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사고 이후 5년 어렵게 뗀 입 “행복했던 한국 무대 그리워…실망감 안긴 분들에게 죄송”
코로나19 여파로 국내에 머물고 있는 강수일을 서울 을지로에서 만났다. 사진=최준필 기자
강수일은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영향으로 리그가 중단돼 최근 국내에서 지내고 있다. “격리 기간을 거쳐 이제야 좀 움직이고 있다”는 그를 지난 27일 서울 을지로에서 만났다.
#강수일이 전한 근황
태국 리그는 코로나19의 영향으로 리그 체제마저 바꿨다. 강수일은 “원래는 태국도 K리그처럼 봄에 개막해서 가을에 폐막하는 ‘춘추제’로 운영됐는데 재개 시기를 가늠할 수 없자 이참에 유럽과 같은 ‘추춘제’로 바뀌었다. 한참 후에야 팀에 합류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강수일은 지난 4월 입국 이후 자가격리 기간을 거쳐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는 “해외 생활을 하다 돌아오면 좀 바쁘다. 그동안 만나지 못했던 사람도 많고 갈 곳도 많다”면서 “이제는 나이(1987년생, 한국 나이 34세)가 있으니까, 미래에 대해 준비도 하려 한다”고 말했다.
그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도 고려하고 있다. 수년 전부터 연말이면 마음이 맞는 동료들과 함께 다문화 가정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축구 클리닉을 여는 등 행사도 진행하고 있다. 그는 “아이들이 꼭 축구선수가 되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다. 단체 생활, 예절 등 축구를 통해 배울 수 있는 것이 많다. 축구를 통해 어린이들이 성장할 수 있게 돕고 싶다. 나도 그렇게 자랐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올해 행사는 이뤄질지 미지수다. 그는 “리그 운영 방식이 달라져서 겨울에 한국에 올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때까지 코로나19가 좀 잠잠해질지도 알 수 없다”고 말했다.
강수일은 “다른 학교 학생과 싸우러 갔다가 축구를 시작했다”며 남다른 비화를 밝혔다. 사진=최준필 기자
#남달랐던 축구 인생
혼혈 선수(미국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남), 화려한 플레이, 강인한 신체 능력, 열정적인 세리머니. 축구선수 강수일 뒤에 따라붙는 수식어다. 팬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긴 그의 축구 인생은 시작부터 남달랐다.
“정말 우스운 이야기라 부끄럽기도 하다(웃음). 싸움을 하다 축구를 시작했다. 어릴 때부터 말썽꾸러기 사고뭉치였다. 얼굴도 모르는 다른 학교 아이가 나와 싸워서 이길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초등학생 강수일’로선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고 결국 그 친구를 찾아갔다. 한판 붙으려고 하는 순간 그 학교 축구부 코치님께 덜미를 잡혔다. 코치님은 주먹다짐보다 달리기 시합을 제안했다. 결국 달리기 시합에선 내가 졌지만 달리는 모습을 본 코치님이 축구부 입단을 권하셨다. 그렇게 우습게 축구를 시작했다. 아, 그날을 제외하면 이후론 내가 항상 달릴 때마다 그 친구를 이겼다.”
중학교를 졸업하던 무렵에는 프로에 조기 진출할 기회도 있었다. 그는 “내가 초등학교 6학년에서 중학교 시절까지 축구를 좀 했다(웃음). 당시엔 그 나이에 프로 계약을 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고명진, 신영록, 이청용 등이 그때 계약하지 않았나. 나는 학교에서 안 보내줘서 못 갔다”고 말했다.
결국 4년여가 지나서야 프로에 입단했다. 3주간 동두천 집과 인천 훈련장까지 지하철로 오가며 인천 유나이티드 입단 테스트를 거친 끝에 드래프트에서 번외지명으로 프로 유니폼을 입었다.
#‘반전’ 만들어낸 프로 생활
우여곡절 끝에 입단했지만 프로 무대는 녹록지 않았다. 번외지명 선수에게 1군 자리는 없었다. 적응 기간을 거쳐 2년차부터 점차 두각을 나타냈다. R리그(2군리그)에서 MVP를 수상하며 기대주로 성장했다. 하지만 ‘유망주’ 꼬리표를 떼는 데 오랜 기간이 걸렸다.
강수일은 “스포트라이트를 받기만 하는 선수였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혼혈 선수’라는 타이틀에 눈길이 쏠렸기 때문이다. ‘신체 능력은 좋지만 결정력이 부족한 선수’라는 평가도 붙어다녔다. 그는 “축구계 은어인 ‘개발’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틀린 말이 아니었다. 골대 앞까지는 잘 갔지만 골키퍼가 없어도 슈팅을 위로 날리곤 했다”며 웃었다. 기대감만 높이던 공격수 강수일은 결국 20대 후반에 이르러서야 잠재력을 터뜨렸다.
“2013시즌에는 거의 전 경기에 나섰지만 공격 포인트는 정말 볼품없었다(27경기 1골). 그때까지 나는 그저 ‘이렇게 하다 보면 언젠간 잘하겠지’라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제주 유나이티드에서 2014시즌을 앞두고 나를 완전 전력 외 선수로 분류했다. 2군도 아닌 3군에 배치됐다. 엄청난 자극이었다. ‘안일한 생각이 나를 여기까지 떨어뜨렸구나’라고 생각했다. 이때부터 통증 때문에 도저히 움직이지 못할 상황이 아니면 매일 슈팅훈련을 따로 했다.”
2007년 프로에 입단한 강수일은 2014년부터 ‘반전’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사진=한국프로축구연맹
패스를 받아 컨트롤을 해놓고 골대 모서리를 향해 슈팅하는 단순한 훈련. 처음엔 공을 부드럽게 잡아두지도 못했다. 해답은 끊임없는 반복에 있었다. 슈팅은 점점 날카로워졌고 골대가 커 보이기 시작했다. 자연스레 자신감도 올라갔다. 개인훈련을 이어가던 때, 마침 공격수가 필요한 포항 스틸러스에서 임대 제의가 왔다. 조건이 좋지는 않았다. 제주에서 받던 연봉에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강수일은 “잠시 고민도 했지만 출전 기회가 더 중요했다”며 당시를 떠올렸다.
플레이 스타일에도 변화를 줬다. 이전까지 화려한 플레이를 즐겼다면 공격수로서 간결한 동작들을 시도했다. 공격수 출신 황선홍 감독의 지도도 그의 환골탈태에 한몫했다. 이후 포항에서 1년, 되돌아간 제주에서 6개월, 그는 이 1년 6개월을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라고 말했다. 축구를 시작하는 순간부터 오랫동안 간직한 꿈인 국가대표로도 선발됐다. 모두 그를 주목했고 기대를 걸었다. 오랜 시간 ‘특별한 선수’로 지내왔던 그에게 많은 응원도 쏟아졌다.
#무너져 내린 꿈
하지만 행복은 오래 가지 못했다. 강수일의 축구 인생을 백팔십도 뒤바꿔 놓은 사건이 벌어졌다. 2015년 약물 검사 결과 금지약물 양성 반응이 나온 것이다. 발표 당시 국가대표에 소집돼 있었기에 상황은 더욱 극적이었다.
“처음 통보받았을 때 장난인 줄 알았다. 맹세코 약물 복용 같은 일은 하지 않았다. 이 세상 모든 것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길을 가다가도 울고 자려고 누워도 눈물이 났다. 감정이 하루에도 수십 번씩 뒤바뀌었다. 많은 기대를 받고 있었기에 팬분들, 지도자 선생님들, 가족들에게 정말 죄송했다.”
약물 검사 원인은 발모제였다. 수염을 기르려 발모 효과가 있는 연고를 발랐다가 남성 호르몬 성분이 검출됐다. 강수일은 “멋 부리려다 내가 좋아하는 축구를 못하게 망쳐버렸다. 나 스스로 한심했다”고 말했다.
나락으로 떨어진 것은 한순간이었다. 그는 “처음 한국프로축구연맹으로부터 15경기 출장 정지 징계를 받았다. 구단 자체 징계도 받았다. 당시까지는 리그 잔여 경기를 치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대한축구협회에서도 징계(6개월 정지)를 받았다. 결국 2015시즌이 그렇게 마무리됐다. 마음을 다잡고 다음 시즌을 기약하고 있었는데 아시아축구연맹(AFC), 그 이후엔 국제축구연맹(FIFA) 징계 권고안이 또 나왔다. 정신이 나가는 느낌이었다”고 회상했다.
징계가 이어지던 시기, 구단 허락 하에 집에서 지내던 그는 또 다른 잘못을 저질렀다. 음주운전 사고를 낸 것이다. 복귀를 기다리던 팬들의 기대를 완전히 저버렸다.
“다 내 잘못이다. 징계를 여러 번 받았다는 것은 다 핑계다. 사리 분별없이 운전대를 잡았다. 생각이 짧았다. 나중에 어떤 문제가 일어날 것이라는 판단조차 하지 않았다. 사고 직후라도 내 잘못을 시인했어야 했다. 너무 겁이 났고 정확한 판단을 하지 못했다. ‘친구가 운전했다’고 말해버렸다. 그러다 더 큰 일이 날 것 같아 내가 했다고 번복했지만 이미 일은 벌어진 뒤였다. 회피하려고 했다. 너무 비겁했다. 정말 잘못한 일이다.”
결국 그는 축구장 밖에서 2년이 넘는 시간을 보냈다. 2017시즌이 돼서야 해외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다.
“가슴 아픈 일 중 하나는 꿈이 흐릿해졌다는 것이다. 축구를 하면서 언제나 누군가가 나에게 목표를 물으면 답은 단 한 가지였다. 국가대표가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젠 나 스스로도 그 대답을 섣불리 할 수 없게 됐다.”
강수일의 국내 무대 출전 기록은 2015년에 멈춰 있다. 그는 “한국 동료들과 함께하던 때가 그립다”고 말했다. 사진=최준필 기자
가장 큰 응원을 받는 선수에서 모두의 손가락질을 받는 인물이 되기까지, 그 어떤 누구보다 롤러코스터 같은 축구 인생을 살아온 그에게 앞으로 계획을 물었다. 강수일은 마음이 복잡한 듯 쉽게 말을 잇지 못했다.
힘겹게 입을 뗀 그는 “3~4년 동안 일본과 태국을 오가며 축구를 했다. 이전보다 많은 골을 넣기도 했고 그곳의 팬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기도 했다. 행복하다고 느끼는 순간들도 많았다. 그래도 마음 한구석에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 있었다”면서 “현지에서도 동료들과 잘 지내지만 아무래도 경기가 끝나면 같은 언어를 쓰는 선수들과 차 한 잔 마시거나 사우나에 가는 것과 느낌이 다르다. 팬들과 마주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한국이 그리울 때가 많다. 행복하게 축구했던 시절, 그 장소들이 그립다”고 말했다.
강수일은 “실망감을 안긴 분들에게 죄송한 마음 잊지 않고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할 것”이라는 다짐을 함께했다. 그러면서 “단 한 명이라도 나를 보며 경각심을 갖는 사람이 생긴다면 그것도 의미 있는 일이 될 것 같다”는 말을 덧붙였다.
김상래 기자 scourge@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