조사를 받았다. 대부분의 조사 시간은 10시간을 훌쩍 넘겼다. 아침 일찍 나와서 밤늦게 집에 가는 일이 다반사였다. 지칠 대로 지친 윤 씨가 박 변호사에게 “변호사님, 지금 내가 뭐하고 있는 겁니까”라고 물었다. 그러자 박 변호사가 “선생님, 이건 초반부에 불과해요”라고 했다며 웃었다.
9월 윤 씨를 찾아간 형사들이 고문과 강압수사 의혹부터 8차 사건 전반을 확인했다. 경찰 수사 과정에서 이춘재의 범행 수법이 조금씩 드러나고, 미제 사건으로 묻혔던 이유까지 점차 벗겨지기 시작했다. 재심 청구 작업에도 속도가 붙었다.
“나는 무죄입니다. 오늘은 기분이 좋습니다.” 11월 13일, 윤 씨의 두 번째 기자회견이 열렸다. 재심을 청구하는 날이었다. 윤 씨는 이 자리에서 직접 쓴 A4 용지 한 쪽 분량의 입장문을 읽었다. 다시 재판받을 수 있도록 도와준 지금의 경찰과 지인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 아홉 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로 헤어진 외갓집도 찾고 싶다고 말했다. 이날 기자와 만난 윤 씨는 전날 밤 박 변호사 집에서 입장문을 한 줄 한 줄 눌러썼다고 했다. 사전과 인터넷을 찾아가며 썼는데, 4시간이 걸렸다고 했다.
이틀 뒤인 11월 15일 경기남부지방경찰청 수사본부는 이춘재를 8차사건의 범인이라고 잠정 결론 내렸다고 발표했다. 말은 다르게 했지만 수사기관이 “윤 씨는 범인이 아니다”라고 공식화한 셈이다. 윤 씨는 이날 잠을 자지 못했다. 재심까지 생각하면 이제 시작일 뿐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억울함이 한꺼풀 벗겨지는 기분이었다.
지난 11월 13일 재심 청구를 앞두고 열린 기자회견에서 윤 씨가 직접 쓴 입장문을 읽고 있다. 사진=최준필 기자
#12월 7일, 직접조사에 착수한 검찰
12월의 첫 번째 월요일, 윤 씨는 50여 년 만에 외가 친척들을 만났다. 재심청구서 접수 이후 청주상당경찰서의 도움을 받아 외삼촌 3명과 연락이 닿았다. 경찰은 세상을 떠난 윤 씨 부모의 제적등본 등을 분석했고, 어머니 7남매 가운데 외삼촌 3명이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윤 씨는 “막내 삼촌 얼굴에 어머니 얼굴이 그대로 있었다. 시간이 많이 지나 삼촌들이 모두 고령이 됐는데, 조카가 찾아왔다며 기뻐하고 반겨주셨다”라고 했다.
외가 친척들을 만난 주말엔 검찰청에 갔다. 검찰이 이춘재 8차 사건 직접조사에 착수해서다. 재심이 청구되면 법원은 다시 재판을 하는 것에 대해 검찰에 의견을 묻는다. 일반 형사사건 재심 과정에서 검찰이 의견을 제출하기 위해 직접 조사를 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검찰은 전담팀까지 구성해 사실관계 확인에 나섰다. 한국 사법 역사에 한 줄이 더 추가되는 일이었다.
윤 씨는 이틀에 걸쳐 조사를 받았다. 하루는 쉬는 도중 박 변호사가 내려와 뜬금없이 운동을 하러 가자고 했다. 윤 씨는 “박 변호사님도, 검사님도 말해주지 않았지만 과거 8차 사건을 수사했던 경찰들이 조사를 받으러 검찰청에 와 있었던 것 같다. 마주치지 않는 게 좋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취재 결과 실제 과거 경찰들과 이춘재는 이날 검찰 조사를 받았다. 그는 교도관 6명을 봤다고도 했다. 이춘재였다.
윤 씨와 과거 경찰, 이춘재, 수사기록 등 재심청구 내용 전반을 확인한 검찰은 12월 7일 직접조사에 착수했다고 발표했다. 이날을 기점으로 검찰과 경찰의 공방이 열흘 넘게 이어졌다. 30년 전 윤 씨가 유죄 확정판결을 받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당시 국립과학수사연구원 감정 결과를 두고 검경이 서로 다른 의견을 내면서 입장 발표와 반박을 거듭했다.
12월 23일, 검찰은 재판을 다시 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은 의견서를 법원에 제출했다. 직접 조사 결과, 무죄를 인정할 새로운 증거인 이춘재의 진범 인정 진술이 나왔고 수사기관 종사자들의 직무상 범죄(불법감금·가혹행위)가 확인됐으며 국과수 감정서도 허위로 작성됐다고 판단했다.
공은 법원으로 넘어갔다. 12월 24일 법원 등에 따르면, 이춘재 8차 사건 재심 담당 재판부인 수원지법 형사12부(김병찬 부장판사)는 오는 1월 재심 개시 여부를 결정하기로 가닥을 잡았다. 법원이 재심 개시를 결정하면 윤 씨는 30년 만에 유죄 판결을 받았던 법정에서 다시 재판을 받게 된다.
윤 씨가 30년 전 검거 직후 쓴 자필 진술서. 사진=이종현 기자
#어제와 다른 오늘
윤 씨는 12월 한 달이 너무나도 힘들었다고 했다. 가족을 만났고, 경찰에 이어 검찰도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 두 팔 걷고 나섰지만 말로 다 하기 어려울 만큼 슬픈 일이 있었다고 했다. 12월 19일, 갑작스레 날아든 비보 때문이었다. 이날 경기남부청 소속 경찰관이 숨진 채 발견됐다.
세상을 떠난 경찰관은 9월, 윤 씨를 찾아와 “경찰 명예를 걸고 재수사 하겠다”고 했던 그 ‘반장’이었다. 그날 이후 반장은 윤 씨에게 “끝까지 최선을 다하겠다”고 거듭 다짐했다. 윤 씨도 사석에서 그를 전적으로 믿는다고 여러 차례 말했다. 재심을 청구하는 날 썼던 입장문에도 반장의 이름을 쓰고 고맙다고 적었다. 비보가 날아들기 3일 전까지도 윤 씨에게 전화를 걸어 술 한잔 하자고 했다.
윤 씨는 아직도 반장이 없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아직도 생각만 하면 눈물이 나려한다고 했다. 그가 무슨 이유로, 왜 그렇게 세상을 떠났는지 윤 씨는 모른다. 다만 그는 “반장님은 최선을 다했고 나는 그와 이야기하면서 희망을 가졌다. 적어도 8차 사건 수사에서 반장님은 명예로운 경찰관이었다”라고 말했다.
매년 성탄절은 어김없이 찾아왔지만 그동안 윤 씨는 만날 사람도, 찾아주는 사람도 없었다. 다니는 회사가 쉬니 방 안에 가만히 앉아 있다가 때 되면 밥을 지어 먹고 잠드는 게 전부였다. 유일하게 특별한 일이라면 성당에 나가 기도하는 일이었는데, 앞으로도 오늘과 같이 별 탈 없는 내일이 반복되기만을 바랐다.
이번 성탄절은 달랐다. 그를 찾아오는 사람도 늘었고, 하루 종일 응원 전화가 왔다. 외가 친척들과 주말 약속을 잡았으며 지인들과 송년회 계획도 세웠다. 성당에 나가 기도하는 시간도, 내용도 달라졌다. 윤 씨는 늘 새로운 매일이 계속되고 있다고 했다. 어제의 윤 씨와 오늘의 윤 씨, 그리고 내일의 윤 씨는 전혀 다른 사람이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