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력·근성 갖춘 ‘벤치마킹형 외인’ 합류 직후 맹활약…가정폭력 논란에도 영입 ‘클린 베이스볼’ 역행 비판
키움 외국인 타자 에디슨 러셀은 시즌 도중 영입됐음에도 불구하고 적응기 없이 맹활약을 펼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러셀은 키움 히어로즈가 테일러 모터를 내보내고 대체 외국인 타자로 영입한 내야수다. 오클랜드 애슬레틱스가 2012년 신인 드래프트 1라운드(전체 11번)에서 뽑은 특급 유망주였다. 2014년 7월 시카고 컵스로 트레이드된 뒤 2015년 빅리그에 데뷔해 주전 유격수 자리를 꿰찼다. 2016년엔 홈런 21개를 터트리며 내셔널리그 올스타로 선정됐고, 컵스의 월드시리즈 우승에도 큰 힘을 보탰다. 2017년부터 장타력이 떨어져 고전하긴 했지만, 2018년에도 130경기에 나가 타율 0.250, 홈런 5개, 38타점을 기록했다.
올해 창단 첫 한국시리즈 우승을 노리는 키움은 그라운드 안팎에서 천덕꾸러기였던 모터를 정리하면서 과감한 승부수를 던졌다. 지난해 팀에서 방출된 후 소속팀을 찾지 못하고 있던 러셀을 낚아채 한국으로 데려왔다.
올 시즌 러셀의 몸값은 총 53만 8000달러(약 6억 5000만 원). 선수 영입에 돈을 많이 쓰지 않는 키움이 대체 외국인 선수 연봉 한도를 꽉 채워 계약서에 사인했다. 그러나 러셀은 지난해 컵스에서 연봉 340만 달러(약 40억 원)를 받았던 선수다. 직전 시즌까지 메이저리그에서 뛰던 20대 중반 특급 선수가 한국에 온다는 것만으로도 화제가 됐다.
#러셀은 어떻게 돌풍을 일으켰나
현재 러셀이 보여주고 있는 활약은 구단의 기대와 투자금액을 뛰어넘고도 남는다. 빅리그 올스타 유격수답게 강한 타격, 탄탄한 수비, 침착한 성격의 3박자를 갖췄다. 기본적으로 운동 능력이 탁월한 선수다. 오랫동안 경기를 뛰지 못했는데도 실전 감각을 단숨에 회복했다.
데뷔전이던 7월 28일 두산 베어스전에서 상대 에이스 라울 알칸타라의 시속 151㎞ 강속구를 공략해 첫 안타를 쳤다. 다음날엔 대부분 외국인 타자들이 적응하는 데 애를 먹는 투수 유희관과 맞섰지만, 시속 119㎞짜리 체인지업을 잡아당겨 2루타를 만들어냈다. 빠른 공과 느린 공을 자유자재로 쳐내는 콘택트 능력을 과시했다. 7월 31일 삼성전에서는 벤 라이블리의 커브를 받아 쳐 KBO리그 데뷔 첫 홈런포까지 쏘아 올렸다. 이후에도 4할에 육박하는 타율로 키움의 연승 행진을 뒷받침했다. 덕분에 키움은 안 그래도 강한 국가대표급 타선을 한결 다채롭게 운영할 수 있게 됐다.
근성도 남다르다. 러셀이 데뷔하던 날, 상대팀 두산은 2-3으로 뒤진 9회초 1사 2·3루 위기서 김하성을 고의4구로 걸렀다. 다음 타자는 다름 아닌 러셀. 1루가 빈 상태였고 타자는 득점권 타율이 높은 김하성이었으니 고의4구는 자연스러운 수순이다. 하지만 그만큼 뒤에 기다리고 있는 타자가 덜 두려웠다는 의미도 된다.
러셀은 계속된 만루서 타석에 들어선 뒤 두산 불펜 이형범을 상대로 2타점 적시타를 쳤다. 승리에 완벽한 쐐기를 박았다. 김태형 두산 감독은 이튿날 취재진을 만나 “러셀에게 ‘앞 타자를 걸러서 미안하다’고 전해달라. 그 정도 타자인지 잘 몰라서 그랬다. 그런 선수가 왜 한국에 왔는지 모르겠다”며 멋쩍은 웃음을 보였다.
러셀은 방망이만 잘 치는 것이 아니다. 첫 경기부터 유격수를 맡아 빈틈없이 안정적인 수비력을 뽐냈다. 한국 야구 대표팀에서도 주전 유격수를 맡는 김하성이 자신의 자리를 내주고 3루수로 옮겼을 정도다. 훈련을 함께한 지 얼마 안 된 내야진 박병호, 서건창, 김하성과 금세 자연스럽게 손발을 맞췄다. 빠르면서도 여유 넘치는 송구와 민첩하면서도 서두르지 않는 수비 동작에 상대 선수들이 혀를 내두르고 있다.
야구를 대하는 진지한 자세와 몸 관리 방법, 훈련 방식 등도 다른 선수의 귀감이 될 만하다. 손혁 키움 감독은 “2군에서 단 두 경기를 뛰는 데도 구체적인 계획이 있더라. 무엇 하나 허투루 하는 게 없다. 러셀이 경기를 준비하는 걸 보면서 다른 선수들도 느끼는 게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또 “1군 구장인 고척스카이돔에 도착하자마자 (수비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라이트 위치부터 확인하는 모습을 봤다. 다시 한 번 클래스가 다른 선수라는 걸 실감했다”고 감탄했다.
외국인 선수 제도 도입 초기 KBO리그를 거쳐 간 선수들은 ‘우물 안 개구리’ 같던 국내 선수들에게 선진 야구 기술과 문화, 루틴을 알려 준 일등공신들이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오히려 미국에서 실패한 선수들이 한국으로 와 기량을 끌어올린 뒤 다시 메이저리그로 유턴하는 일이 많아졌다. 오죽하면 “외국인 선수도 키워서 쓴다”는 의미로 ‘육성형 외인’이라는 표현까지 등장했다. 러셀은 이런 추세 속에 모처럼 등장한 ‘벤치마킹형 외인’이다. 젊은 선수가 많은 키움의 특성상, 러셀의 ‘살아 있는 교육’은 더 큰 자양분이 될 수 있다.
빼어난 기량과 달리 러셀은 과거 가정폭력 전력으로 영입 당시 논란을 낳은 바 있다. 사진=연합뉴스
#뛰어난 실력은 ‘가정폭력’ 전력의 면죄부가 될까
다만 러셀에겐 치명적인 과거가 있다. ‘가정폭력’이라는 어둠의 꼬리표다. 러셀은 컵스에서 뛰던 2018년 10월, 이혼한 전 부인을 육체적·정신적으로 학대한 혐의로 40경기 출장 정지 처분을 받았다. 이로 인해 2018시즌 마지막 12경기와 2019시즌 첫 28경기를 뛰지 못했다. 지난 시즌 경기력이 급격히 떨어진 것과 팀에서 방출된 뒤 무적 신분으로 남아 있던 데는 이 사건이 깊이 연관돼 있다.
여성과 아이를 대상으로 한 폭력에 엄격한 철퇴를 가하는 메이저리그는 러셀에게도 예외 없이 강력한 제재를 했다. 오히려 “40경기 출전 금지는 다른 가정폭력 사건에 비해 수위가 너무 낮다”는 의견이 많아 러셀의 복귀 당시 반대 여론이 들끓었을 정도다.
러셀의 가정폭력 문제는 피해자인 전 부인 멜리사 레이디가 2018년 9월 자신의 블로그에 장문의 글을 올리면서 수면 위로 떠올랐다. 사실 비슷한 의혹이 2017년 처음 불거졌지만, 정작 피해자인 아내가 경찰에 협조하지 않아 유야무야 넘어갔다. 레이디는 1년 뒤 작성한 폭로글에서 “당시에는 가족에게 피해가 갈까봐 조사에 응하지 않았다. 이제는 모든 걸 말할 수 있다. 결혼 생활 내내 러셀은 내게 신체적, 물리적, 언어적으로 폭력을 가했다”고 폭로했다.
야후스포츠도 2018년 12월 ‘러셀의 전 부인과 전 여자친구가 밝히는 문제적 진실들’이라는 제하의 기사에서 “전 부인은 러셀로부터 여러 차례 신체적 폭력과 ‘가스라이팅’(말로 타인의 심리나 상황을 교묘하게 조작하고 스스로를 의심하게 해 통제와 지배력을 강화하는 행위)에 시달렸다”고 썼다.
사태가 일파만파 번지자 메이저리그 사무국은 진상 조사에 돌입했다. 이어 “전 부인의 주장대로 러셀의 신체적, 언어적 가정폭력 사실이 확인됐다”는 결론과 함께 출장 정지 징계를 발표했다. 러셀은 즉각 성명을 발표해 “전 부인과 가족, 컵스 구단과 동료들, 팬들에게 사과한다. 내 행동에 책임을 지고 상담가와 함께 심리치료를 병행하겠다”고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러셀의 대리인을 맡고 있는 스캇 보라스 코퍼레이션은 영입 협상 도중 키움 구단이 당시 상황을 묻자 “신체적 폭력은 없었다. 과격한 문자 메시지를 보낸 것이 문제됐을 뿐”이라고 말을 바꿨다. “가정폭력에 연루된 대부분 선수들이 80경기 출장 정지 징계를 받는다. 그런데 러셀은 그 절반인 40경기에 그쳤다”는 점을 근거로 내세웠다. 러셀을 꼭 데려 오고 싶었던 키움 입장에선 사실 여부를 떠나 ‘믿고 싶은’ 주장이었을 터다.
결국 키움은 못 이기는 척 그 해명을 믿기로 했다. 김치현 키움 단장은 취재진과 인터뷰에서 “우리 입장에선 징계 조사 내용을 다룬 공식 리포트를 보고 싶었다. KBO와 보라스 측을 통해 사무국에 요청했는데, 개인정보라 공개할 수 없다고 하더라. 전 부인과 러셀이 주장하는 내용이 서로 많이 달라 구단이 정확한 팩트를 체크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그래도 충분히 납득할 만한 확인 과정을 거쳐 러셀 측 주장이 더 신빙성 있다는 판단을 내렸다”고 설명했다.
물론 가정폭력 징계 전력이 있다 해도 한국 구단 입단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한미 선수협정’에는 이와 관련한 조항이 마련돼 있지 않고, 러셀은 현지에서 모든 징계를 마친 ‘자유의 몸’이다. 하지만 리그 규약이나 규칙보다 중요한 건 KBO가 주창하는 ‘클린 베이스볼’의 가치다. KBO 상벌위원회가 품위 손상 행위에 대한 징계를 점점 더 강화하고, 아예 팀 내에 ‘원스트라이크 아웃’ 제도를 도입한 구단도 있다. 석연치 않은 과거에 구단이 앞장서 면죄부를 주고, 팬들도 비판 의식 없이 선수의 성적에만 열광하는 것은 분명 최근 KBO리그 흐름을 역행하는 행위다.
러셀의 키움행은 같은 이유로 일본 언론에서도 화제가 됐다. “메이저리그 구단들조차 이미지 훼손을 걱정해 영입하지 않은 선수가 KBO리그에서 뛰게 됐다”며 당시 사건을 상세히 소개했다. 일본 더 다이제스트는 “러셀은 불과 몇 년 전까지 메이저리그의 미래를 빛낼 슈퍼스타 후보로 주목받았던 선수다. 가정에서의 어리석은 행동으로 커리어를 망쳤다. 이혼한 전처가 ‘교제할 때부터 바람을 피웠다’, ‘아이가 태어난 뒤에도 폭언 폭력을 일삼았다’, ‘러셀의 폭력 때문에 우울증에 걸렸다’고 적나라한 폭로를 했기 때문”이라고 썼다. 다만 “러셀이 재기를 노리기 위해 미국이 아닌 다른 나라를 선택한 것은 좋은 결정으로 보인다. 러셀은 아직 26살이다. 자신의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친다면 다시 기회를 얻을 수 있다”고 내다봤다.
러셀도 이런 분위기를 잘 알고 있다. 한국에 오자마자 사과부터 했다. 정식 입단 전 취재진과 화상 통화 인터뷰를 진행해 “지난 과오를 반성하고 있다. 기본 교육 프로그램에 이어 추가 치료 프로그램도 자발적으로 이수했다. 앞으로는 더 강한 남자, 강한 선수가 되는 것보다 좋은 사람, 좋은 팀메이트, 좋은 인격체가 되는 데 중점을 두고 살겠다”고 다짐했다.
배영은 중앙일보 기자