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3월 이후 채무+미지급금 1700억 해결해야” vs 이스타 “그만큼 돈 많은 LCC 어디에도 없어” 갈등
이스타항공 노조가 공개한 녹취록에서 이석주 전 대표는 “셧다운(영업 일시정지)을 하면 우리가 희망퇴직 프로그램을 들어가야 하지 않느냐. 지금은 셧다운하는 것이 나중에 관으로 가더라도 맞다”며 “딜클로징(계약완료)을 빨리 끝내면 (이스타항공 직원의 체불임금 지불을) 우리가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스타항공은 지난 3월 24일부터 운항을 전면 중단했다. 이스타항공 노조에 따르면 올해 희망퇴직과 계약해지 등으로 퇴직한 직원은 700여 명에 달한다.
제주항공은 지난 4월까지 이스타항공 인수 작업을 마무리할 예정이었지만 선행조건이 해결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아직까지 인수를 완료하지 않았다. 지난 7일 국회 소통관에서 이스타항공 문제 해결 촉구 기자회견을 한 이스타항공 노조. 사진=박은숙 기자
제주항공은 지난 4월까지 이스타항공 인수 작업을 마무리할 예정이었지만 선행조건이 해결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여태껏 미루고 있다. 오히려 지난 1일 제주항공은 이스타항공에 영업일 기준 10일 내 선행조건을 이행하지 않을 경우 계약을 해제할 수 있다고 통보했다.
제주항공이 선행조건을 제시한 데 대해 비판의 목소리가 나온다. 이스타항공이 조건을 이행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고, 녹취록 공개 후 제주항공이 제시한 선행조건 중 상당수가 제주항공에서 비롯됐다는 의혹까지 불거졌기 때문이다.
이스타항공 노조에 따르면 제주항공이 제시한 선행조건 중 하나는 3월 이후 발생한 이스타항공 채무를 해결하라는 것이다. 3월 이후 발생한 이스타항공의 부채는 약 800억 원으로 알려졌는데, 이스타항공이 단기간에 부채를 상환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분기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3월 기준 이스타항공의 현금 및 현금성 자산은 약 10억 원에 불과하고, 자본총액은 마이너스(-) 1042억 원으로 완전자본잠식 상태다.
박이삼 이스타항공 노조위원장은 “이스타항공 부채가 급증한 건 코로나19로 인한 국제선 중단이 주요 원인이지만 구조조정에 몰두하면서 고용유지지원금을 신청하지 않고 이유 없이 국내선 운항도 멈추면서 손실을 줄이려 하지도 않았다”며 “제주항공이 이익을 위해 이스타항공이 자력 회생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스타항공의 채무가 늘어난 배경에는 제주항공의 책임도 있었는데 이를 이유로 인수를 취소하는 건 부당하다는 주장이다.
다른 선행조건은 체불임금과 운영비 등 미지급금 1700억 원을 이스타항공이 해결하라는 것이다. 이스타항공 관계자는 “6월에는 미지급금으로 1000억 원을 얘기하다가 최근 1700억 원으로 늘었는데 그만한 돈이 있으면 회사를 매각할 이유가 없다”며 “현재 1700억 원의 현금을 가진 LCC(저비용항공사)는 없으며 바꿔 말하면 해결 불가능한 걸 제시한 것”이라고 전했다.
#이스타 노사 ‘제주항공 때문에 더 힘들어…’
특히 체불임금에 대해서는 제주항공에 책임이 있다는 의견이 적지 않다. 제주항공, 에어서울, 에어부산 등 대부분 LCC는 정부의 지원금을 받았거나 받을 예정이다. 하지만 이스타항공은 정부에 고용유지지원금을 신청하지 않아 지원금을 받을 수 없다. 강은미 정의당 의원은 “정부가 지원해주는 제도가 있는데도 고의적으로 지원금 자체를 요청하지 않은 건 굉장히 악질적인 것”이라고 전했다.
이스타항공 관계자는 “고용유지지원금은 직원 월급을 선지급한 후 정부에 정산을 신청하는 구조이며 지원을 받으려면 구조조정을 하면 안 된다는 규정이 있다”며 “제주항공이 지난 2월 인건비로 50억 원을 지원해주기로 했는데 그 돈이 들어오지 않았고, 당시 구조조정에 들어갈 계획이 있었기에 고용유지지원금을 신청할 수 없었다”고 설명했다. 제주항공 관계자는 “(50억 원 지원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고 했다.
이스타항공 노조는 제주항공 직원 4명이 이스타항공 본사에 상주하면서 구조조정을 주도했다고 주장한다. 고용유지지원금을 신청하지 못한 이유 중 하나가 구조조정이기에 지원금을 받지 못한 데는 제주항공의 책임도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제주항공 측은 “보통 인수·합병(M&A) 과정에서 매수회사의 직원이 매각대상 회사에 자금관리자로 파견돼 일정 규모 이상의 자금 지출에 대해 동의해주는 것은 일반적인 일”이라고 반박했다.
하지만 권영국 정의당 노동본부장은 “제주항공 직원이 이스타항공 구조조정을 지휘했다는 것은 이미 계약의 이행 단계로 들어갔다고 봐야 한다”며 “계약을 포기하겠다는 것은 계약 이행 단계에서 계약을 위반하는 행위로 볼 수 있다”고 전했다.
이스타항공은 노조뿐 아니라 사측도 제주항공에 의해 구조조정이 이뤄졌다고 주장한다. 이스타항공 측은 “구조조정은 3월 말 셧다운 이후부터 제주항공이 제시한 규모와 기준에 따라 진행됐다”며 “제주항공이 주장하는 선행조건과 관련해서는 제주항공도 주식매매계약 이전부터 자금 부족으로 생길 문제를 인지했고 그 내용이 계약에 담겨 있는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반면 제주항공은 이스타항공 경영에 관여하지 않았고, 체불임금 문제도 이스타항공이 책임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스타항공 노조의 녹취록 공개 후에도 제주항공 측은 “계약 진행을 위해 상호 노력하자는 내용이며 어디에도 제주항공이 지시하는 대화 내용은 없다”며 “체불임금은 딜클로징을 빨리 해서 지급하자는 원론적 내용이며 클로징 전에 책임지겠다는 이야기는 어디에도 없다”고 반박했다.
최근 이스타항공 논란이 불거지자 정부가 이스타항공 인수를 종용하고 있다. 김포국제공항 저비용항공사 국내선 출국장. 사진=임준선 기자
논란이 불거지자 정부가 나서 이스타항공 인수를 종용하고 있다. 지난 3일 김현미 국토교통부(국토부) 장관은 채형석 애경그룹 부회장, 이상직 더불어민주당 의원 등을 만나 M&A가 성사될 수 있도록 노력해줄 것을 당부했다. 앞서 지난 3월 산업은행은 제주항공에 400억 원을 지원했는데 이는 LCC 회사가 받은 지원금 중 최대 규모다. 정부는 이스타항공 인수 후 제주항공에 1700억 원을 추가로 지원하기로 했다.
#‘인수 포기’ 밝힌 게 아니냐는 의혹도
지난 5월에는 국토부 항공교통심의위원회의 운수권 배분 결과 25개 노선 운수권 중 제주항공이 가장 많은 11개 노선을 배분받았다. 마카오 등 지역에서 이원5자유권(현지 승객을 제3국으로 태울 수 있는 권리)과 중간5자유권(제3국을 거쳐 운항할 수 있는 권리)을 받은 항공사도 제주항공뿐이다.
박이삼 위원장은 “이스타항공 인수에 대한 정부 지원의 일환으로 이원5자유권과 중간5자유권을 독점적으로 배분받은 것”이라며 “인수 거부 후 이스타항공이 파산하면 제주항공은 LCC 시장에서 독점적 지위를 가질 것”이라고 전했다.
이에 대해 국토부 관계자는 “운수권 배분은 민간위원들이 결정하는 것이고, 정부 인사가 참여할 수 없는 구조”라며 “제주항공이 가져간 노선 중 상당수는 단독으로 신청한 것이라서 이스타항공 인수와 상관이 없다”고 말했다. 항공업계 관계자는 “제주항공이 단독 신청한 노선에 대해서는 정부가 지원을 했다고 보기 어렵다”면서도 “제주항공이 경쟁을 통해 배분받은 노선의 경우에는 이스타항공을 인수하는 제주항공에 배려를 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있었던 것으로 보여 사회적 혜택을 전혀 받지 못했다고 할 수는 없다”고 전했다.
정부는 이스타항공 인수를 완료하면 제주항공에 추가적인 지원을 해주겠다는 뜻을 수차례 밝혔다. 하지만 정부 지원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강은미 의원은 “제주항공이 이스타항공의 셧다운과 구조조정을 통해 자력 회생 기회를 박탈했다”며 “정부가 심각성을 인지하고 해법을 모색해야 하는데 제주항공의 기득권을 옹호하는 꼴”이라고 전했다.
제주항공이 이스타항공에 요구한 선행조건 완료 시점은 오는 15일이다. 하지만 이스타항공이 이를 이행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워 제주항공이 인수 포기를 간접적으로 표현한 것이라는 시각이 적지 않다. 선행조건 중 상당수가 제주항공에 책임이 있다는 주장이 나오면서 도덕적인 비판을 받고 있지만 제주항공이 선행조건을 양보할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이스타항공 사정에 정통한 항공업계 고위 관계자는 “이미 4월 말 제주항공 내부에서 인수하지 않기로 정해진 것으로 들었는데 그때 솔직하게 말했으면 이스타항공도 다른 해법을 모색했을 것”이라며 “지금 제주항공이 조건을 내거는 이유는 이미 지급한 계약금 115억 원을 돌려받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제주항공 관계자는 “15일까지 이스타항공이 선행조건을 해결하지 않으면 그때 다시 입장을 낼 것”이라고 전했다. 인수 포기 의사를 우회적으로 밝힌 게 아니냐는 의혹에 대해서는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박형민 기자 gody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