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정·오거돈 이어 세 번째 광역단체장 연루…국회 대거 입성 ‘차기’ 밀던 박원순계 참담한 분위기
고 박원순 서울시장 빈소가 마련된 서울 종로구 서울대학교병원. 사진=서울시 제공
박원순 서울시장이 7월 10일 새벽 0시 1분쯤 서울 북한산 숙정문 인근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앞서 박 시장의 딸은 전날 오후 5시 17분쯤 ‘4~5시간 전에 아버지가 유언 같은 말을 남기고 집을 나갔는데 전화기가 꺼져 있다’며 112에 신고했다. 이에 경찰과 소방당국은 기동대와 소방관 등 770여 명과 야간 열감지기가 장착된 드론 6대, 수색견 9마리 등을 동원해 박 시장의 휴대전화 신호가 마지막으로 포착된 서울 성북동 길상사 주변과 와룡공원 일대를 집중 수색했고 실종신고 접수 7시간 만에 박 시장을 발견했다(관련기사 “죄송하다” 고 박원순 시장 피소부터 주검 발견까지 ‘긴박했던 3일’).
박원순 시장이 극단적 선택을 한 이유는 ‘미투’ 사건이 관련된 것으로 추정된다. 박원순 시장 실종 직후 박 시장의 전직 비서가 박 시장을 성추행 혐의로 고소한 사실이 전해졌기 때문. 박 시장의 비서였던 A 씨는 7월 8일 변호사와 함께 경찰에 출석해 고소장을 제출하고, 고소인 조사를 받았다. 고소장에는 A 씨가 박 시장 비서실에서 근무하면서 박 시장으로부터 여러 차례 신체접촉을 당했고, 텔레그램 메신저로 부적절한 내용과 개인적 사진을 전송 받았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박 시장의 피소 내용이 사실이고, 그로 인해 박 시장이 죽음을 선택했다면 문재인 정부 들어 성폭력 사건에 연루된 여당 소속 광역단체장은 안희정 전 충남지사, 오거돈 전 부산시장에 이어 세 명으로 늘어난다.
모친상으로 인한 형집행정지로 임시 출소했던 안희정 전 충남지사가 7월 9일 광주교도소에 다시 입소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오거돈 전 시장은 4·15 총선 직후인 4월 23일 “최근 한 여성 공무원을 5분간 면담하는 과정에서 불필요한 신체접촉이 있었고, 강제추행으로 인지했다”며 부산시장직을 전격 사퇴했다. 오 전 시장 역시 나흘 후 당 윤리심판원으로부터 제명 처분을 받았다. 부산지검은 오 전 시장에 대해 강제추행 혐의로 5월 28일 구속영장을 신청했지만, 부산지법이 기각했다. 오 전 시장은 현재 불구속 상태로 수사를 받고 있다.
특히 박원순 시장의 성추행 의혹과 사망이 더욱 충격을 주는 것은 박 시장이 ‘성희롱은 명백한 불법행위’라는 인식을 처음 만든 사건의 변호인이기 때문. 법적으로 최초 제기된 성희롱 사건인 1993년의 ‘서울대 우 조교 성희롱 사건’에서 박 시장은 이종걸 최은순 변호사와 함께 피해자를 대리했다. 6년의 법정 공방 끝에 가해자 신 아무개 교수가 우 조교의 정신적 피해에 500만 원을 지급하라는 판결을 이끌어냈다. 이로 인해 박 시장은 인권변호사로 명성을 얻었다.
서울시장 취임 후에도 서울시의 성평등 정책, 여성정책에 힘을 쏟았다. 전국 지자체 가운데 최초로 성평등위원회를 설치했다. 시의 모든 예산에 성인지적 관점 반영, 성평등 관련 조례 제정, 싱글 여성을 위한 안심주택 보급 정책 등도 냈다. 박 시장은 2018년 안 전 지사에 무죄를 내린 1심 판사를 향해 “이런 사건(성범죄)을 판단할 때는 감수성이 굉장히 중요하고, 피해자를 기준으로 해야 한다”며 “판사가 비판받을 대목이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이처럼 여성 인권을 강조해온 과거가 성추행 피소와 경찰 수사로 부정될 수 있다는 중압감이 박 시장을 극단적인 선택으로 몰고 간 것 아니냐는 분석도 나온다.
민주당은 박 시장의 갑작스러운 사망 소식에 충격에 휩싸였다. 민주당 지도부는 박 시장의 실종 소식이 전해진 후 긴급 대책회의를 가졌다. 민주당은 이날 오전 7시 30분으로 예정됐던 최대 현안인 부동산 종합대책 논의를 위한 당정협의를 취소했다. 최근 당 대표 출마 선언을 한 이낙연 의원과 김부겸 전 의원도 당내 상황을 감안해 언론 인터뷰 등 모든 일정을 취소했다.
민주당 지도부의 한 관계자는 “지도부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며 “미투 사건까지 엮여 있어 대응하기 조심스럽다”고 전했다. 또 다른 민주당 관계자는 “고발장이 접수된 이후 사안이 중해 곧바로 경찰 윗선에 보고됐고, 민주당 지도부는 파악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며 “하지만 당내에 또 미투 사건이 터졌다 정도로 걱정했지, 박 시장이 이렇게 극단적 선택을 할지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귀띔했다.
7월 10일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 박원순 시장의 빈소를 방문한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 사진=서울시 제공
특히 이른바 ‘박원순계’ 의원들은 참담한 분위기다. 앞서 4·15 총선을 통해 박원순계로 분류되는 인사들이 두각을 나타내며 대거 국회에 입성했다. 서울시 정무부시장을 지낸 재선 기동민 의원과 초선 김원이 의원을 비롯해 ‘박원순의 브레인’ 비서실장 출신 천준호 의원과 허영(정무수석 출신), 윤준병(행정1부시장 출신), 박상혁(정무보좌관 출신) 의원 등이 대표적이다. 남인순, 박홍근, 민병덕 의원도 박 시장과 가까운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따라 국회 내 박원순계는 10여 명에 달했다.
이들 의원들은 2022년 대선에서 박원순 시장의 도전에 힘을 실어줄 것으로 기대됐다. 최근에도 박 시장은 의원들과 만나 대선에 관한 조언을 들은 것으로 전해졌다. 박원순계 한 초선의원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 그저 황망할 뿐”이라며 “장례절차가 진행 중이라 따로 할 말이 없다”고 말을 아꼈다.
박홍근 의원은 10일 박 시장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앞에서 “지금 소셜미디어 상에서 악의적인 출처 불명의 글이 퍼지고 있어 고인의 명예가 심각하게 훼손되고 유족들이 큰 고통을 겪고 있다”며 “유족들을 대신해 간곡히 부탁드린다. 부디 무책임한 행위를 멈춰 달라”고 호소했다.
야당 역시 정부 여당과 대치를 멈추고 사태를 예의주시하며 추모 분위기에 동참했다. 주호영 원내대표는 7월 9일 저녁 당 의원들에 문자메시지를 보내 “여러모로 엄중한 시국”이라며 “모쪼록 의원들께서 언행에 유념해 주시기를 각별히 부탁드린다”고 당부했다.
그러면서도 일각에선 전직 비서 성추행 혐의에 대해 전말을 밝혀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초선인 유상범 의원은 10일 KBS 라디오 ‘김경래의 최강시사’에서 “미투 사건이 발생하면서 그것에 대한 어떤 책임을 지는 차원에서 아마 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을 한 것 같다”며 “고인의 그런 상황에 대해서는 깊게 안타깝게 생각하지만, 앞으로 그 과정에서 있었던 여러 가지 일들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충분히 밝혀져야 하지 않느냐는 생각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주호영 원내대표는 이날 원대대책회의 후 ‘피해자를 위한 대책’에 대해 “지금 정확한 사실관계 파악이나 피해자 입장이 알려지지 않은 상황”이라며 “얼마든지 도울 생각이 있지만, 자칫 2차 피해로 갈 가능성이 있어 우려스럽다. 피해자 입장이나 사실관계 파악에 따라 어떻게 할지 정하겠다”고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한편 박원순 시장이 사망함에 따라 전직 비서가 고소한 성추행 혐의 사건의 수사도 ‘공소권 없음’으로 종결될 전망이다. 검찰사건사무규칙 제69조는 수사 받던 피의자가 사망할 경우 검사는 ‘공소권 없음’으로 사건을 불기소 처분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다시 회자되는 ‘안이박김 살생부’ ‘여권 잠룡’ 박원순 시장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정치권에 떠돌던 ‘안이박김 숙청설’이 다시금 거론되고 있다. 이는 2018년 10월 조원진 전 의원에 의해 처음 언급됐다. 당시 조원진 전 의원은 국정감사에서 이재명 경기도지사에게 “시중에 ‘안이박김’ 숙청설이 회자되고 있다”며 “안희정·이재명을 날리고 박원순은 까불면 날린다는 말인데 소회가 어떤가”라고 질의한 것(관련기사 상고심 앞두고 친문 지원사격 ‘이재명 재판’ 다시 보니). 정치권에서는 ‘김’에 대해선 김경수 경남도지사라는 설도 있고, 김부겸 전 의원이라는 설도 있었다. ‘김’이 김경수 지사라고 한다면, ‘안이박김’ 모두 수난을 겪고 있는 셈이다. 앞서 언급했듯 안희정 전 지사는 비서 성폭행 혐의로 대법원에서 징역 3년 6월을 선고 받아 수감 중이다. 이재명 경기도 지사는 직권남용 및 허위사실 공표 등 혐의로 2심에서 당선무효형인 벌금 300만 원을 선고 받고 대법원 판결을 앞두고 있다. 김경수 경남도 지사 역시 드루킹 사건으로 2심 재판이 진행 중이다. |
민웅기 기자 minwg08@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