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혹행위 견디다 못해 수류탄 배에 깔고…함장 진급 앞두고 ‘유서 은폐’ 또 다른 사연도
1950년 군 창설 이래 비순직 처리된 사망군인은 3만 9000여 명에 달한다. ‘개인적 사유’에 의한 자해 사망인 경우가 상당하다. 이들은 국립묘지에 묻힐 수 없었다. 대통령 소속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위원장 이인람)는 2018년부터 이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부대 내 구조적 원인을 찾아내 순직 처리로 이끄는 작업을 해오고 있다.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는 2019년 9월 13건의 의문사를 진상규명한 뒤 매월 성과를 내고 있다. 일요신문에서 진상규명된 사연을 연재한다. |
[일요신문] “지금 제가 고속도로 운전 중인데, 차를 세우고 다시 전화 드리겠습니다.”
길상진 일병 이름을 꺼내자 순간 수화기 너머로 자세를 고쳐 앉는 찰나의 침묵이 흘렀다. 전화를 받은 양규열 씨는 길상진 일병의 선임하사였다. 그는 수류탄을 손에 든 길상진 일병을 달래러 탄약고에 들어간 유일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때가 1979년 10월 30일이었다. 벌써 41년이 지났다. 30여 분 뒤 전화가 다시 걸려왔다. 올해로 66세 중년의 남자의 입에선 한숨 소리가 먼저 흘렀다.
“하… 아직도 생생하지요. 수류탄을 배에 깔고 터트려서 허리는 꺾이고 팔은 어디론가 날아가서 없었어요. 그때 화약 냄새, 거기에 섞여서 나는 비릿한 냄새까지 아직도 조금 고독하다 싶으면 떠올라요. 40년도 더 지났는데도….”
#10·26 사태에 가담한 가족 때문이라니
경기도 양평의 한 군부대였다. 1970년대 후반 군사독재 시절 모든 부대의 군기가 남다르던 때였다. 그 가운데서도 경기도 양평의 부대는 군기가 세기로 유명했다. 길상진 일병은 병기근무대에 전입해 탄약 보급반에서 탄약고 관리를 했다. 당시 21세 길 일병은 명랑하고 쾌활해 장난치길 좋아했다. 밤낮없이 날아드는 선임들의 발길질도 웃음으로 털어 넘겼다.
한 군부대가 전술 훈련을 하고 있는 장면으로 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련없다. 사진=연합뉴스
그날도 장난인 줄 알았다. 양규열 씨는 선임하사로 상황실 당직을 서고 있었다. 급한 보고가 들어왔다. “상진이가 탄약고에서 수류탄을 들고 죽겠다고 하고 있다”는 보고였다. 양규열 하사는 보고를 듣곤 ‘웃기는 놈 장난도 어지간해야지’ 정도로 생각했다고 한다. 막상 실제 상황을 마주하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이미 눈이 갔어, 정상인의 눈이 아니었어요. 탄약고 안을 가보니까 양손에 수류탄을 하나씩 쥐고 가슴에 40밀리 유탄발사기 포탄을 안고 있더라고요. 손은 부들부들 떨고 있고, 소주병이 발 아래 있더구만요. ‘상진아 너 거서 뭣허냐, 나가자, 오늘 일은 없던 걸로 하자’라고 했더니 술에 잔뜩 취해서 ‘하사님, 군 생활 정말 못 해 먹겠습니다’라고 하더라고요. 이대로 있다간 나도 죽겠다 싶어서 설득했죠. ‘지금 누구 전화하고 싶은 사람 없느냐’고 하니까 ‘어머니께 전화해 달라’고 하더라고요.”
양 하사는 길 일병에게 잠깐 기다리라고 한 뒤 전화를 하러 탄약고에서 나왔다. 훈련을 나가지 않은 모든 부대원과 간부가 탄약고를 빙 둘러싸고 있었다. 당시 잔류 병력 가운데 가장 계급이 높았던 대위가 양 하사에게 다시 탄약고로 들어가 길 일병을 설득하라고 말했다.
할 수 없이 다시 탄약고로 들어가니 길 일병은 전보다 탄약고 문 쪽으로 나와 있었다. 양 하사는 길 일병의 눈이 무서워서 쳐다보지 못하고 등을 지고 길 일병에게 계속 말을 걸었다. 양 하사와 길 일병은 2m도 안 되는 거리에 있었다. “하사님, 저 죽습니다”라는 말이 귓전을 때렸다. 몇 초가 지났을까. ‘펑’하는 소리가 나면서 사방이 먼지로 뒤덮였다. 순간 양 하사 몸에 피가 가득 튀었다. 양 하사는 놀라서 밖으로 뛰쳐나왔다.
“다시 들어가서 시신을 확인해보니까 수류탄을 배에 깔고 죽었더라고요. 날 생각해서 피해를 안 주려고 그런 게 아닌가 생각해요. 상진이가 탄약고 문 앞쪽으로 나온 것도 그때 탄약고 안에 150mm, 105mm 탄약이 가득 쌓여 있었거든요. 그게 터졌으면 정말 폭발이 컸겠죠. 생각이 깊은 아이였던 것 같아요.”
군 헌병대 조사는 싱겁게 마무리됐다. 길상진 일병이 개인적인 사유로 신변을 비관해 자해 사망했다는 결론이었다. 다소 황당했지만 군의 설명은 길 일병의 백부 등 가족이 당시 중앙정보부에서 일을 했는데, 10·26 사태(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을 살해한 사건)에 관여했기 때문에 집안이 풍비박산 날 것을 우려했다는 것이었다. 당시 부대 동료들의 진술도 일치했다.
양규열 상사의 생각은 군 조사 결과와 달랐다. 가족이 아니지만 죄책감을 갖고 살아오던 양 상사는 40년이 지난 2019년 3월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에 진실을 밝혀달라고 요청했다. 위원회 조사 결과 길 일병은 사건 당일 선임들에게 흠씬 두들겨 맞았단 사실이 드러났다. 그날은 김장철 사역을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술을 못 마시는 길 일병은 선임들이 주는 술을 억지로 마셔서 취했고, 배추를 싣는 트럭에 대자로 뻗어 잠들었다. 이를 본 선임들은 길 일병을 가만두지 않았다.
백부 등 가족이 10·26 사태에 관여했다는 진술은 만들어진 이야기였다. 당시 부대 동료들은 간부들이 시켜서 어쩔 수 없이 거짓 진술을 했다고 고백했다. 또 아침부터 저녁까지 맞는 게 일상다반사였다며 당시 분위기를 전했다.
30분 동안 달리는 트럭 난간에 매달리게 해서 발이 땅에 닿으면 맞았다. 가족이 면회를 자주 오면 실신할 때까지 맞았다. ‘대가리 박기’를 30분 동안 하며 군홧발로 배를 맞는 건 보통 일이었다. 각 내무반 ‘한 따까리’는 매일 있었고, 병기대 전체 ‘한 따까리’는 일주일에 한두 번 있었다. 상급 부대에서 소원 수리를 하러 오면 또 맞을까봐 구타당한 사실을 털어놓지 못했다. 탈출구는 없었다.
양규열 상사는 “상진이가 국립묘지에 묻힐 때 흙 한 삽 떠주고 싶다”며 “당시엔 상황이 상황인지라 이걸 누구한테 말하지도 못했다. 평생 응어리였다. 이제라도 제자리에 돌려놓을 수 있어 다행”이라고 말했다. 길상진 일병 사건은 가족이 아닌 당시 부대 동료가 진정을 내서 진상규명된 첫 사건이다.
길상진 일병 사건을 담당한 김영규 조사관은 “사건이 은폐된 지 40년여 만에 동료 부대원들의 진정으로 인해 진상규명이 된 점에 의의가 있는 사건”이라며 “이제라도 망인이 위로를 받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고 전했다.
#사라진 유서 한 장
최점석 하사 사건도 최 하사의 동기 김왕우 씨가 위원회에 진정을 낸 사건이다. 최점석 하사는 38주의 고된 해군기술병과학교 하사 교육을 마치고 마산함에 승선해 1년 2개월 동안 군 생활을 했다. 최 하사는 1994년 12월 28일 새벽 마산함 가스터빈실에서 목을 매 자해 사망했다.
마산함 승선 대원들이 전술 훈련을 하고 있는 장면으로 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련없다. 사진=연합뉴스
여기서도 맞는 게 일상이었다. 동료들에 따르면 “점호 시간에 빠따(몽둥이)로 치기도 했고, 머리를 박기도 했지만 기합 좀 준다고 뭐라 그러는 분위기가 아니었다“고 한다. 군기가 센 건 어떻게 보면 당연할 수도 있었다. 한 번의 실수가 배 위 모든 동료 목숨을 앗아갈 수 있는 일이었다. 최 하사도 이를 크게 개의치 않아 했다고 전해진다.
김왕우 씨는 “점석이랑 38주 훈련을 함께 받았다. 그때도 맞는 건 늘 있던 일이었다. 점석이가 성격도 쾌활하고 맞는 건 ‘남자가 그쯤이야’라면서 넘길 정도 되는 아이였다”며 “점석이가 죽었다는 소식에 의문점이 많았지만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어린 하사였기 때문에 당시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26년 동안 그게 너무 미안했다”고 말했다.
위원회 조사 결과, 최 하사가 목을 매기 전날 저녁 인격적으로 상당한 모욕을 받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평소 폭행과 더불어 최 하사를 줄곧 괴롭혀왔던 A 선임하사는 기관부 영내 하사, 병사 등 18명 앞에서 최 하사에게 면박을 줬다. 편도선염으로 몸이 좋지 않아 점호에 참석하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최 하사는 유서 두 장을 쓰고 다음 날 새벽 목숨을 끊었다. 최 하사는 유서에 “남자의 생명은 자존심이다. 자존심이 깡그리 밟힌 이상 더 삶의 가치를 느낄 수 없다. 종말을 고하려 한다. 부모님 용서하세요”라고 썼다. 당시 권위를 잃은 상실감으로 그동안 쌓아왔던 정신적 스트레스가 한 번에 터졌던 것이다.
최 하사의 유서 두 장 가운데 한 장은 폐기됐다. A 선임하사의 폭언, 폭행 등 부조리 내용이 담긴 유서였다. 부모에게 쓴 나머지 한 장만 부모에게 전달됐다. 사건은 은폐됐다. 최 하사는 한 번의 모욕을 참지 못하고 극단적 선택을 한 사람이 되었다. A 선임하사를 비롯해 누구도 처벌받지 않았다. 당시 우연하게도 함장이 진급을 앞두고 있었다.
26년이 지나서야 이 사실이 밝혀졌다. 당시 유서를 가장 처음 발견한 B 하사는 위원회에 유서가 두 장이었다는 사실을 고백했다. 나머지 동료들도 관련 사실을 털어놨다. 아직 현역으로 복무하고 있는 당시 A 선임하사 때문에 말하길 꺼려왔던 것이다.
최점석 하사 사건을 조사한 김기택 조사관은 “서열문화의 폐단을 보여줬고, 지휘관 진급을 위해 사건의 진상이 은폐될 수 있다는 경각심을 준 사건”이라며 “상호 존중과 배려의 병영문화 정착이 필요함을 깨닫게 하는 사건”이라고 답했다.
박현광 기자 mua123@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