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대 활약 위해 주전 가능한 클럽 골라 ‘실리주의’…FC 서울과 재회 ‘힘 있을 때 돌아온다’ 약속 지켜
기성용이 22일 오전 FC 서울 입단 기자회견에서 한 말이다. 기성용이 K리그로 돌아왔다. 비록 코로나19 영향으로 경기장에 입장할 수는 없지만 국내 축구팬들은 지난 10여 년간 국가대표 중심으로 활약한 선수, 세계 축구의 중심인 유럽 무대에서 활약한 기성용의 플레이를 새벽잠을 설치지 않고 지켜볼 수 있게 됐다.
기성용이 11년 만에 친정팀 유니폼을 입고 국내 무대로 돌아온다. 그는 “행복하다”는 소감을 남겼다. 사진=한국프로축구연맹 제공
#11년 만의 친정 복귀
기성용의 국내 복귀 시도는 지난겨울부터 있었다. 그의 복귀는 이번 시즌 K리그 이적시장의 최대 이슈였다. 겨울과 여름 이적 시장을 거치며 많은 선수들이 유니폼을 갈아입었지만 기성용의 파괴력은 남달랐다. 우리나라 현역 최고 축구스타 중 한 명인 기성용의 움직임에 축구계의 이목이 집중됐다.
과정이 부드러웠던 것은 아니다. 2010년 1월 구단을 떠나며 ‘국내 복귀시 FC 서울로 돌아와야 한다’는 조건이 걸림돌로 작용했고 기성용과 구단 측의 협상 과정도 원활하지 못했다. 이에 기성용과 서울은 겨울 이적 시장을 흘려보냈고 기성용은 단기 계약을 통해 스페인 무대로 떠났다. 여름 이적 시장이 열리고 나서야 양측은 손을 잡았다. 기성용은 약 11년 만에 자신이 프로선수로서 커리어를 시작한 팀에 돌아오게 됐다. 연봉은 비공개, 계약 기간은 3년 6개월이다.
기성용과 서울의 재회는 일부 예견된 일이었다. 구자철, 기성용, 이청용 등 2000년대 중반 이후 선수생활을 시작한 선수들은 해외 진출 때는 물론 그동안에도 종종 “국내 팬들 앞에서 선수생활을 마무리할 것”이라는 발언을 했다. 게다가 ‘전성기 기량을 어느 정도 유지하고 있는 시점’에 복귀하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도 공통점이다. 선수생활을 마무리하기 위해 국내 무대를 활용할 것을 원치 않는다는 의사를 표현했다.
이들 중 한 명인 기성용은 약속대로 30대 초반의 나이에 서울 유니폼을 다시 입게 됐다. 그의 오랜 친구 이청용도 6개월 앞서 울산 현대 유니폼을 입고 국내 팬 앞에 섰다. 팬들의 염원과 달리 해외에서 그대로 선수 생활을 마무리했던 일부 선배들과 다른 길을 택했다. 밀려나듯 국내로 들어온 것이 아니라 ‘힘이 남아 있을 때’ 스스로 복귀를 선택한 것이다.
기성용은 2012년 여름부터 2018년 여름까지 6시즌을 스완지시티 소속(선덜랜드 임대 시절 포함)으로 보냈다. 사진=연합뉴스
#10여 년간의 유럽 생활
2009년 12월 21일 셀틱 입단식을 한 날부터 국내 복귀를 알린 2020년 7월 22일까지 기성용은 3866일간 유럽 클럽 소속 선수로 살아왔다. 유럽으로 진출하며 “꿈이 이뤄졌다”던 만 20세 어린 선수는 31세 베테랑이 돼 친정으로 돌아왔다. 11년간 그는 어떤 경험들을 했을까.
기성용의 셀틱 입단 시기는 겨울, 유럽 시즌이 한창 진행되던 때였다. 서울과 대표팀에서는 핵심 전력이지만 유럽에선 무명 선수에 불과했다. 입단 직후 경기에서 풀타임을 소화하며 자리를 잡는가 했지만 이내 벽에 부딪혔다. 점점 출장 시간이 줄었고 경기 출장마저 어려움을 겪었다.
유럽 2년차인 2010-2011시즌부터 반전을 만들어 나가기 시작했다. 공격적 역할을 맡았던 서울에서와 달리 셀틱에서는 수비적인 역할을 병행해주길 원했고 기성용은 체격적 부분을 보완하며 적응해나갔다. 소속팀 셀틱의 우승을 이끌기도 하며 팀의 주축 선수로 성장했다.
리그 우승팀의 주축 미드필더, 더 높은 수준의 리그에서 러브콜을 받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기성용은 2012년 여름, 스완지시티와 계약하며 프리미어리그 무대를 밟았다. 이미 스코틀랜드에서 영국 무대 적응을 마친 기성용은 당시 구단 역사상 프리미어리그 첫 승격을 경험한 스완지시티와 함께 신바람을 냈다.
2013-2014시즌 초반에는 감독과 불화를 겪기도 했지만 임대라는 또 다른 기회를 잡았다. 1시즌간 임대 이후 2014-2015시즌에는 커리어 하이 기록을 남겼다. 리그 33경기에 나서 8골을 넣으며 기성용은 자신의 경력에서 가장 많은 출장경기, 가장 긴 출장시간, 가장 많은 골을 기록했다. 소속팀 스완지도 역대 가장 높은 순위(8위)에 올랐다.
6시즌간 스완지에서 꾸준히 활약하던 기성용은 2018년 여름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스완지보다 큰 규모를 자랑하는 뉴캐슬 유나이티드에 입단한 것이다. 기존 중원 자원과 경쟁에서 어려움을 겪는 듯했지만 이내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며 팀에 기여했다.
뉴캐슬 2년차인 2019-2020시즌에는 새롭게 부임한 감독에게 팀 구상에서 제외되는 수모를 겪었다. 이에 그는 6개월 남은 계약 기간을 조기에 마무리하고 자유의 몸이 됐다. 국내 복귀를 타진했지만 여의치 않자 단기계약으로 스페인(마요르카)으로 향했다. 다만 부상과 코로나19 등 예기치 못한 상황이 이어지며 무언가를 보여주기엔 시간이 없었다.
2014 브라질월드컵 이후 주장 완장을 찬 기성용은 더욱 남다른 책임감으로 대표팀에 임했다. 사진=대한축구협회 제공
#10년 넘게 대표팀 ‘기둥’
10여 년의 유럽 생활 동안 기성용은 국가대표로도 맹활약을 이어갔다. 유럽 커리어를 시작하던 시점, 만 20세에 불과했지만 기성용은 이미 A대표팀에서도 확고한 주전 선수였다. 2008년 9월 A대표팀 데뷔 직후부터 팀을 구하는 골을 넣으며 입지를 다졌다. 2010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에서는 도움 2개를 기록했다.
셀틱 소속으로 2010 남아공월드컵, 2011 카타르아시안컵 등 굵직한 대회에 참가한 기성용은 2012년 여름 런던올림픽에 나섰다. 홍명보 감독이 이끌던 당시 대표팀은 동메달이라는 역대 최고 성과를 냈고 이는 기성용의 커리어에 중요한 기점이 된다. 군복무에서 자유로워지면서 유럽에서 장기간 활약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이후에도 국가대표 소집 명단에는 늘 기성용의 이름이 올랐다. 홍명보, 울리 슈틸리케, 신태용 등 감독들은 항상 그를 찾았다. 심각한 부상을 입은 시기를 제외하면 기성용은 빠지지 않고 대표팀 유니폼을 입었다.
1무 2패, 철저한 실패를 겪은 2014 브라질월드컵 이후에는 대표팀 주장을 맡았다. 주장으로 나선 2015 호주아시안컵에서 아쉽게 준우승을 했지만 기성용의 리더십과 기량은 고평가를 받았다. ‘주장직을 수행하며 더 성숙한 플레이를 펼친다’는 평가도 뒤따랐다.
기성용은 2018 러시아월드컵과 2019 카타르아시안컵에서 다소 아쉬운 결과를 남긴 채 대표팀에서 은퇴했다. 언제나 대표팀에서 열정을 쏟던 그의 은퇴 결정에 팬들은 박수를 보내면서도 아쉬움을 표현했다. 반복적으로 당하는 부상이 그의 대표팀 생활에 발목을 잡았다. 그는 A매치 110경기 출장 10골이라는 기록을 남기고 대표팀을 떠났다.
#‘실리주의자’ 기성용
어떤 선수에게나 마찬가지겠지만 기성용에게 대표팀은 특별한 존재였다. 대표팀에서 좋은 기량을 보이고 보는 이들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왔다. 소속팀을 선택하는 기준도 대표팀이었다. 대표팀에서 좋은 기량을 보이기 위해 주전으로 활약할 수 있는 팀을 고르는 ‘실리적’ 선택을 해왔다.
기성용은 소속팀에서 어려움을 겪으면 대표팀에서도 영향을 받는다는 경험을 셀틱 시절 겪은 바 있다. 셀틱 이적 첫 시즌 주전에서 밀려난 상태에서 2010 남아공월드컵에 나섰고 온전치 못한 경기력을 보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도움 2개를 기록했지만 모두 세트피스 상황에서 나온 것이었다. 경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체력이 부족한 듯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당시 월드컵 원정 첫 16강까지 진출한 대회에서 4경기 모두 교체돼 나왔다.
이후 유럽에서 가치를 인정받으면서 리버풀, 아스널, AC 밀란, 유벤투스 등 명문 구단과 연결되기도 했지만 기성용은 주전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팀을 선택했다. 기성용은 “모든 선수들이 빅클럽에 가기를 원하지만 나에게 빅클럽은 ‘나를 원하는 팀’이다”라는 말은 현재까지도 회자된다.
순항하던 스완지 시절 감독과 불화가 일어 선발에서 제외되자 과감히 임대를 선택하기도 했다. 2013-2014시즌이 이미 개막한 이후였음에도 선덜랜드 임대는 결국 스스로 가치를 더욱 높이는 선택이 됐다.
2018 러시아월드컵을 마치고 대표팀이라는 부담을 다소 내려놓을 수 있게 되면서 기성용은 그제야 규모가 큰 클럽인 뉴캐슬로 이적했다. 실리적인 선택으로 10여 년간 유럽에서 활약한 그의 행보는 후배들에게 좋은 본보기로 남고 있다.
김상래 기자 scourge@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