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철수 두 번 퇴짜 끝에 국민의당 회귀…“한나라당·새누리당 등 군소·표절정당엔 후하더니 원내 신당엔 엄격”
2월 5일 미래한국당 중앙당 창당대회에서 발언하는 한선교 미래한국당 대표. 사진=박은숙 기자
선관위는 당명 사용 가능 여부를 유권해석할 권한을 가진다. 정당법 제41조(유사명칭 등의 사용금지) 3항은 “창당준비위원회 및 정당의 명칭(약칭 포함)은 이미 신고된 창당준비위원회 및 등록된 정당이 사용 중인 명칭과 뚜렷이 구별되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새로운 정당 명칭이 기존 정당과 구별되는지 판단하는 건 선관위 몫이다. 2월 19일 기준 선관위로부터 당명 사용 허가를 받지 못한 당명으론 비례한국당, 안철수신당, 국민당, 민주통합당 등이 있다.
우선 선관위는 1월 13일 비례한국당의 당명 신청을 불허했다. 비례한국당은 준연동형 비례대표제 입법 이후 자유한국당이 꺼낸 비장의 카드였다. 준연동형 비례대표제에 따라 선거가 진행될 경우 지역구 의원을 많이 배출할수록 비례대표 의석 확보는 불리해진다. 이에 자유한국당은 비례대표 전문 자매정당 창당을 통해 지역구과 비례,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겠다는 투트랙 전략을 세웠다.
이러한 전략은 난관에 부딪혔다. 선관위가 ‘비례’라는 단어가 포함된 당명 사용을 불허했기 때문이다. 선관위는 1월 13일 오후 정부 과천청사에서 전체 회의를 개최한 뒤 보도자료를 통해 “‘비례OO당’은 이미 등록된 정당 명칭과 뚜렷이 구별되지 않는다”면서 “당시 창당 절차를 밟고 있던 비례자유한국당, 비례한국당, 비례민주당에 대한 당명 사용을 불허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선관위는 “비례는 사전적 의미만으로 정당 정책과 정치적 신념 등 가치를 내포하는 단어로 보기 어렵다”면서 “비례OO당의 경우, 유권자들이 지역구 후보를 추천한 정당과 같은 정당으로 인식할 수 있는 이른바 후광효과가 일어날 수 있다”고 당명 불허 결정 사유를 설명했다.
선관위 결정에 심재철 자유한국당 원내대표는 “선관위가 비례정당 명칭을 불허한다면, 선관위 스스로 정권의 하수인임을 자인하는 것”이라며 주장했다. 자유한국당은 선관위의 당명 결정 불허 방침에 대한 비판을 이어가는 한편 새로운 작명에 돌입했다. 자유한국당 내부에선 “비례한국당 말고도 당명으로 쓸 이름은 많다”라는 이야기가 돌았다.
자유한국당은 ‘라임(시가에서 시행의 일정한 자리에 같은 운을 규칙적으로 다는 일)’을 살리는 방향으로 비례정당 명칭을 새롭게 만들었다. 미래한국당이었다. 비례와 모음 구조가 비슷한 ‘미래’라는 단어를 활용해 선관위의 지적사항을 바로잡은 셈이다. 비례한국당 명칭을 불허한 지 정확히 한 달 후인 2월 13일 선관위는 미래한국당 당명 사용을 허용했다.
2월 17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미래통합당 출범식. 사진=이종현 기자
‘비례’의 라임을 살리는 데서 착안한 ‘미래’라는 단어는 또다시 요긴하게 활용됐다. 2월 13일 박형준 통합신당준비위원장은 새로운 당 명칭을 미래통합당이라고 발표했다. 박 위원장은 “새로운 정당이 중도·보수 통합 정당임을 알리는 것이 중요하다 판단했다”면서 “통합이라는 가치, 연대라는 의미, 그런 차원에서 (새 당명을) 미래통합당으로 정했다”고 말했다. 미래통합당은 선관위의 작명 심사도 통과한 것으로 확인됐다. 선관위 관계자는 일요신문과 통화에서 “2월 18일부로 미래통합당 정당 명칭이 등록됐다”고 밝혔다.
비례정당인 미래한국당이 의원 20명 이상을 영입할 경우 다가올 총선에서 비례대표 투표용지 두 번째 칸에 이름을 올릴 수 있게 된다. 원내 제1야당인 미래통합당은 지역구 투표용지 두 번째 칸에 후보자 이름이 오른다. 지역구-비례대표 투표용지 두 번째 칸을 미래통합당-미래한국당이 나란히 점령할 것으로 보인다. 이를 두고 미래통합당 일각에선 “자매정당의 시너지 효과가 극대화될 것”이라는 장밋빛 전망이 나오고 있다.
2월 9일 국민당 발기인대회에서 발언하는 안철수 전 의원. 국민당은 선관위로부터 당명 사용 불허를 통보받았다. 사진=박정훈 기자
3년 전에도 ‘미래’라는 단어를 활용하려 했던 정치인이 있었다. 안철수 전 의원이다. 2018년 2월 안 전 의원이 이끄는 국민의당은 바른정당과 통합을 결심했다. 신당 당명은 미래당으로 내정됐다. 하지만 미래당은 선관위로부터 사용 불가 판정을 받았다. 당시 ‘우리미래’라는 정당이 존재했는데, 이 정당과 명칭이 뚜렷하게 구분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다. 결국 국민의당과 바른정당은 바른미래당이란 이름으로 통합을 마쳤다.
3년 전 선관위 작명 심사에 고배를 마셨던 안 전 의원 잔혹사는 2020년에도 계속됐다. 1월 19일 귀국과 동시에 정계 복귀를 선언한 안 전 의원은 신당 창당을 선언했다. 안 전 의원은 ‘안철수 신당(가칭)’이란 이름으로 창당준비위원회를 꾸려 선관위에 등록을 신청했다. 하지만 선관위는 2월 6일 ‘안철수 신당’ 당명 사용을 불허했다. 선관위는 “현역 정치인의 이름이 포함된 정당명을 허용하면 정당 활동이라는 구실로 사실상 사전 선거운동을 하는 것이 가능해진다”고 불허 이유를 설명했다.
이에 안 전 의원은 새로운 정당명으로 국민당을 제시했다. 하지만 선관위는 2월 13일 다시 한번 불허 의사를 밝혔다. 선관위는 “이미 등록된 정당인 ‘국민새정당’과 명칭이 뚜렷하게 구분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국민새정당은 2017년 4월 15일 등록된 군소정당이다. 국민당 창당준비위원회 관계자는 “국민새정당은 국민의당이 존재하는 상태에서 등록이 허용됐다”면서 “국민의당과 국민새정당은 뚜렷이 구별되고, 국민당과 국민새정당은 뚜렷이 구별되지 않는다는 것이 가능한 논리인가”라고 반문했다.
국민당 창당준비위원회는 선관위의 당명 사용 불허 결정을 “고무줄 잣대를 들이밀고 있다”고 비판했다. 국민당 창당준비위원회는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린 것이냐”며 “한 번은 우연이지만, 두 번은 필연이다. (선관위가) 청와대 눈치를 보며 스스로 정치를 하고 있다는 의혹을 지울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2월 14일 안 전 의원 측은 새로운 당명을 국민의당(가칭)으로 결정했다. 20대 총선 당시 안 전 의원이 이끌던 당과 이름이 같다. 선관위 작명 심사 삼수에 도전한 안 전 의원은 마침내 당명 사용을 허가받았다. 국민의당은 이날 선관위에 창당준비위원회 등록을 마치고, 본격적인 창당 절차에 돌입했다.
2월 14일 3당 통합을 선언한 민주평화당 박주현 통합추진특별위원장, 바른미래당 박주선 대통합개혁위원장, 대안신당 유성엽 통합추진위원장. 사진=연합뉴스
2월 17일 선관위는 민주통합당에 대한 당명 사용 불허 결정을 내렸다. 바른미래당·대안신당·민주평화당이 합당한 뒤 사용할 계획이었던 당명이었다. 선관위는 정당법 41조를 근거로 민주통합당 당명 사용을 반려했다. 선관위는 민주통합당이란 당명이 2016년 원외에서 활동한 통합민주당과 유사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정치권에선 21대 총선을 앞둔 상황에서 선관위가 그 어느 때보다 까다롭게 정당명 심사를 진행하고 있다는 불만이 파다하다. 한 정치권 관계자는 “한나라당, 새누리당, 친박연대 같은 이른바 ‘군소·표절정당’들의 등록은 허용한 선관위가 원내 신당에게는 유독 엄격하게 이중잣대를 적용하는지 모르겠다”고 하소연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정당법 41조에 ‘뚜렷이 구별돼야 한다’는 문구가 나오는데, ‘뚜렷’의 기준이 모호하다”고 지적했다.
이런 지적들과 관련해 정치평론가 윤태곤 더모아 정치분석실장은 “실제로 (선관위가) 까다롭게 당명을 심사하는 면이 있기도 하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부분도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윤 실장은 “최근 신당을 창당하는 사례가 굉장히 많다. 대중에게 잘 알려진 미래통합당이나 국민의당뿐 아니라, 각종 비례형 군소정당들이 연이어 창당을 하고 있다. 신당 등록 신청이 많이 들어오다 보니까, 겹치는 이름·단어도 많아지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윤 실장은 “여기다 비례 정당 관련 여론이 좋지 않다. 이런 부분 역시 당명 심사를 더욱 까다롭게 하는 이유로 작용했을 수 있다”고 덧붙였다.
이동섭 기자 hardou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