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걸’ 통해 ‘여적여’ 편견 타파…파일럿·후속작 아닌 프로그램 그 자체로 각광
음악전문채널 Mnet이 새롭게 선보인 힙합 리얼리티 뮤직쇼 ‘굿걸’은 기존의 ‘여적여(여자의 적은 여자)’ 서사를 ‘여돕여(여자가 돕는 것은 여자)’ 서사로 변화시켰다는 호평을 받았다. 사진=Mnet 제공
현재 ‘굿걸’에는 소녀시대 효연, CLC의 장예은, 혼성그룹 KARD 소속 전지우 등 현역 아이돌을 포함해 에일리, 치타, 제이미, 윤훼이, 퀸 와사비, 이영지, 슬릭 등 10명의 여성 아티스트가 출연 중이다. 이 가운데 이영지는 지난해 Mnet에서 방영한 10대 힙합 서바이벌 프로그램 ‘고등래퍼 시즌3’의 최종 우승자이기도 하다.
남성 출연진 위주로 꾸려졌던 Mnet의 힙합 프로그램 가운데 최연소 우승자이자 첫 여성 우승자로 이름을 알렸던 이영지는 당시 나이 어린 여성 래퍼라는 이유만으로 저평가를 받았다. 그를 우승으로 이끌었던 파이널 곡을 두고 일부 남성 리스너들이 이영지의 파트를 제거한 편집 음원을 유튜브에 올리는 등 견제를 하기도 했다.
스스로 ‘페미니스트 래퍼’라고 밝힌 슬릭 역시 남성 위주의 힙합 신에서는 큰 호응을 얻지 못했다. 특히 그가 ‘메갈리아’(2015년 개설된 인터넷 페미니즘 커뮤니티)를 언급하며 사회에 만연한 여성 혐오를 지적한 것을 두고 “메갈충(메갈리아+벌레 충)” “실력이 없으니 페미코인(페미니즘+비트코인)을 타려고 한다”는 비난이 거셌다. 슬릭의 SNS에 모욕적인 말을 쓰는 이들이 늘어난 것도 그가 페미니스트라는 사실을 밝히고 나서부터였다. 그러나 슬릭은 2016년 처음으로 자신을 페미니스트 래퍼로 정의한 뒤 지금까지 이를 고수하고 있다.
래퍼 슬릭은 2016년 공개적으로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밝힌 뒤 반대 진영의 거센 비난과 모욕을 받아 왔다. 사진=Mnet 제공
여기에 더해 지난해 데뷔한 래퍼 퀸 와사비도 논란과 동시에 예상치 못한 주목을 받고 있다. 퀸 와사비는 국내 무대에선 찾아보기 어려웠던 트월킹(Twerking‧엉덩이 등 하체를 이용해 추는 아프리카 스타일의 춤)과 성적인 가사 내용, 화려한 외양으로 초반에는 리스너들의 큰 지지를 받지 못했다. 특히 남성을 노골적으로 성적 대상화했다는 점에서 남성 리스너들의 불만을 한몸에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노래 ‘안녕, 쟈기?’가 방송 당일 SNS를 뒤집어놓으면서 상황이 반전됐다. 가수 비의 노래 ‘깡’이 컬트적인 인기몰이를 하며 ‘1일 1깡’ 신드롬으로 번진 것처럼 ‘안녕, 쟈기?’도 ‘1일 1쟈기’로 자리잡기 시작한 것. 특히 여성 리스너들 사이에서 퀸 와사비에 대한 압도적인 호응이 이어졌다.
이 같은 분위기 반전에는 ‘굿걸’ 제작발표회에서 나온 그의 발언 “여자들끼리 모아 놓으면 적이 된다는 말이 있는데, 요즘은 돕는 게 대세다”라는 말이 한몫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함께 퀸 와사비가 ‘굿걸’ 인터뷰에서 자신의 가사를 두고 “남자 래퍼들 중에서는 여성에 대한 표현을 쓰는 분이 되게 많다. 그런데 여자 분들은 남자 래퍼들이 하는 것처럼 하지 않는데 당당한 자세를 가질 수 있다는 걸 (가사로) 표현하려는 것”이라고 설명한 것도 여성 리스너들의 지지를 받았다. 페미니스트 사이에서 활용되는 ‘미러링(Mirroring‧상대의 발언이나 행동을 거울로 비춘 것처럼 역지사지하는 것)’을 힙합에 그대로 녹여냈다는 퀸 와사비의 이야기는 여성 리스너들의 가려운 곳을 가장 시원하게 긁어준 발언이기도 했다.
퀸 와사비는 화려한 외양과 노골적이고 성적인 가사, 스타일링 등으로 방송 초반에는 큰 지지를 얻지 못했으나 이후 인터뷰를 통해 분위기 반전에 성공했다. 사진=Mnet 제공
이처럼 옹호와 반대 진영이 뚜렷한 아티스트를 한 번에, 그것도 한 자리 한 무대에 올린다는 것은 Mnet에도 모험일 수밖에 없었을 터다. 특히 ‘굿걸’의 경우는 앞서 Mnet이 선보인 ‘언프리티 랩스타’나 ‘프로듀스 101’ ‘퀸덤’ 등과 결을 달리한다는 점에서 Mnet의 변화를 보여준다. 여성 위주의 프로그램이라는 큰 틀은 같지만 독자적인 색을 띠느냐 여부에서 차이가 난다.
가장 실험적인 프로그램이었던 ‘언프리티 랩스타’는 그보다 먼저 방영됐던 남성 출연진 위주의 프로그램 ‘쇼미더머니’의 성반전일 뿐이란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특히 여성 출연진들을 경쟁시킨다는 명목으로 이뤄진 디스 곡(Disrespect‧힙합 신에서 상대를 비난하는 내용의 가사를 담은 곡)이나 편집 방식에서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오래된 편견이 그대로 드러났다는 비판을 받았으나 끝내 자정되지 못했다.
‘프로듀스 101’과 ‘퀸덤’은 이미 데뷔한 걸그룹 또는 걸그룹이 되기 위한 여성 멤버들의 존재감을 뚜렷하게 보여줬다는 데서 호평을 받았다. 그러나 두 프로그램 모두 ‘프로듀스 101 시즌 2’와 ‘로드 투 킹덤’으로 이어지면서 “결국 남성 아티스트를 부각시키기 위한 파일럿 프로그램 취급을 당한 게 아니냐”는 지적이 일기도 했다. 여성 출연진 위주의 프로그램으로 시청자들의 반응을 가늠한 뒤 호응도가 높으면 성별만 반전시켜 이슈몰이를 하는 것이란 비판이었다. 비슷한 방식으로 ‘언프리티 랩스타’가 ‘쇼미더머니’의 스핀오프 취급을 받은 반면 ‘프로듀스 101 시즌 2’나 ‘로드 투 킹덤’은 별개의 완벽한 프로그램처럼 여겨진다는 것이 주로 지적됐다.
‘고등래퍼 3’에서 첫 여성 우승자로 이름을 알린 이영지는 우승에도 불구하고 남성 리스너들의 편견에 맞서야 했다. 사진=Mnet 제공
그런 만큼 어떤 프로그램의 후속작도, 스핀오프도 아님을 표방하는 ‘굿걸’이 가지는 의미는 클 수밖에 없다. 특히 Mnet이 ‘슈퍼스타K 시리즈’나 ‘프로듀스 시리즈’로 한국 예능계는 물론 연예계 전반에 거대한 영향을 끼친 전례를 생각한다면 ‘굿걸’의 성공 또한 지상파 방송가로 진입도 기대해 볼 만하다. 방송사가 선택한 모험이 이끌어낼 긍정적인 결과에 기대감이 높아지는 이유다.
한 케이블 방송 예능 프로그램 관계자는 “‘굿걸’을 두고 ‘이제 Mnet도 페미코인을 탔다’는 이야기들이 나오는데 방송은 결국 시류를 읽고 그 중에서도 가장 영향력이 큰 분위기를 따라갈 수밖에 없는 것”이라며 “시청자도 출연진도 남자 위주의 방송은 당연한 거고 여자 위주 방송은 여자 눈치를 본 것이라고 단순하게 판단하는 것 자체가 구태다. 방송은 가장 민감하게 시대를 따라야 한다는 절대원칙을 지키고 있을 뿐”이라고 설명했다.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