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특별지위’ 박탈시 자금조달 어려워져 업무 제동…싱가포르·시드니 대체 지역으로 거론
홍콩의 금융 중심지인 센트럴 지역 전경. 사진=연합뉴스
중국이 홍콩 국가보안법 제정을 강행한 지난 5월 28일, 기획재정부는 시중은행에 전화를 돌렸다. 비공개로 진행된 전화면담에서 기재부는 은행들에게 “홍콩지점이나 현지 법인을 다른 곳으로 옮길 계획이 있느냐”고 물었다. 기재부는 국내 은행들의 홍콩 이탈을 ‘우려’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대’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금융권에 따르면 기재부는 한국 금융사들뿐 아니라 글로벌 금융사들의 움직임도 문의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리고 이들과 국내 금융사들이 홍콩에서 철수할 경우 한국에 유치할 방안에 대해 아이디어를 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금융권 고위 관계자는 “미국이 홍콩의 특별지위를 박탈할 경우 실제로 엑소더스가 일어날지, 그리고 현실화할 경우 어떤 유인책을 주면 그들의 인력과 자본을 한국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지가 기재부의 주요 관심사였다”고 전했다. 그는 “금융사 입장에서는 글로벌 금융시장 진출의 교두보를 잃는 셈이라 큰 걱정거리인데 정부는 엉뚱한 계산을 하고 있는 것 같아 실망스러웠지만, 그만큼 ‘홍콩 대탈출’이 이슈인 것만큼은 사실”이라고 덧붙였다.
홍콩은 국내 주요 금융사들의 해외 거점 역할을 하고 있다. 이곳에 지점이나 현지법인을 설립해 글로벌 IB(투자은행)·트레이딩 등의 업무를 운영하고 있다. 전 세계 6곳에 글로벌 IB데스크가 있는 신한은행은 홍콩에만 50명에 가까운 IB 인력을 두고 가장 큰 규모의 IB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하나은행도 홍콩 법인인 KEB하나글로벌재무유한공사에 국내외에서 소싱된 글로벌 IB딜을 심사·기표하는 역할을 맡기고 있다. 뉴욕·런던·인도·독일 등 세계 9곳에 IB데스크를 두고 있는 우리은행도 홍콩에 별도 법인을 꾸려 본격적인 투자은행으로 육성하고 있다. 이들 외에도 3개 국책은행과 9개 증권사, 7개 운용사, 1개 재보험사 등 수십 개의 국내 금융사들이 홍콩에 진출해 있다.
홍콩은 현지에서 ‘딤섬본드’ 발행 등을 통해 홍콩달러를 조달하기 쉽고, 미국 달러화 유동성도 풍부해 현지 조달이 수월하다. 낮은 법인세와 광둥어·영어·중국어가 모두 가능한 환경, 세계 유수의 기업들이 상장된 증시 등을 바탕으로 홍콩은 아시아의 금융허브 역할을 톡톡히 해왔다.
미국이 1992년 부여한 ‘특별지위’가 배경이다. 미국은 영국에서 중국으로 반환된 홍콩에 대해 관세나 투자, 무역, 비자발급에 특별한 지위를 부여했다. 이를 바탕으로 홍콩은 영국령 시절과 마찬가지로 해외 유수의 금융업체를 유치했다. 국내 기업들도 현지 법인과 지점을 두고 영업망을 구축해왔다. 그러나 특별지위가 박탈될 경우 무엇보다 자금조달이 어려워져 홍콩에서의 IB 금융자문 및 주선 업무에 제동이 걸릴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실제 홍콩의 금융허브 지위는 시위가 격화한 지난해부터 위협받기 시작했다. 골드만삭스는 지난해 6~8월 사이에만 40억 달러 이상의 자금이 홍콩을 이탈한 것으로 파악했고 국제 신용평가사 피치는 지난해 9월에 이어 올 4월에도 중국과의 정치적 차별성 약화와 중국의 개입 확대 등을 이유로 홍콩의 국가신용등급을 두 차례에 걸쳐 ‘AA+’에서 ‘AA-’로 내렸다. 이는 기업과 은행 등의 자금조달 비용 증가로 이어진다.
글로벌 금융기업의 ‘헥시트’ 우려가 커지면서 국내 금융사들도 대응책 마련에 고심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이에 따라 홍콩을 해외투자 비즈니스의 핵심 거점으로 삼고 있는 국내 금융사들은 최악의 상황에 대응하기 위해 홍콩 외 대체지역으로 IB 거점을 이동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시중은행 한 관계자는 “무엇보다 홍콩은 IB 거점으로서의 매력이 가장 컸던 곳”이라면서 “모든 글로벌 대형 IB들이 홍콩에 몰려 있어 이들과 접촉하면서 딜을 성사시키기가 쉽고, 자본도 곧바로 조달할 수 있는 환경이었다. 하지만 대형 IB들이 떠난다면 굳이 홍콩에 있어야 할지는 솔직히 의문”이라고 전했다.
현재 금융사들은 홍콩을 대체할 지역으로 싱가포르와 호주 시드니를 가장 유력하게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 지역들은 국내 금융사들도 이미 지점을 열거나 IB데스크를 설치하는 등 현지에 진출해 IB 업무를 진행하고 있는 곳들이다.
실제로 KB국민은행은 이르면 올해 하반기 싱가포르에 IB데스크를 설치할 예정인 것으로 파악된다. 현재 국민은행이 IB데스크를 설치한 곳은 미국 뉴욕과 홍콩, 영국 런던, 3곳이다. 이 밖에 우리은행과 하나은행은 싱가포르와 시드니 두 곳에 IB데스크를 설치해 운영 중이며, 신한은행은 시드니에 IB데스크를 보유하고 있다.
이들 은행들은 미중 갈등이 격화되던 지난해부터 이미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IB 대형 딜은 싱가포르나 호주에서 거래하기 시작한 것으로 전해진다. 거래 물량이 늘면서 이들 지역에 인력을 더 투입하거나 현지 채용을 통해 조직을 확대하는 방안을 고려하고 있다. 일부 은행들은 홍콩에 있는 인력을 싱가포르나 호주로 옮기는 방안도 검토하기 시작했다. 또 한국에서 홍콩으로 파견하는 인력을 줄이고 현지 인력으로 대체하는 방식으로 자연스럽게 조직을 조정하는 방법도 거론된다.
장기간 해외에서 근무했던 다른 금융사 관계자는 “금융허브의 핵심은 비자 발급과 자본 이동의 자유인데, 이 두 요소에 걸림돌이 생긴다면 금융허브의 역할은 사라진다고 봐야 한다”면서 “홍콩에 모여 있는 글로벌 금융 브레인들이 자유롭게 오갈 수 없고, 미국 달러를 필요할 때 필요한 만큼, 그리고 즉시 조달할 수 없게 된다면 떠나는 건 당연한 수순”이라고 전했다.
이영복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