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공판기일 열려…재판부 “윤씨에 죄송, 무죄 선고 여부 집중” 변호인단 “과거 수사 전반 잘못 모두 밝혀내야”
수원지방법원 형사 12부(김병찬 부장판사)는 2월 6일 이춘재 연쇄살인 8차 사건 재심 공판준비기일을 열었다. 공판준비기일은 피고인의 혐의에 대해 검찰과 변호인 양 쪽이 쟁점을 정리하고, 향후 공판을 어떻게 진행할지 조율하는 자리로 본격적인 재판에 앞서 이뤄지는 절차다.
이춘재 8차사건 재심 첫 공판기일에 참석한 윤 씨. 사진=문상현 기자
#검찰도 변호인도 재판부도 “윤 씨는 무죄” 한 목소리
검찰과 재심청구인 윤 아무개 씨를 대리하는 공동변호인단은(박준영 변호사, 법무법인 다산 김칠준, 이주희 변호사) 이날 법정에서 윤 씨의 무죄 입증과 실체적 진실 발견에 대해 같은 의견을 냈다. 그동안 열렸던 재심 재판은 물론 일반 형사사건을 보면, 검찰과 변호인단 양 쪽이 같은 의견을 내는 일은 드물다. 일반 형사재판에서 검찰은 주로 유죄 입증에 주력하고, 변호인단은 이를 방어하는 데 집중한다. 재심 사건에선 과거 수사기관과 사법부가 내린 결론이 잘못됐다고 인정하는 일인 만큼 검찰은 부정적이거나 신중한 모습을 보여왔다.
그러나 검찰은 윤 씨가 30년 전 범인으로 몰리게 됐던 당시 수사기록,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감정결과서 등 과거 증거물과 함께, 2019년 11월 이후 이 사건을 직접 재수사한 기록 등 새로운 증거물을 제출한다고 밝혔다. 모두 윤 씨가 범인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할 증거들이다.
검찰은 “윤 씨가 재심에서 ‘무죄’를 받을 수 있다는 가능성이 높은 만큼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 새로운 증거물을 제시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과거 윤 씨 자백 진술이 허위고, 최근의 결백 주장이 신빙성이 높다는 점을 확인했다. 신속한 권리 구제를 위해 최대한 협조하겠다”고 말했다. 윤 씨를 대리하는 박준영 변호사와 법무법인 다산(김칠준, 이주희 변호사) 등 공동변호인단도 “이번 재판은 검찰과 변호인단이 윤 씨의 무죄를 입증하고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밝히기 위해 협업한다는 특수성을 가지고 있다”며 검찰이 제출하는 증거에 대부분 동의하고 협조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양 쪽 의견을 들은 재판부는 별도 입장을 밝혔다. 재판부는 “윤 씨는 억울하게 잘못된 재판을 받아 장기간 구금됐다. 법원의 판사로 근무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굉장히 죄송함을 느낀다”고 사과했다. 이어 “검찰은 윤 씨가 무죄일 것이라는 생각으로 기록을 제출하고 있고, 이에 관해 변호인이 별다른 이의 없이 동의한다면 무죄 선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말했다.
#8차 사건 진실 밝힐 곳은 재심 법정뿐
검찰과 변호인단이 ‘협력’ 의사를 밝히면서 준비 절차는 빠르게 진행됐지만, 이 과정에서 재판부와 변호인단이 다른 의견을 내면서 잠시 공전했다. 재판부가 결론에 도달하는 길에 대해 변호인단에 의견을 물으면서부터였다.
앞서 검찰과 변호인단은 의견을 밝히는 과정에서 윤 씨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과거 수사와 재판 과정 전반의 문제점을 모두 확인하겠다고 설명했다. 검찰은 “2019년 11월부터 착수한 직접수사 과정에서 당시 수사기관 담당자와 전문가들을 조사했지만, 실체적 진실을 밝히기 위해 다시 신청할 계획”이라고 밝혔고, 변호인단은 “최근 경찰 수사 결과 과거 8차 사건 수사 과정에서 윤 씨가 검거되기 전 19건이 더 수사됐다. 이 기록도 법정에 증거로 제출돼 조사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이번 재판의 본질은 윤 씨에 대해 무죄를 선고할 수 있는지 여부”라며 “검찰이 제출한 이춘재 자백과 국과수 감정서 문제점에 대한 기록을 종합해보면 이것만으로도 윤 씨가 진범이 아니라는 게 인정될 수 있다. 그런데도 그걸 넘어서서 과거 수사기관과 국과수가 어떤 잘못을 했는지 밝혀내는 게 중요한가?”라고 물었다. 즉 재판부가 이번 재심에서 집중할 내용은 검찰이 제출한 증거로 윤 씨에게 무죄를 선고할 수 있는지고, 과거 수사기관이나 국과수가 어떤 잘못을 했는지 밝혀내는 일은 별개라는 뜻이다.
실제 이춘재의 자백과 국과수 감정서 문제가 경찰과 검찰 수사 과정에서 ‘새로운 증거’로 확인돼 형사소송법 제420조 5호 재심 사유(무죄를 인정할 명백한 증거가 새로 발견될 때)를 충족한다. 검찰 역시 이를 근거로 무죄로 판단한다고 밝혔고, 그 판단을 입증할 증거들을 제출하고 있는 만큼 재판부가 결론을 내리는 데에는 무리가 없다. 재심을 청구한 윤 씨 입장에서도 재판부의 뜻대로 증거 조사 범위가 줄어들면 그만큼 억울한 누명을 벗을 수 있는 시간도 빨라진다.
그러나 8차 사건의 실타래는 꼬일 대로 꼬여있다. 30년 만에 진범이 나타났고, 과거 수사기관의 감금과 폭행이 있었다는 점과 국과수 감정서가 잘못됐다는 점이 뒤늦게 드러났지만 당시 수사 관계자 등은 이를 부인하고 있다. 또 잘못된 국과수 감정서와 관련해 2019년 재수사에 착수한 검찰은 ‘조작’이라고 결론 내렸고, 경찰은 ‘오류’라고 판단하면서 혼선이 빚어졌다. 오랜 시간 감춰져 있었고, 현재도 풀리지 않고 있는 진실을 밝힐 수 있는 곳은 이번 8차 사건 재심 법정뿐인 셈이다.
이에 대해 박준영 변호사는 재판부에 “8차 사건은 살인사건인데도 1심과 항소심, 대법원 판단이 9개월 만에 내려졌고, 그 사이 윤 씨는 국선 변호사의 조력도 받지 못했다. 그런데 재심마저 ‘무죄니까 그냥 적당히’라는 건 말이 안 된다”고 강조했다. 박 변호사는 “당시 경찰 및 국과수 관계자들도 불만을 가질 수 있다. 그들이 반론을 할 수 있는 곳도 법정뿐이다”라며 “법정에서 과거의 기록과 최근의 재수사 내용을 모두 검토해서 일말의 다른 가능성이 없다는 걸 확인되고, 이를 통해 이춘재 연쇄살인사건의 진실이 이 법정에서 확인되길 희망한다”고 덧붙였다.
김칠준 변호사도 “재판 과정에서 0.1%의 불신 가능성도 없는 확고한 사실인지, 실체적 진실인지, 차고 넘치게 재판에서 증거 조사를 해야 한다”며 “당시 경찰이나 이춘재 등이 법정에 와서 자백하고 확인하는 것이 피고인에 대한 위로이고, 이춘재에 의해 억울하게 희생당한 사람들에 대한 위로이며, 피해를 회복하는 사회적 출발점이 된다”고 말했다.
변호인단의 의견을 들은 재판부는 윤 씨의 유무죄 판단에 한정하지 않고 과거 조사 과정 등에 대해 총체적으로 증거조사를 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재판부는 공판준비기일을 한 차례 더 열고, 본 재판에 들어갈 방침이다. ‘견해 차이’와 별도로 재판부는 재심청구인 측에 국민참여재판을 하겠냐고 의사를 묻는 일도 있었다. 이춘재 8차 사건은 애초에 법리적으로 국민참여재판이 불가능한 사건이다. 재판장인 김병찬 부장판사는 오는 2월 12일 퇴임하고, 다른 배석 판사들은 같은달 말 인사이동을 앞두고 있다. 다음 기일부터는 다른 재판부가 심리하게 된다.
윤 씨는 겉으로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는다. 30년을 그렇게 살아왔다. 취재진이 몰려들면 굳은 표정을 짓고, 심정을 물으면 담담하다는 말만 남기는 이유다. 다만 감정의 변화가 있으면 얼굴이 상기되고 말이 빨라진다. 법정에서 나와 기자들을 만나고 난 뒤 윤 씨는 “단순히 무죄 선고만을 받기 위해 이 자리에 온 게 아니다. 인생의 절반인 30년의 처음과 끝의 진실을 알고 싶어서 왔다. 법정에서 모두 밝혀졌으면 한다”고 말했다. 윤 씨의 얼굴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누구보다 이날을 기다려왔던 그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