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지급여력제도상 부동산 많을수록 준비금 더 쌓아야…부동산 가격 상승·수익성 급감 이유도
보험사들이 자산 처분을 위해 평가 작업을 지속적으로 진행하는 것은 금융권에서는 이미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2022년 IFRS17과 킥스가 도입되면 지급준비금을 지금보다 많이 적립해야 하기 때문이다.
보험사들이 자산 매각에 공개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업계 맏형인 삼성생명이 수년 전부터 사옥 등을 매각하면서 보험업계 자산 매각의 물꼬를 텄고, 다른 보험사들이 최근 그 뒤를 따르고 있다. 사진=이종현 기자
특히 그동안 보험사의 경영 위험을 평가할 때 상대적으로 안전하다고 평가받던 부동산에 대해 킥스가 위험지수를 크게 높이면서 부동산을 많이 가질수록 준비금을 더 쌓아야 하는 부담을 안게 됐다. 현행 지급여력(RBC)에서는 부동산 위험계수를 업무용도는 6%, 투자용도는 9%로 규정했지만, 킥스에서는 25%로 보고 있어 쌓아야 할 준비금 부담이 2~3배 늘었다.
예를 들면 A 보험사가 100억 원의 부동산 자산을 보유했다면, 현재는 6억 또는 9억 원의 준비금을 쌓으면 됐지만 앞으로는 25억 원의 준비금을 마련해 놓아야 한다는 의미다. 국내 보험사들이 보유한 부동산이 18조 원이 넘는다는 점을 감안하면 4조 5000억 원에 달하는 준비금을 마련해둬야 한다. 여기에 IFRS17는 부동산을 더 이상 상품 제조원가에 포함시키지 못하게 했다.
이러한 이유로 보험사들은 몇 년 전부터 암암리에 부동산을 팔아 왔다. 금융권에 따르면 보험사들의 부동산 보유액은 지난 3년간 2조 1206억 원이 감소했다. 생보사의 경우 2016년 말 14조 4207억 원에서 지난해 9월 말에는 12조 6427억 원으로 1조 7779억 원 감소했다. 손보사의 부동산 보유 금액은 2016년 말 5조 9362억 원에서 지난해 9월 말 5조 5935억 원으로 3427억 원 감소했다.
그렇다고 보험사들이 단순히 킥스 규정에 맞추기 위해 자산을 내다파는 것은 아니다. 보험업계는 저성장, 저출산, 고령화 등으로 이미 성장이 한계에 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고, 손해율 상승과 경쟁 격화에 따른 사업비 과다 지출, 저금리로 인한 운용자산 이익률 감소까지 겹치며 수익성이 급감하고 있다. 게다가 카카오, 토스, 네이버 등 IT 기업들의 보험업 진출은 정통 보험사들에게 큰 위협이 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별다른 현금창출능력이 없는 부동산으로 인해 재무적 부담까지 짊어져야 하는 상황이 도래하자 매각하는 쪽으로 기울고 있다는 것이 금융권의 평가다.
매각 속도는 보유 부동산 규모가 큰 보험사일수록 빠른 편이다. 국내 최대 보험사로 부동산 보유액도 가장 큰 삼성생명은 2016년부터 부동산을 팔기 시작했다. 당시 삼성의 상징이나 다름없던 서울 태평로 사옥을 부영그룹에 5800억 원을 받고 매각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이외에도 삼성생명은 삼성동, 여의도 등 서울의 ‘알짜’ 지역은 물론 지방에 보유하고 있던 빌딩들도 팔아치워 2조 원 가까이 되는 현금을 확보했다. 한화생명도 성남 태평동 사옥을 241억 원에, 화곡동 사옥을 373억 원에 매각하는 등 부동산 매각에 나서고 있다. 이들 외에도 푸본현대생명과 교보생명이 부동산 매각을 통해 1000억 원이 넘는 현금을 마련한 것으로 전해진다.
현대해상은 지난 2월 6일 이사회 개최 후 강남사옥 매각 작업을 공식 결정했다. 20여 년간 보유한 역삼역 초역세권 빌딩으로 오너가 애착을 가진 건물임에도 매각이라는 결단을 내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근 진행된 본입찰에 10곳 이상 원매자가 참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매각가격은 3500억~3700억 원대로 추정된다. 신한생명도 올 초부터 신사옥 신한L타워 매각을 추진 중이다. 신한L타워는 1990년 신한생명 창립 이후 26년 만에 마련한 신사옥이지만 매입 4년 만에 매각에 나섰다. 매각 가격은 2500억 원으로 알려졌다.
손보사라고 예외는 아니다. 삼성화재는 이미 2500억 원에 달하는 부동산을 매각했고, MG손보와 KB손보도 각각 수백억 원대의 부동산을 처분한 것으로 전해진다.
부동산만 파는 것이 아니다. 대표적인 안전자산 중 하나인 우량채권도 매각하고 있다. 금융권에 따르면 보험사들은 올해 1분기 약 1조 5000억 원에 달하는 우량채권을 매각했다. 지난해 같은 기간의 7000억 원보다 2배 이상 늘어난 규모다. 삼성생명은 1분기 채권과 부동산을 3950억 원 어치 팔아 손실을 메웠다. 한화생명도 달러채권 교체매매를 통해서 3100억 원의 매각이익을 챙겼다.
보험사들이 이처럼 부동산 매각을 서두르는 이유에는 때마침 최근 부동산 가격이 크게 오른 점도 작용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제 값을 받고 팔 기회라는 판단을 내렸다는 것이다.
금융권 관계자는 “보험사가 부동산을 판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다른 회사 영업조직들이 이를 악용하는 사례가 있다. 건물과 땅까지 내다팔아야 할 정도로 어려워진 회사라 보험을 가입하면 원금을 떼일 수도 있다고 소문을 내는 식”이라면서 “이 때문에 보험사들은 최근 몇 년 사이 주로 지방 사옥 등을 위주로 암암리에 부동산 매각을 진행해왔다”고 전했다.
그는 이어 “하지만 최근에는 부동산 가격이 워낙 많이 오른 데다 다 같이 어려운 처지에 몰렸기 때문에 대놓고 팔기 시작한 상황”이라며 “앞으로 1~2년간은 보험사들의 부동산 처분 러시가 이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영복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