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밋빛 전망’ 두 달 사이 급반전…미팅·실사 취소로 IPO 차질, 해외 부동산 투자 제동 영향 분석
# 증권사 올해 실적 하락 불가피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증권사 56곳의 당기순이익은 4조 9000억 원을 기록했다. 2018년과 비교해 17.8% 늘어나면서 역대 최대 실적을 기록했다. 미중 무역갈등 격화와 글로벌 경기침체에도 높은 실적이 나오면서 수십억 원대 성과급이 지급됐고, 일부 증권사는 설립 이후 최대 규모 배당을 결정하기도 했다. 올해 초에는 지난해보다 실적이 더 나아질 것이란 장밋빛 전망도 나왔다.
최근 급락장이 이어지면서 이를 매수 기회로 활용하는 개인투자자들이 늘면서 증권사들의 위탁매매수수료(브로커리지) 수익이 큰 폭으로 늘었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코스피 시장의 3월 일평균 거래대금은 9조 9500억 원에 달했다. 지난해 3월 4조 9000억 원보다 두 배 늘었다. 2011년 4월 9조 1990억 원을 넘어 역대 최고치를 기록할 가능성이 높다.
여의도 증권가 전경. 사진=박은숙 기자
그러나 증권업계에선 깊은 한숨만 터져 나온다. 최근 증권업계는 스스로 “올해 1분기 실적이 부진할 것”이라며 자사의 목표 주가를 낮춰 잡았고, 한국기업평가 등 신용평가사는 대형 증권사들의 무더기 신용등급 하락 가능성을 예고하기도 했다. 일부 증권사들은 자체적으로 ‘1분기 실적 하락, 2분기 어닝쇼크’를 예상하고 있다.
코로나19 여파로 증권사들의 핵심인 IB(투자은행) 부문이 사실상 사실상 ‘개점휴업’에 접어든 것이 주요 원인이다. 그동안 증권사들은 전통적인 수익원이었던 브로커리지 수익을 경쟁적으로 낮춰왔다. ‘온라인 매매 수수료 0원’은 이제 업계에선 ‘당연한 일’로 여겨지는 등 브로커리지 부문에선 수익을 사실상 포기했다.
수익 다각화와 미래 성장동력 명목으로 그 자리를 채운 게 IB 사업이다. 대형 증권사들을 중심으로 조직을 신설하거나 개편해 IB 부문 몸집을 크게 키웠고, 최고경영자 선임 1순위는 IB 출신이었다. 지난해 사상 최대 실적은 IB 부문 성과 덕분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올해 증권사들은 경쟁적으로 IB 부문 강화를 내세웠다.
# 순식간에 얼어붙은 IB 부문
기대를 모았던 IB 부문의 분위기는 단숨에 얼어붙었다. 업계 관계자들의 말을 종합하면 조직을 이원화 하거나 재택근무를 하면서 업무의 핵심인 실사와 미팅이 연기되거나 취소됐다. 이 때문에 신규 프로젝트는 사실상 막혔고, 기존 투자나 거래도 일찌감치 마무리된 경우도 있다.
증권사 IB 사업의 한 축인 IPO(기업공개·상장) 시장은 얼어붙어있다. IPO는 그동안 증권사들이 IB 사업을 강화하면서 조직 등 몸집을 키워온 부문이다. 지난해 1분기 2018년과 비교해 56% 증가한 7794억 원의 IPO 공모금액을 기록했으나, 올해는 IPO 기업들이 잇따라 일정을 취소하고 있다. 증시 변동성이 커지면서 제대로 된 기업 평가를 받지 못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통상 3월은 회계 결산 시점인 만큼 IPO 비수기로 통한다. 그러나 문제는 오는 4월 일정도 비어있다는 점이다. 다른 증권사 관계자는 “3월 말부터 본격적으로 상장 예비심사나 IPO 승인 등이 이뤄져야 하반기 딜이 시작되지만 최근 관련 미팅이나 출장이 취소되거나 연기돼 준비를 못하고 있다. 지난해 일찌감치 절차를 밟아온 기업들도 일정 조정을 요청한다. 지금의 불안정한 추세가 길어지면 공모를 취소하거나 연기하는 기업은 더 늘어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고 말했다.
굵직한 딜을 따오던 다른 부문들도 사정은 같다. 국내외 기업 M&A(인수·합병) 과정에 참여해 인수 자금의 대출을 주선해주는 인수 금융 업무를 맡거나, 회사채 발행 역시 글로벌 증시 혼란으로 기업들의 자금 흐름이 꼬이면서 시장이 크게 위축됐다.
해외 투자도 줄줄이 막히고 있다. 증권사들이 IB 부문을 강화하면서 대표적인 수익 다각화 사업으로 꼽았던 부문이다. 저금리를 기반으로 해외 투자가 유행처럼 번지면서 증권사들은 공격적으로 시장에 뛰어들었다. 국내 증권업계가 선택한 해외 대체투자는 주로 해외 주요 도시의 부동산과 인프라다. 부동산이 48%, 인프라가 34%로 절대적 수준을 기록하고 있다. 오피스와 호텔, 리조트 등의 비중이 가장 크다.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증권사들은 관행처럼 일단 총액 인수 후 기관투자자와 일반투자자들을 대상으로 셀다운(인수 후 지분매각) 하는 형태로 입찰을 해왔다. 일부 ‘알짜’ 부동산 입찰에선 투자자도 모집하지 않고 뛰어드는 증권사가 나오기도 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물량이 쌓였고, 이 때문에 셀다운을 못한 ‘재고’가 늘었다는 점이다. 2018년 5000억 원 규모였던 셀다운 재고는 2019년 2분기 1조 9000억 원으로 늘었다. 증권업계에선 전체 규모를 공개하지 않고 있어 실제로 팔리지 않은 물량 규모는 더 클 것이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이 가운데 코로나19 여파로 해외 부동산 투자에 제동이 걸렸다. 세계 각국이 입국에 제한을 두거나 이동을 막으면서 현지 실사 자체가 어렵기 때문이다. 기본적인 절차가 중단되면서 투자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여기에 기관투자자들은 통상 증권사 셀다운 적정 기간은 6개월로 본다. 이를 넘어서면 투자를 거의 하지 않는다. 코로나19가 장기화 될수록 매각에 실패한 물량은 더 쌓이고, 증권사들의 자금줄이 막혀 재무 부담이 가중된다.
최근 변동성이 커진 환율도 IB 사업에 제동을 걸고 있다. 딜 하나당 적게는 수백억 원에서 많게는 수천억 원까지 오가는 사업 특성상 환율이 출렁이면 제대로 된 가격 산출부터 계획한 전략을 유지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게 업계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증권사들이 주요 수익원이자 미래 성장동력으로 내세운 IB 부문 전반에 위기감이 번지면서 CEO(최고경영자)들의 역할론도 거론된다. 대부분의 증권사들이 2018년과 지난해 말 사이 업계 안팎에서 ‘IB 전문가’로 불리는 인물들을 선임한 만큼, 지금의 상황을 타개하는 데 역할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증권업계 관계자는 “세계적으로 코로나19가 가라앉지 않고 있고, 실물 경제 타격에 따른 위기 가능성이 높은 상황”이라며 “증권 업계 손실은 피할 수 없고, 위기 속에서 CEO들이 대응을 어떻게 하느냐가 올해 실적을 가르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