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태 ‘시간끌기’ 임종헌 ‘딴지걸기’ 내년에야 1심 선고 전망…“유리한 전략이지만 치졸” 비판도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영장실질심사를 마치고 나올 당시의 양승태 전 대법원장. 사진=사진공동취재단
#검찰 증거 부동의로 시간 끌기 전략 선택한 양승태
검찰이 양 전 대법원장 측에게 적용한 혐의는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소송 등 재판개입 △헌법재판소 파견 판사에게 평의 내용 불법 수집 지시 △사법부 블랙리스트 주도 등이다.
모든 혐의를 부정한 양 전 대법원장 측의 법정 전략은 검찰 증거를 대부분 부동의해 일일이 재판부의 판단을 새로 받는 것이다. 2019년에만 53차례 공판기일이 열렸는데 6개월 내내 증인신문만 이어졌다. 전·현직 법관 등 출석한 증인이 36명이나 되지만 아직도 불러야 할 증인이 200명을 넘는다.
방대한 양을 고려해 재판부는 1주일에 2회씩 공판을 열고 있다. 밤 8~9시까지 어이지는 공판도 허다하지만 여전히 갈 길이 멀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5부(박남천 부장판사)는 구속 6개월 만인 2019년 7월 22일 양 전 대법원장에 대해 직권보석결정을 내렸는데 길어질 재판 일정을 감안한 판단이었다.
양 전 대법원장의 건강도 변수다. 최근 양 전 대법원장이 폐암 의심 진단을 받고 수술을 앞둬 재판이 한 달 이상 지연될 예정이다. 1월 14일 폐 수술을 받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재판 일정 변경 요청을 받아들여 재판부는 2월 21일까지 재판을 진행하지 않기로 했다.
#아예 재판을 거부하는 임종헌 전 차장 전략
양 전 대법원장 재판은 그래도 핵심 증거 자료(임종헌 전 차장의 USB) 등에 대해 확인 과정 등 재판이 더디지만 성과가 있다면,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재판은 갈 길이 더 멀다. 임 전 차장 재판은 2019년 5월 말 완전히 멈췄다. 임 전 차장이 재판부를 바꿔 달라며 기피신청을 냈기 때문이다.
임 전 차장 측은 재판장인 윤종섭 부장판사가 불공평한 재판을 할 염려가 있다며 기피신청서를 냈다. 신청서에는 윤 판사가 소송지휘권을 남용하고 피고인의 방어권을 침해하며 부당하게 재판을 진행해왔다는 내용이 담겼다. 2019년 1월 재판이 시작되자마자 임 전 차장 측은 주 4회 재판 예고 등에 대해 “방어권과 변론권이 보장되지 않는다”며 변호인단 11명이 전원 사임하기도 했다.
검찰 출석 당시의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사진=박정훈 기자
2019년 6월 낸 기피신청은 서울중앙지법과 서울고법에서 연달아 기각됐지만 임 전 차장의 재항고로 대법원까지 올라갔다. 대법원3부(주심 민유숙 대법관)는 넉 달 가까이 사건을 붙잡아두고 있다. 2021년이 돼도 선고가 요원할 수 있다는 얘기가 나오는 대목이다.
법원의 한 관계자는 “임종헌 전 차장과 양승태 전 원장 모두 판사 출신답게 하나하나 꼼꼼하게 다투고 반박하려고 해 재판이 오래 걸릴 수밖에 없다. 법원 역시 전례 없는 사건인 만큼 신중하게 판단하려 할 것”이라며 “남은 재판 일정을 고려할 때 올해는 당연히 불가능하고, 또 다른 변수로 연기되면 1심 선고가 나오기까지만 2년 6개월은 걸릴 수도 있다. 2021년 상반기 선고가 지금 상황에서는 가장 현실적인 스케줄”이라고 설명했다.
#“이해는 하지만 사법부 수장이었는데” 비판도
보통 정권 지지율이 4년차, 5년차가 될수록 급격히 떨어진다는 점을 감안한 전략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검사장 출신 변호사는 “문재인 정권 1년 차에 수사를 받기 시작해 가장 지지율이 높은 시점에 ‘적폐’로 구속이 됐다”며 “지금 지지율이 40%대 중후반인 상황인데 정권 말이 되면 더 떨어질 것이고 그럴 경우 자연스레 여론이 재판 결과에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사건에 관련된 한 법조계 관계자는 임종헌 전 차장이 선택한 재판부 기피신청에 대해서는 “제대로 된 판단을 받지 못할 것에 대한 두려움이 크다고 들었다”며 “기피신청을 대법원까지 올라가서 다투는 것은 결과를 바꾸어 보겠다는 의지도 있지만 2년이라는 재판부의 근무 기간을 고려해 새로운 재판부로부터 결론을 받겠다는 의도도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재판 장기화 전략에 대해 좋은 평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일각에서는 “사법부 수장들이 재판을 되레 더 회피하는 모습이 보기 좋지 않다”는 지적도 나온다.
앞선 법조계 관계자는 “한때 사법부를 대표하는 수장들이었는데 많이 억울하더라도 잘못한 부분만 인정하고 처벌을 받으면 되레 법원 내에서도 안쓰럽게 보는 시선들이 더 생기지 않았을까 싶다”며 “그 밑에 있던 다른 재판관들은 그런 억울함이 없어서 순순히 재판을 받는 게 아닌데 두 수장이 모든 책임을 밑에 있던 실무진에 떠넘기고 ‘무죄’를 주장하는 것은 보기 좋지 않다”고 지적했다. 2심, 3심 등 사법부가 가진 시스템 안에서 충분히 다툴 수 있는데 1심 재판부터 과도하게 모든 카드를 다 꺼내들었다는 비판이다.
함께 기소된 다른 판사들 재판은 1심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 사법행정권 남용 재판 7건 가운데 2건은 1월 13일과 14일, 첫 선고가 내려진다. 추가기소 된 피고인 중 유해용 전 대법원 수석재판연구관(대법원 기밀자료 무단 반출 혐의)과 임성근 전 서울중앙지법 형사수석 부장판사(일본 산케이신문 서울지국장을 지낸 가토 다쓰야 사건 재판 등 개입 혐의)가 각각 선고를 받을 예정이다. 재판에 개입해 법관 독립을 침해했다는 ‘직권남용’ 혐의에 대해 사법부의 첫 판단이 나올 예정이어서 관심이 쏠린다.
2월 전에 추가 선고도 이뤄질 전망이다. 압수수색 영장에 담긴 검찰의 수사기밀을 유출한 혐의 등으로 재판에 넘겨진 신광렬 전 서울중앙지법 형사수석 부장판사와 성창호·조의연 당시 영장전담 부장판사 재판 등도 2월 정기인사 전에 1심 판결이 나올 것으로 보인다. 사건 관련 판사는 “양 전 원장과 임 전 차장은 곧 나올 법관들의 선고 결과를 보고 전략을 새롭게 짤 수 있다”며 “그런 부분이 향후 재판에 또 다른 관전 포인트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서환한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