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금리 속 저해지환급형 등 가성비 경쟁 불참 타격 …“글로벌 보험사들 한국 이해도 부족” 지적도
금융권 관계자들은 글로벌 보험사들의 이름값이나 건전성은 한국에서 큰 의미가 없다고 입을 모은다. 이들은 “우리나라 보험시장을 지배하는 키워드는 인맥과 보험료”라며 글로벌 보험사들의 한국 이해도가 부족하다고 지적한다.
세계 최대 보험사 중 하나인 푸르덴셜생명은 최근 골드만삭스를 매각 주관사로 선정하고 주요 인수 후보들에게 안내서를 발송했다. 수익성과 건전성 등 경영 측면에서 안정적으로 평가받던 푸르덴셜이 갑작스레 시장에 매물로 나오자 보험업계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비록 시장점유율은 이름값에 못 미쳤지만 30여 년간 안정적인 이익을 내며 ‘작지만 강한‘ 보험사로 나름의 위상을 굳혀왔기 때문이다.
푸르덴셜생명은 지난 1991년 국내 시장에 진출한 이후 29년간 영업을 해오고 있다. 한국 진출 당시 저축성보험이 지배하던 국내 시장에서 보장성 상품에 집중하며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특히 연평균 4%에 육박하는 자산운용수익률을 바탕으로 한국 보험시장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았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국내 보험사들은 자산운용보다는 고객에게 받은 보험료를 돌려막기 식으로 운용하는 주먹구구에 가까웠다. 지금도 푸르덴셜은 자산규모가 10위권 밖이지만 당기순이익은 업계 톱5 안에 들 정도로 탁월한 자산운용능력을 자랑한다.
서울 강남구 역삼동 푸르덴셜생명 건물 전경. 사진=일요신문DB
여기에 지난해부터 국내 생명보험 시장에서 급증하기 시작한 저해지·무해지환급형 상품을 취급하지 않는다는 점 역시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도 나온다. 미국에서는 1990년대 중후반부터 이미 저해지환급형 상품을 판매해왔다. 저해지환급형 상품은 조기 해지하는 가입자의 환급금을 장기 유지하는 고객에게 돌려주는 구조다. 보험사 입장에서 저해지환급형 상품의 해지율이 예상보다 낮으면 모든 소비자에게 높은 환급금을 돌려줘야 하기 때문에 위험부담이 크다.
실제로 미국에서는 소비자들이 저해지환급형 상품을 장기간 해지하지 않으면서 많은 보험사들이 파산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이 때문에 푸르덴셜은 저해지환급형 상품을 팔지 않고 종신보험과 연금보험 위주의 영업을 택했다. 하지만 보험 시장에서도 ‘가성비’ 바람이 불면서 소비자들이 저해지환급형 상품에 몰렸고, 그 결과 푸르덴셜의 영업력이 타격을 받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런 가운데 외국계 보험사 여러 곳이 매각을 타진 중이거나 국내 시장에서 독자 생존력을 증명해야하는 상황에 몰려있다. 금융권에 따르면 국내에서 영업하는 9개 외국계 생보사의 2019년 9월까지 당기순이익은 7665억 원으로 전년동기 대비 16.3%(1498억 원) 줄어들었다.
이에 반해 흥국생명 등 중소형 5개사(4176억 원)와 KB생명 등 은행 계열 7개사(2923억 원)는 순이익이 각각 3.7%, 25.7% 증가했다. 외국계의 이 같은 실적 하락은 외국계 보험사 한국 철수설에 힘을 싣고 있다. 푸르덴셜과 같은 미국계 보험사인 메트라이프생명과 라이나생명, 처브라이프, AIG손보에 대한 매각설도 끊이지 않고 있다.
문제는 팔고 싶어도 매각이 녹록지 않다는 점이다. 외국계 보험사 인수를 저울질하는 금융지주사들은 새로운 회계제도 도입 이후 추가 자본 확충에 큰 부담을 느끼고 있는 상태다. 여기에 저금리와 시장포화 우려까지 겹쳐 인수자의 구미를 당길 확실한 매력이 없으면 매각이 쉽지 않을 것으로 금융권은 보고 있다.
금융권은 결국 이들 중 일부만 매각되고 나머지는 독자생존을 위한 돌파구 마련에 나설 것으로 보고 있다. 유력한 방안으로는 인력 축소와 함께 온라인 보험 판매망 확충, 디지털영업 강화 등이 꼽힌다. 다만 사람과 사람이 직접 만나 계약하는 관행이 여전한 국내 보험시장에서 인력 축소와 디지털화는 악수를 두는 일이 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금융권 고위 관계자는 “보험시장에도 디지털 시대가 도래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한국 보험시장에서 영업력을 결정짓는 핵심은 인맥”이라면서 “국내 보험사들도 온라인 판매와 디지털 계약시스템 등 해볼 건 다 해봤지만 결국 구관이 명관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보험대리점이 급성장하고 설계사 스카우트 전쟁이 벌어지는 와중에도 외국계 보험사들은 사실상 강 건너 불구경하듯 대응하지 않았다. 거의 같은 보장 내용을 담은 상품들로 가격경쟁에 나서는 것도 참여하지 않았다. 그들 눈에는 시대에 뒤떨어진 관행으로 보였을 수 있지만, 어찌됐건 그들은 국내 소비자들의 선택을 받지 못했다”고 꼬집었다.
한편 미국 본사는 경영권 프리미엄을 포함해 푸르덴셜생명의 매각가로 2조~3조 원대를 바라는 것으로 알려졌다. 푸르덴셜생명 매각 예비입찰은 올 2월까지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현재 KB금융지주와 우리금융지주 등 금융지주들이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영복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