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도층 포섭 위해 규제완화·SOC 투자 ‘우클릭’…친문 ‘4년 중임제론’에 이낙연 동조할지도 관심
진보정당의 장기 집권이 시험대에 올랐다. 핵심은 ‘한국판 뉴딜’과 ‘헌법 개정(개헌)’이다. 다만 양자의 추진 세력은 다르다. 한국판 뉴딜 최전선에는 청와대가 섰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뉴딜 추진 이후 28년간 장기 집권한 미국의 민주당 모델을 차용하겠다는 의지로 풀이된다.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 함구령에도 불구하고 당 내부에선 이미 개헌 군불이 지펴지고 있다. 청와대가 총대를 멘 한국판 뉴딜과 민주당이 물꼬를 튼 개헌 논의를 둘러싼 셈법. 이 고차 방정식을 풀면 여권발 장기 집권론의 윤곽이 보인다.
문재인 대통령이 5월 10일 청와대 춘추관에서 취임 3주년 특별연설을 하고 있다. 사진=청와대 제공
한국판 뉴딜의 정치적 함수는 ‘중도층 포섭’이다. 보수층에 대한 균열은 옵션이다. 그 종착역은 ‘진보의 다수파’ 형성이다. 여권이 보수 정권 적폐로 규정했던 규제 완화와 사회간접자본(SOC) 투자에 드라이브를 건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판은 깔렸다. 코로나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이 휘몰아치자, 전 세계는 전례 없는 ‘헬리콥터 머니’ 살포 작전에 나섰다. 문재인 대통령도 제5차 비상경제회의까지 총 245조 원을 긴급 자금으로 투입했다. 이는 국내총생산(GDP)의 10%가 넘는 수치다.
애초 소득 하위 70%에 그쳤던 긴급재난지원금은 100%로 확대했다. 이 과정에서 당은 ‘홍남기 해임’까지 거론하며 문 대통령을 측면 지원했다. 2차 추가경정예산(추경) 과정에선 정세균 국무총리까지 직접 개입, 재정건전성 사수를 외친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고집을 꺾었다. 이 과정에서 당·청은 역할을 분담했다. 총대를 멘 당은 여론전을 개시했다. 청와대는 막판 활로를 열었다. 청와대가 긴급재난지원금의 전 국민 확대의 여지를 열기 직전 이인영 당시 원내대표가 “긴급재정명령 건의도 적극 검토하겠다”고 한 게 당·청 역할분담의 대표적인 예다.
이해찬 대표 제동으로 헌법상 대통령 권한인 긴급재정명령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으나, 이후 청와대는 전 국민 긴급재난지원금 확대에 강한 드라이브를 걸었다. 문 대통령은 총선을 이틀 앞둔 4월 14일 긴급재난지원금과 관련해 “지급 대상자들에게 미리 통보해 주고 신청을 받으라”고 지시했다. 야권은 “청와대가 총선에 개입한 것”이라며 관권 선거 의혹을 제기했지만, 돈 풀기의 효과는 증명됐다. 4·15 총선에서 민주당과 위성정당인 더불어시민당은 총 180석을 차지했다. 2016년 20대 총선을 시작으로 전국 단위 선거에서 4연속 승리를 거뒀다. 정치권 한 관계자는 “긴급재난지원금이 총선에 도움이 됐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밝혔다.
민주당 한 관계자는 “우리 당이 가야 할 길은 중도층을 안고 가는 것”이라며 “진보정당과의 연대보다는 중도층 동맹을 맺는 편이 낫다”고 말했다. 총선 이후 당 내부에서는 루스벨트 대통령을 거론하는 이들이 부쩍 늘었다. 이른바 ‘뉴딜 동맹’ 때문이다. 문 대통령이 존경하는 정치인도 루스벨트 대통령이다. 뉴딜 동맹 본질은 ‘산토끼(비지지층) 동원 전략’이다. 미국의 루스벨트 행정부 이후 민주당 장기 집권도 공화당 지지층 전향이 아닌 동원 전략에 가까웠다.
실제 당시 새롭게 투표권을 얻은 흑인과 이민자 등은 뉴딜의 수혜자로 부상, 한동안 민주당의 장기 집권의 토대를 형성했다. 루스벨트 대통령 당선 이후인 1933∼1969년까지 공화당 집권은 단 두 차례(드와이트 아이젠하워·1953~1961년 재임)에 불과했다. 뉴딜 후 확대된 복지와 누진세 등이 중산층의 강한 지지를 받은 결과다.
이는 선거구도의 기본 문법 중 하나다. ‘진보 vs 중도 vs 보수’ 비율이 ‘40 vs 20 vs 40’이라고 가정하면, 지지층을 공고히 한 뒤 중도층을 누가·얼마나 포섭하느냐에 따라 선거 당락이 결정된다. 미국의 아칸소 주지사에 불과했던 빌 클린턴이 1992년 대선에서 공화당의 조지 H.W. 부시 대통령을 꺾은 것도 이 같은 중도층 공략이 한몫했다. 클린턴의 당시 슬로건은 그 유명한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였다. 4년 뒤 클린턴은 루스벨트 대통령 이후 52년 만에 당시 민주당 후보로는 처음으로 재선 고지에 올랐다. 민주당 핵심 전략가는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뉴DJ 플랜’도 중도층 포섭 전략이었다”라고 했다.
이해찬 대표와 이낙연 당선자 등이 5월 7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제21대 국회 더불어민주당 제1기 원내대표 선출 당선자 총회에 참석해 대화를 나누고 있다. 사진=박은숙 기자
4연속 전국 단위 선거에서 승리한 여권은 이미 행정권과 입법권, 중앙정부와 지방정부를 사실상 독점했다. 우클릭을 앞세워 중도층을 위한 예산과 입법에 드라이브를 걸 경우 친문(친문재인)계의 최대 아킬레스건인 ‘경제 무능론’은 일시에 해소된다. 친문계 한 관계자는 “‘진보는 역시 경제를 못 해’라는 낙인은 포비아, 그 자체”라며 “집권의 토대는 첫째도 둘째도 경제”라고 말했다.
지난해부터 소득주도성장(소주성)을 언급하지 않은 문 대통령은 생활 SOC를 한국판 뉴딜의 한 축으로 세웠다. 정부는 이에 대해 “토건 뉴딜은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지만, 민주당 위성정당 대표를 맡았던 최배근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는 “청와대 경제팀과 기재부가 대통령의 눈을 가리고 이명박근혜 때로 회귀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비롯한 정책을 놓고 ‘왼쪽 깜빡이를 켜고 우회전한다’는 비판에 시달린 참여정부 전철을 밟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 이에 대해 여권 관계자들은 “그때와 지금은 다르다”라고 잘라 말했다.
개헌도 여권발 장기집권론을 뒷받침하는 축이다. 앞서 ‘국민발안제 개헌안’은 5월 8일 국회 본회의 벽을 넘지 못했다. 미래통합당 보이콧 선언으로 의결정족수를 채우지 못하고 결국 자동 폐기된 것이다. 이 안은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을 비롯한 25개 시민단체의 ‘국민발언개헌연대’(개헌연대)가 주도, 3월 6일 발의했다. 핵심은 개헌 발의자에 ‘국회의원 선거권자 100만 명’을 추가하는 것이었다. 현행 헌법은 국회 재적 의원 과반수 또는 대통령만 개헌을 발의할 수 있도록 못 박았다. 야권 한 관계자는 “선거가 끝나자마자 설익은 개헌안 추진을 공식화했다”며 “국민발안제 개헌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면, 문재인 정부 남은 임기는 기승전·개헌 정국이었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개헌의 불씨가 꺼진 것은 아니다. 민주당 차기 당권 주자인 송영길 의원은 공개적으로 “개헌은 21대 국회의 장기 과제”라며 헌법 개정 공론화의 불씨를 댕겼다. 그는 개헌의 ‘여야 합의’를 강조하면서도 대통령 중임제 및 책임총리제 도입 등을 개헌 사안으로 콕 집었다. 보수진영으로부터 장기집권 포석 아니냐는 비판을 받았던 대통령 중임제를 공개 거론한 것이다. 전 청와대 시민사회수석인 이용선 민주당 당선자는 아예 “토지공개념을 빠르게 정착시켜야 한다”며 한발 더 나아갔다. 여당의 새로운 원내사령탑인 김태년 원내대표도 개헌에 대해 “언젠가는 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시기와 관련해선 “(개헌이) 정쟁의 도구가 돼선 안 된다”며 속도 조절론을 폈다. 여야 의원들은 “21대 국회는 개헌의 골든타임”이라고 입을 모았지만, 블랙홀 정국에 대해선 적잖은 우려를 표명했다. 강기정 청와대 정무수석도 개헌 논의에 대해 “청와대나 정부나 전혀 생각하고 있지 않다”고 선을 그었다. 이해찬 대표는 여권 내부에서 합의되지 않은 헌법 개정 얘기가 불쑥 나오자, ‘개헌 함구령’을 내린 상태다.
개헌의 관전 포인트는 △개헌발 정계개편 △친문계와 이낙연 당선자 간 관계설정이다. 블랙홀 정국이 개헌 파괴력의 시작이라면, 정계개편은 개헌 파괴력의 정점이다. 특히 2년 후 차기 대선을 치른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 파괴력은 극대화될 수밖에 없다. 여당이 압승한 총선 결과와는 달리, 20대 대선에서 야권이 백중세를 이룬다면 여권발 정계개편이 수면 위로 부상할 수도 있다.
21대 총선에서 민주당은 지역구 253석 중 64.4%인 163석을 차지했지만, 지역구 득표율은 ‘민주당 49.9% vs 통합당 41.5%’로, 8%포인트 차에 불과했다. 사실상 일대일 구도인 대선에선 총선 의석수와 전혀 다른 판세가 펼쳐질 수 있다는 의미다. 이번 총선에 불출마한 김무성 통합당 의원을 비롯해 야권에도 개헌론자들이 많은 만큼, 야당 내부 권력구도에 따라 여야 일부 세력이 손을 맞잡는 ‘개헌 연대’도 불가능한 시나리오는 아니다.
유력한 차기 대권 주자인 이낙연 당선자 의중도 관심사다. 이 당선자는 대세론을 탄 이후 개헌에 대한 공식 입장을 밝힌 적은 없다. 다만 18대 국회 당시 민주당 의원이었던 그는 한 라디오에 출연해 의원내각제의 중간 단계로 독일식 개헌을 주장했다. 이 당선자는 당시 “현 권력구조로는 대통령의 커다란 권한을 막을 수 없다”며 이같이 밝혔다. 4년 중임제론자인 문 대통령을 비롯해 친문계와는 결을 달리하는 셈이다. 이는 양측의 사이를 벌리는 화약고가 될 수도 있다.
반면 정권재창출을 최우선으로 하는 친문계가 의원내각제로 이 당선자를 품고 후방 정치에 나설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낙연 대세론의 운명도 장기 집권 플랜을 가동하는 친문계 손에 달린 셈이다. 여권 주류에게 한국판 뉴딜과 개헌은 일종의 꽃놀이패다.
윤지상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