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8년 불발탄 제거 현장서 숨져 국립묘지 안장돼…평생 대문 열어둔 모친은 그 사실 모르고 5년 전 숨져
1950년 군 창설 이래 비순직 처리된 사망군인은 3만 9000여 명에 달한다. ‘개인적 사유’에 의한 자해 사망인 경우가 상당하다. 이들은 국립묘지에 묻힐 수 없었다. 대통령 소속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위원장 이인람)는 2018년부터 이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부대 내 구조적 원인을 찾아내 순직 처리로 이끄는 작업을 해오고 있다.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는 2019년 9월 13건의 의문사를 진상규명한 뒤 매월 성과를 내고 있다. 일요신문에서 진상규명된 사연을 연재한다. |
[일요신문] “아버지란 단어를 입 밖으로 내 본 적이 없죠. 혼자 중얼거릴 때 빼곤. 원망이라기보다는 어딘가 살아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평생. 군에서 아무 소식이 없었으니까요.”
박육제 씨는 아버지 얼굴을 본 적이 없다. 그가 생후 8개월이던 1956년 12월 24일 아버지 박종봉 씨는 군에 입대했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다. 깜깜무소식이었다. 고작 10가구 모여 사는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동당리 산골짜기에 살면서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교통도 통신도 갖춰지지 않은 시절이었다. 그저 기다릴 뿐이었다. 1956년 4월 태어나 당시 생후 8개월이었던 아들은 아버지를 기다리다가 머리가 희끗해졌다. 이젠 당시 아버지보다 더 나이 많은 아들들이 생겼다.
박육제 씨의 어머니는 평생 아버지를 기다리다가 5년 전 돌아가셨다. 끝내 아버지 소식을 알지 못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언제고 돌아올까 대문을 항상 열어두고 지냈다. 이사도 가지 못했다. 결혼 1년도 채 되지 않은 시점부터 공석이었던 가장의 자리를 메우느라 어머니는 결코 순탄치 않은 삶을 살았다. 형편이 좋지 않아 하나뿐인 아들인 박육제 씨를 학교에 보내지도 못했다. 집안의 장남이자 외동아들이었던 아버지를 대신해 어머니는 시부모를 모시고 살았다. 할아버지는 아버지를 “엄청난 효자”였다고 회상하곤 했다. 박육제 씨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엄청난 효자가 왜 아무 말도 없이 집을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건지 말이다.
군대 간 아버지는 생후 8개월이었던 아들이 65세가 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아버지는 군 입대 2년도 채 되지 않아 사망한 뒤 국립묘지에 안장돼 있었다. 아들은 한평생 아버지를 기다려왔다. 사진은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전경으로 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련없다. 사진=연합뉴스
가족 모두 아버지를 가슴에 묻고 살았다. 아버지가 군에서 죽었다는 소문도 마을에 떠돌았지만 단정할 수도 없었다. 군에서 죽었다면 군에서 연락이 있었을 테니 말이다. 시신이 아니더라도 사망통지서라도 집으로 보낼 노릇이었다. 박육제 씨네 집으로는 아무 것도 온 게 없었다. 당치 않는 생각도 많이 했다. 혹시 드라마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기억상실증에 걸린 건 아닐까, 혹시 가족을 버리고 월북한 건 아닐까.
“그땐 전쟁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고 자의든 타의든 북으로 가는 경우도 많았죠. 혹시 그런 거 아닐까 생각도 했었어요. 어릴 때부터 아버지가 행방불명됐다는 얘기를 듣고 지냈어요. 저는 너무 어렸으니까 찾을 생각도 못 했죠. 국가 체계가 잘 잡혀있질 않고 허술했으니까 소식 없이 어딘가에 살아 있을 거라고 한평생 생각한 거죠.”
박육제 씨는 아버지를 많이 그리워했다. 빈자리가 컸다. 성장하면서 아버지를 찾을 생각은 못 했다. 누군가 아버지 얘기만 꺼내면 집안은 초상집 분위기가 됐다. 그렇게 삶에 치이며 세월에 떠밀려 아버지에 대한 마음을 한쪽에 접어두고 살았다.
아버지를 찾을 수 있을 거란 기대는 없었다. 다만 한번쯤 찾으려고 노력은 해봐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했다. 그래야 죽을 때 아들들에게 떳떳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죽었다면 어디서 죽었는지 행방불명이 됐다면 마지막 목격지가 어딘지만이라도 알고 싶었다. 그저 아버지가 마지막 목격된 장소에서 흙 한줌 가져다가 어머니 묘소 옆에 가져다 둘 심산이었다.
박육제 씨는 2019년 5월 10일 육군본부에 아버지의 행방을 알고 싶다는 민원을 제기했다. 놀라운 답변이 돌아왔다. 아버지 박종봉 씨는 국립묘지에 안장돼 있다고 했다. 안장일은 1958년 9월 24일이었다. 입대한 지 1년 8개월 되던 시점이었다. 아버지는 월북이 아닌 군에서 사망한 것이었다. 그것도 모르고 박육제 씨는 65년 한평생을 기다려왔다.
“아버지 묘역을 찾아가봤죠. 그 앞에 섰는데 복잡한 마음이야 말로 다 할 수 있겠습니까. 65년입니다. 속으로 아버지께 너무 늦게 찾아봬서 죄송하다고 사죄했어요. 눈물 납디다. 어머니 생각나더라고요. 그 마음을 어떻게 표현하겠습니까.”
1950년대 당시 소화기보병들이 로켓포를 발사하고 있는 장면. 사진=historybyzim 사이트 캡처
박육제 씨는 2019년 7월 11일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에 진정을 냈다. 아버지가 어떤 일로 사망했고, 군은 왜 그 소식을 가족에게 알리지 않았는지 알고 싶었다. 진상규명을 요청했다. 군은 아버지 묘역만 알려줬을 뿐 정확한 사망 경위를 알려주진 않았다.
위원회 조사 결과, 박육제 씨 아버지 고 박종봉 씨는 로켓포 불발탄을 제거하다가 불발탄이 터지는 사고를 당해 사망했다고 밝혀졌다. 사건보고서가 남아 있지 않았지만 위원회는 당시 목격자와 군 기록 일부를 토대로 진상을 파악했다. 고인은 논산 육군훈련소를 거쳐 6보병사단 7연대에 전입한 뒤 소화기보병으로 근무했다. 사망 당시 고인은 일병이었다. 1958년 8월 18일 군 병원으로 옮겨진 뒤 20분 만에 사망했다. 사인은 뒤통수 부위의 열창, 뇌내출혈 등 머리 부위 손상이었다. 군 기록에 따르면 사건 발생 당일 고인의 부대는 주 전투진지 방어 훈련 중이었다.
군 기록은 ‘불발탄 사고’를 알고 있는 사람들의 기억과 일치했다. 박 아무개 씨는 고인의 먼 친척이자 종봉 씨 사고를 목격한 동료 강 아무개 씨의 아내였다. 박 씨는 남편에게 “당신과 같은 마을인 동당리에 사는 박종봉과 같이 군 생활을 했는데, 박종봉이 훈련을 받다가 불발된 수류탄을 확인하러 가던 도중 수류탄이 터져 현장에서 사망했다”고 들었다고 전했다. 강 씨는 고인과 함께 입대해 같은 부대에 배치돼 소화기보병으로 근무했다. 고인과 같은 마을 사람이자 같은 부대 동료였던 박 아무개 씨도 같은 얘길 군 복무 당시 들었다고 답했다.
고인을 국립묘지에 안장까지 한 군이 가족에게 이 사실을 알리지 않은 이유는 황당했다. 사실 군은 사망 사실을 알리려고 서신을 가족에게 보냈다. 하지만 잘못된 주소로 보냈다. ‘경남 산청군 시천면 동당리’가 아닌 ‘경남 사천군 사천면 동당리’로 보냈다. 당시 행정병의 실수였다. 실제 사망자 화장보고서에도 주소지가 ‘경남 사천 사천 동당’으로 쓰여 있다. 전사자명부의 주소지 또한 ‘경남 사천 사천 동’으로 기재돼 있다. 돌아온 군 설명은 “아마도 기록을 작성하는 관계자가 잘못 기재한 것으로 추정된다”는 것뿐이다.
결국 행정병의 실수, 그리고 군의 안일한 대처가 한 가정의 운명을 바꾼 셈이다. 망인인 박종봉 씨의 아내는 한평생 그를 기다리다가 유명을 달리했고, 아들은 어려운 형편을 견디며 학교도 가지 못했다. 국가유공자 혜택은 당연히 받지 못했다.
“화를 낸다고 해서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누구를 원망하겠어요. 전쟁 직후라 나라도 어수선했고, 그냥 세상 탓을 해야지 개인 탓을 할 수 있겠어요. 다만 어머니가 이 소식을 알고 가셨으면 좋았을 텐데, 아버지 묘역을 찍어서 인화해서 어머니 묘소 옆에 놓아드렸어요. 그나마 이제라도 할 일을 다 한 기분입니다.”
위원회는 지금이라도 박종봉 일병을 순직 처리하고 그에 합당한 예우를 다할 것을 국방부에 권고했다. 박종봉 일병처럼 전사나 순직 통지가 제때 이뤄지지 않는 사건이 5400건이 넘는다. 이 가운데 3400여 건은 10년이 지나서야 유가족에게 알렸고, 2000여 건은 아예 통지조차 되지 않았다. 위원회는 밝혀지지 않은 사례가 적지 않다고 보고 ‘실종’ ‘행불’ ‘변사’ ‘병사’ 등 사유로 전역 구분된 인원에 대한 전수조사를 요청했다.
한상미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 조사3과 2팀장은 “당시 소속부대와 업무 담당자가 망인에 대한 최소한 예를 갖추었더라면 이런 어처구니없는 생이별은 없었을 것”이라며 “당시 행정병의 실수로 치부해버릴 것이 아니라 군은 지금이라도 전수조사를 통해 비슷한 아픔을 풀어주는 책임 있는 자세를 보일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박현광 기자 mua123@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